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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제생병원 신경외과 병동에 누워 있는 김수연씨(22)는 예상대로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멍하니 초점을 잃은 눈동자, 쉴새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손과 다리, 이따금 고통스럽게 내뱉는 신음소리…. 그런 딸을 지켜보는 어머니 안씨의 마음이 또다시 심란해진 것일까, 안씨는 호스를 이용해 가래를 빼내던 손길을 멈추고 병실을 나갔다.
병동 한 귀퉁이에 마련된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던 안씨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이 투병생활. 그나마도 딸이 낫는다는 확신이라도 있다면 이렇게 힘겹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벌써 9개월째, 김수연씨는 여전히 식물인간인 상태다.
“믿어야죠. 그 어린 것도 뱃속에서 살았는데….”
잠시후 안씨는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었는지 김수연씨가 사고를 당한 때부터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김수연씨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지난 3월23일 새벽 6시 10분. 곤지암의 집에서 성남에 있는 시댁으로 가던 길이었다. 남편 김대원씨가 외아들인데다 시어머니도 혼자 살고 있어서 수연씨 부부는 시댁을 자주 찾아가는 편이었고, 한 번 가면 며칠씩 묵다오기도 했다고 한다.
사고가 나기 전날도 수연씨는 딸아이(채현, 2)를 데리고 시댁에 가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 댁으로 오라는 말을 남겼다. 개인사업을 하는 남편은 일 때문에 새벽에야 돌아왔다. 그런데, 그 시각에 남편은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까 집에 가서 옷을 챙겨오자며 앉자마자 다시 일어섰다.
새벽에 돌아온 남편이 피곤해보이기는 했지만 수연씨는 늘 있는 일이라 별 생각없이 자는 채현이를 안고 남편의 차에 올랐다. 그리고 곤지암 집에서 옷가지를 챙겨 다시 시댁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피곤함에 지쳐 깜빡 졸았던 것일까? 남편은 마주오던 포크레인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들이박고 말았다.
불행중 다행으로 딸 채현이는 열흘 정도, 남편은 두 달 동안 입원하는 정도의 부상에 그쳤다. 하지만 안씨는 그때 의식을 잃은 이후로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처음 사고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을 때는 정말 아찔했어요.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병원으로 오라는데, 그 말을 들으니까 발걸음이 안 떨어지는 거예요.”
안씨가 병원에 도착해서 보니 수연씨의 형상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어올라 있는데다, 온몸은 피투성이인 것이 살아 있다는 게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한순간의 교통사고가
빚은 수연씨 가족의 비극
곧이어 수술에 들어갔다. 복부를 크게 다쳐 뱃속에 고여 있던 피를 1천5백cc나 빼내고, 간을 네 바늘이나 꿰매고, 비장을 비롯해 완전 파손된 장기들을 잘라내는 대수술이었다. 머리도 두개골이 함몰되고 뇌를 크게 다치는 중상을 입었다. 하지만 의사들은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여러곳을 심하게 다쳐 자연치유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며 다시 덮어버렸다.
“처음엔 우리도, 병원에서도 임신중인 걸 몰랐어요. 엑스레이에서도 안 나왔으니까요. 임신 5개월째에 들어선 지난 7월에야 알았죠.”
안씨는 만약 처음부터 임신 사실을 알았더라면 아이를 지웠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뒤늦게야 임신 사실을 알고 가족들은 지워야 할 것인가, 그대로 둘 것인가를 놓고 갈등을 해야 했다.
솔직히 친정쪽에서야 만에 하나라도 아이 때문에 수연씨가 잘못될 것을 염려해서 아이를 지우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시댁쪽에서는 첫째가 딸이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낳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죽어가는 마당에 어느 쪽도 드러내놓고 이러자 저러자 말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수연씨의 남편 김대원씨(27)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의사들도 그동안 쓴 항생제나 약물들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다. 사산, 기형아 출산 등 여러 가지 가능성들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엑스레이 촬영 결과 외형적으로는 이상이 없다는 산부인과 의사의 판단에 의해 출산을 하기로 결론이 내려졌다.
수연씨가 비록 식물인간이기는 하지만 뇌사가 아닌 이상 아이가 자라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따라서 몸속에서 아이가 제대로 자란다는 보장은 없지만 일단 지켜보자는 것이 산부인과 의사의 판단이었다.
“딸이 더 걱정되는 게 엄마의 솔직한 욕심이기는 했죠. 하지만 살겠다고 그 위기 속에서도 살아난 아이를 지우기는 힘들었어요.”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랐다. 마침내 10월9일, 제왕절개수술을 통해 아들 다운이는 32주(8개월) 만에 엄마 뱃속을 나와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곧바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간 다운이는 몇차례 검사를 거쳐 정상임을 확인하고 지금은 퇴원해 아버지와 친할머니의 손에 키워지고 있다. 벌써 몸무게가 3.8kg이나 될 정도로 건강하게 자라고 있단다.
외손주 이야기가 나오자 안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이가 참 잘생겼어요. 다 제자식 예쁘다고 하지만 정말 잘생겼어요. 갓태어난 아이 같지 않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머리도 잘생기고”하며 옆에 앉아 있던 사람에게도 “우리 외손주 잘생겼지?”하고 확인한다. 안씨는 의사 선생님이 6개월이 될 때까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정상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식물인간 상태에서도 아이들만 보면
뭔지 모를 반응을 보이는 수연씨
안씨는 수연씨도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졌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40도 가까운 고열과 160이 넘는 고혈압도 사라지고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또 처음엔 꼬집어도 아무 반응이 없고 가만히 누워만 있더니, 지금은 몸을 뒤틀기도 하고, 꼬집으면 아프다는 반응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중환자실에서 일반병동으로 옮긴 것도 위험한 고비는 넘긴 것이 아니냐며 나름대로 긍정적인 해석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엄마의 희망일 뿐, 수연씨의 담당 주치의인 심기범 박사는 수연씨의 병세가 점점 상황이 호전돼가는 것이냐는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수연 환자는 교통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쳤어요. 두개골 골절은 물론, 미만성축삭손상을 입었죠. 과거엔 뇌를 다치면 무조건 중증뇌좌상이라고 불렀는데, 이것보다 더 심하게 다친 것을 미만성축삭손상이라고 합니다. 수술로는 안될 정도로 뇌가 전부 손상됐다는 것이죠.”
뇌는 학습능력과 인지, 기억능력을 조절하는 대뇌피질부위와 생명을 유지하고 조절하는 중추역할을 담당하는 뇌간으로 나뉜다. 이 두가지가 다 손상된 경우를 뇌사 상태라고 하고, 대뇌피질만 손상되고 뇌간은 정상인 경우를 식물인간 상태라고 한다.
심박사에 따르면 수연씨는 뇌간은 온전하지만 대뇌피질부위가 심하게 손상된 지속적 식물인간 상태로, 손상된 대뇌피질부위가 되살아날 가능성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희박하다고 한다. 체온과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현상은 뇌압치료를 하는 등 생물학적 치료에 의한 것이지 가족들의 기대처럼 손상된 대뇌피질부위가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의 말을 정리하면 지금 수연씨의 상태는 내버려두면 당연히 죽고, 치료한다고 해도 좋아진다는 보장도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오래 누워 있으면 폐렴에 걸리기 쉽고, 욕창이 생기고, 패혈증이 옵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 그것이 우려되는 점이죠. 현재로서는 치료를 하며 잘 되기를 희망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뿐이죠.”
그런데, 모성애는 참 신기한 것이다. 안씨에 따르면 아무런 의식도 없고, 생각할 능력도 없는 상태에서도 다운이를 낳자 수연씨의 젖이 돌기 시작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아무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딸 채현이가 병실에 왔다가면 꼭 혈압이 높게 오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채현이를 쳐다보는 것처럼 시선이 고정되고, 애가 움직이면 따라서 시선이 돌아간다고 한다. 안씨가 하도 신기해서 채현이를 수연씨 팔에 뉘었더니 그전까지 제멋대로 움직이던 팔이 팔베개를 한 것처럼 가만히 있더란다. 조이지도 않고.
수연씨 가족들은 지금 수연씨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그녀를 구급차로 싣고 간 성남의 한 병원을 상대로 민사소송중이다. 병원끼리 환자를 돈주고 사고파는 데 수연씨가 이용되는 바람에 치료를 방치해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안씨에 따르면 수연씨가 사고를 당한 지점에서 이곳 제생병원이 제일 가까운데도 거리가 더 먼 자기 병원으로 싣고 간 것도 도의적인 문제가 있는데다, 수연씨의 상황이 안 좋으니까 다시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옮겼는데, 그게 바로 돈을 주고 환자를 팔았다는 것이다.
“그때가 한창 출근시간이었어요. 서울로 가는 길이 얼마나 막혔겠어요. 그런데도 굳이 가까운 이 병원을 놔두고 그곳으로 간 거예요. 병원 사무장까지 돈을 주고 환자를 팔았다는 것을 인정했어요. 그런데 아직도 병원장만 인정을 안하고 있어요.”
병원끼리 환자를 사고파는 데
수연씨가 이용되었다고 주장하는 가족들
6시 10분에 사고가 났는데, 성남의 병원으로 갔다가 다시 서울의 병원으로 옮기면서 2시간 가까운 시간을 허비했다. 더구나 치료라고는 팔, 다리에 깁스만 해놓고 산소마스크도 안 씌운 채 환자를 방치했다는 게 가족들의 불만이다.
“수연이가 그 병원에 있다는 것도 우리가 병원마다 수소문해서 8시 30분이 돼서야 알았어요. 가보니까 그때까지도 신원파악이 안돼 ‘무명녀’라고 되어 있더라구요. 간호원들이 뭐라고 한 줄 아세요? 목까지 다 마비가 되어서 목마사지해서 근육을 풀고 산소마스크를 하느라고 자기들이 얼마나 고생한 줄 아느냐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환자를 방치하는 게 병원입니까?”
가족들은 한달 만에 수연씨를 이곳으로 옮겼다.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였지만 무엇보다도 그 병원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사들의 생각은 가족들의 주장과는 조금 달랐다. 수연씨의 담당주치의인 심박사도 가족들의 심정은 이해하고, 일부 일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터무니 없는 주장도 있다고 한다.
“사실 사고가 나면 모든 게 한스러워지죠. 집안이 엉망이 되고, 그러다 보면 남을 탓하게 마련입니다. 의사가 원망스럽고, 서운한 감정이 들게 마련이죠. 그래서 큰 병원 좋은 병원을 찾는 것인지도 몰라요.”
그는 결과에 따라 치료과정에 오해가 생길 요소가 많다고 지적한다. 산소호흡기를 일찍 했으면 약간의 치료효과를 줄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이 식물인간 상태로 나빠지는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수연씨는 회복불능 상태의 중상이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또한 다른 병원으로 보내는 것이 의사 마음대로 보내고 말고 할 수는 없다고 한다. 다른 병원에서 받아주어야 환자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냥 가까운 병원이다, 큰 병원이다 해서 밀어넣기로 보내다보면 환자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수도 있어요. 중환자실, 응급실에서 환자를 받을 여유가 있어야 받는 것이니까요. 그 병원에서 환자를 받을 수 있는 여유가 있느냐 없느냐를 빨리, 정확히 알 수 있는 시스템은 외국에서도 완벽하게 갖춘 곳이 드뭅니다. 그러다보니 안면이 있는 병원으로 밀어넣기로 보내는 경우가 있죠. 무조건 멀리 보냈으니까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폐가 있어요. 물론 김수연씨의 경우는 그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요.”
심박사의 말대로 지금 수연씨의 가족들은 모든 것이 엉망이다. 시어머니는 두 손주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다. 남편 대운씨도 사고로 인한 외형적인 상처는 다 나았지만 사고 후유증과 자책감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하고 있다. 친정집 식구들도 병간호하느라 병원에 매달려 있는 실정이다. 양가 식구들이 전부 일손을 놓고 있는 것이다.
“얼마전 수연이 아빠는 개인택시가 나왔어요. 수연이 병원비라도 대려면 이제 다시 일을 해야죠. 언제까지 두손 놓고 있을 순 없잖아요.”
처음엔 식물인간 상태에서 아이를 무사히 낳았다는 호기심에 취재를 시작했지만, 수연씨의 가족들과 담당 주치의를 만나면서 교통사고가 주는 고통과 피해를 다시한번 뼈저리게 확인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분당선 서현역과 이어진 백화점 로비에선 아동인형극이 한창이었다. 그 주위를 엄마와 아이들이 손을 잡고 빙 둘러앉아 재미있게 보고 있었다. 그 속에 수연씨와 딸 채현이, 아들 다운이가 끼여 있을 날이 올 수 있을까? 아니, 꼭 그런 날이 오는 기적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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