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품의 복제

우리는 위대한 신발명들이 예술형식의 기술 전체를 변화시키고 또 이를 통해 예술적 발상에도 영향을 끼치며 나아가서는 예술개념 자체에까지도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된다

- 폴 발레리.『예술론집』중

영화혹은 소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최근 영국 과학자에 의해 복제양이 탄생했고,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서 원숭이의 복제가 성공하면서 복제 인간의 탄생도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했다. 생명 복제에 관한 문제는 인간 지식의 한계에 질문을 던졌을 뿐 아니라 도덕적, 윤리적인 면에서 크게 논란이 되고 있다.

과학기술의 혁명은 미술품의 복제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으며, 미술의 본질에도 영향을 끼쳤다. 천마에 목숨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감히 생명의 복제와 견주어 말하기는 송구하지만, 어쨌든 미술에 있어서 복제의 문제도 미술가의 윤리, 도덕과 관련되어 논란이 되는 문제이다. 예술품에도(원작의 경우) 고유의 생명력이 있다. 그것을 제작한 예술가는 나름대로 영감을 받아서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미술품의 복제 소사

미술품의 원본을 복제하는 일은 선망의 대상이 되는 위대한 미술 작품이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에서 시작했다 그러한 사실은 제작자나 감상자에게 모두 불만족스러운 것이었으며, 미술품의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게 되면서 모사, 위조, 도용, 표절 등이 증가하게 되었다.

고대인들은 동일한 그림을 베껴두거나 도제, 조수, 추종자, 주조술사들까지 동원해 모사품을 제작했다. 그러나 손으로 제작하는 모조품은 아무리 잘 만들어져도 원본에 비하면 정확하지 못하다. 또 그런 형식으로 모사품을 만드는 일은 거의 원작을 제작하는 일과 맞먹는 시간과 노동이 소요되었다. 따라서 정확하게, 좀더 많은 량을 산출할 수 있는 복제 방법이 연구되었다.

목각이 등장하고 판화가 나타나면서 복제는 본격화되었다. 인쇄술의 발명은 문자의 복제 가능성의 문을 열었고, 문학뿐 아니라 미술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카메라가 발명되면서 사진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의 손이 하던 일을 대신했다. 복제 기술은 전래적인 예술작품 전체를 복제의 대상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표현 방식의 변화와 예술적 처리 과정에서도 그 자체의 독자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컴퓨터는 예술품 제작방식의 변화와 함께 예술의 개념에조차 변혁을 초래했다. 현대적 제조 방식을 통한 대량복제의 가능성은 순수 예술의 전반적 가치 구조를 침식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화가 아닌 피카소 - 아우라 없는 미술품

생명의 복제와 관련한 신문 기사중“피카소가 복제돼도 화가가 아닐 수 있다”는 표현이 있었다. 만약 체세포를 이용한 인간 복제가 이뤄질 경우, 표현 형질은 세포핵 속의 유전자(DNA)의 지시에 따라 결정되어 겉모습은 피카소이지만, 성장 환경에 따라 복제 인간에게는 화가로서의 자질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찍이 1936년에 발터 벤야민은 그의 저서『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대량 복제가 가능해진 현대 미술의 특징을‘분위기의 상실’에 있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분위기란- 아우라(Aura)라는 표현을 쓰는데 -‘아무리 가까이 있다고 느껴지더라도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이라고 그 스스로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썼다.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의 상태에서 휴식자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먼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이 산과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산이나 나뭇가지의‘분위기’가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조형예술작품을 복제한 것은 아무리 원작과 똑같아 보여도 그 가운데 작품의 원작이 가지는 유일무이성과 신성한 기운은 빠져 있다는 것이다. 복제한 인간이 피카소이긴 한데 화가는 아닌 경우와 같다고나 할까? 아우라(마땅히 대신할 수 있는 단어가 없어 그냥 아우라라고 표현한다)란 유일성으로 인해 비롯되는 그 존재를 휘감고 있는 듯한 분위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있음, 그것이 놓여 있는 자리에만 유독 실재하는 존재감, 복제품으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분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미술품의 원작에는 보는 사람에게 와 닿는 숨결과 같은 교묘한 분위기, 일종의 은밀한 교감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전통적 예술 작품은 늘 살아있는 어떤 성격, 즉 아우라를 갖고 있었고, 미술관에 전시된 예술품은 그 아우라를 보존하고 있었다.

예술의 생존을 위한 복제품

복제품으로서는 예술품(원작)이 가진 고유의 것들, 즉 안료와 채색의 감각이 풍부한 재료의 효과, 스케일이나 질감을 그대로 느끼기 어렵다. 특히 사진에 의한 복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한국에 있는 우리가 미켈란젤로의 조각이나 렘브란트의 회화와 같은 걸작을 있는 자리에서(책으로나마) 볼 수 있는 것은 복제 기술 덕분이다.

예술품의 복제가 예술품을 위해 인위적으로 이루어지는 예도 있다. 복제 예술품은 전문 용어로‘레프레카’로 불리는데, 화재나 도난 등으로 인한 진본의 손실에 대비, 박물관측이 만드는 것이다. 레프레카 작품들에는 합성고무, 폴리에스테르 등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원작에 사용된 대리석, 청동 등의 가루를 섞어 원작과 같은 모양과 질감을 그대로 살려낸다.

영국의 여러 박물관들은 유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문화재가 어떻게 사용됐는가를 이해하기 쉽도록 전시하면서, 관람객의 참여나 체험을 강조하는 코너를 마련해 놓고 있다고 한다. 실재 유물과 동일한 재료로 만들어 놓은 복제품을 유물 앞에 두어 예술품의 무게, 질감 등을 직접 느낄 수 있게 한 것이다. 문화재를 보존하고 널리 알리기 위한 방법으로 이처럼 복제 기술을 적절히 이용한 예들이 있다.

복제 기술이 탄생시킨 미술

사진술이 발달하면 회화의 죽음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사진이 초상화를 대체해버리긴 했지만 오히려 자연주의를 추구하도록 자극했고, 상징주의나 추상주의와 같은 새로운 시각의 미술을 탄생케 했다. 그리고 수공예품의 가치를 높이기도 했다. 대량생산된 비개성적인 복제품보다는 수공예적인 것의 가치를 새로이 음미하게 된 것이다.

사진은 무엇이 미술인가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가져왔다. 1960년대 후반을 장식한 이른바 극사실주의(Super-realism) 혹은 포토리얼리즘(Photo-realism)으로 불리는 유파의 회화는 카메라 렌즈로 보는 듯하게 사물을 그대로 재현시키는 데 주력하였고, 그늘의 조각은 실물 그대로를 묘사하여 미묘하게도 실제 인물보다 더 강한 인상을 남기도록 제작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사물의 정확한 묘사일 뿐 그림의 주제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포토리얼리즘에 있어서 그림의 의미는‘사물의 다시 보기’와 같은 것이다. 그들의 작품은 주제나 대상이 무엇이냐에 관계없이 그것을 감상하는 이들에게‘너무도 정확하게 재현된 것을 볼 때의 놀라움’을 준다.

컴퓨터 그래픽이나 비디오 아트의 출현은 창작이 아니라, 기존의 그림을 합성하거나 변형시키는 것만으로도 작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게 되었다.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초창기 작품은 주로 텔레비전 내부회로를 변형시켜 기존의 이미지를 왜곡하거나 브라운관을 조작하여 추상적인 선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예술가의 제작 의도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기계의 예측할 수 없는 우연한 이미지를 이용한 것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사용하는 텔레비전 수상기, 자석, 비디오신디사이저 등은“레오나르도 같이 정확하고, 피카소 같이 자유스럽고, 르노와르 같이 현란하고, 몬드리앙 같이 심오하고, 폴록 같이 강렬하며, 제스퍼 존스 같이 서정적인 것”을 다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가 보편화된 요즈음 누구라도 얼마든지 원하는 작품을 데스크 탑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도용하여 변형하거나 합성하거나 축소, 확대, 왜곡, 반복 등을 통해 기계적 조작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곧 표절의 문제로 연결된다.

그간 미술 작품에 있어서‘베끼는 것’은 다른 장르에 비해 허용도가 높았다고 할 수 있다. 한 교수 밑에서 배운 많은 학생들의 화풍이 유사한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는데, 자신의 이름으로 어떤 그림을 내놓기까지는 다른 사람의 그림을 흉내내거나 베끼는 것이 허용되기 때문에, 그것을 반복하다보면 다른 사람의 화풍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게 되고 만다. 그러나 미술의 감상자는 가요나 영화에 비해 아무래도 소수이다 보니 그만큼 쉽게 들통나지 않은 채 이러한 순환은 계속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컴퓨터 내의 어마어마한 정보를 앉아서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예전에는 붓과 물감과 개인의 솜씨에 의존해야 했던 작업이, 이제는 마우스와 키보드의 간단한 조작만으로도 그림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전 시대 예술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던 창작적 능력이나 감성을 강조하는 일에 덧붙여 양심의 거듭남까지도 호소해야만 하게 되었다.

미래 세계가 그러하듯 미술도 어떤 모습으로 발전할 지 속단할 수가 없다. 과학의 발전은 어떤 양상으로든 계속될 것이며 복제 기술 또한 상상할 수 없이 발전할 것이다. 아울러 회화를 비롯한 시각 예술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발전해 갈 것이다. 그렇다고 과학의 발전에 제동을 걸 수는 없는 일이다.

급변하는 세계, 변화하는 문화에 대한 열린 마음과 적응력을 기르는 동시에“발전이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발언에도 귀를 기울어야 할 것같다.

모든 것의 복제가 가능해진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술에 있어서도 윤리와 도덕은 강조되어야 할 것이며, 그 발전의 방향을 새롭게 모색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