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의 철학

계 명 대 학 교 철 학 연 구 소

야누스적 에로스

- 에로스에 함축된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 -

한 자 경 (계명대)

1. 사랑의 신화

흔히 사랑을 하나되기라고 말한다. 그것을 아주 잘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반쪽 인간 이야기이다. 양성을 가지고 있던 인간이 너무 힘이 세기에 제우스신이 그들을 모두 둘로 쪼개 놓았다. 둘로 나누어져서 불구가 된 반쪽의 인간은 자기 자신의 다른 반쪽을 찾아 헤맨다. 지구 위 어딘가에서 자신의 반쪽을 찾아 서로 끌어 안으면, 그 때 비로소 완전한 하나가 된다. 그 하나가 되기까지 자기 반쪽을 찾는 애절한 마음, 드디어 찾았을 때 하나가 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사랑이고, 그래서 포옹하여 하나가 됨이 사랑의 완성이다. 포옹의 결과 새 생명이 생긴다면, 그 아이는 그 부모가 하나이었음을 증명하는 사랑의 결과물일 것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사랑의 신화'이다. 우리는 대개 이 신화 속에 산다. 그리고 상대방도 이 신화 속에 살기를 기대한다. 내가 당신을 나의 반쪽이라고 믿듯이, 당신도 나를 당신의 반쪽이라고 믿기를 바라고, 함께 포옹하고 있는 순간 내게 찾아드는 느낌을 우리의 하나됨의 느낌이라고 내가 생각하듯이, 당신도 그 순간 우리의 하나됨만을 확인하고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하나가 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 반쪽과 반쪽을 합해서 하나를 이룰 때, 과연 반쪽이 하나가 된 것이겠는가? 하나 속에서도 반쪽은 반쪽으로 남는다. 단지 그 나머지 반쪽과의 접촉이 있을 뿐이다. 서로 접촉하고 있는 경계, 둘을 만나게 하지만, 다시 그 둘을 갈라놓고 마는 그 경계선에 의해 반쪽은 다른 반쪽과 맞닿은 단지 반쪽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랑에 있어 하나됨을 원한다면, 그러한 하나됨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진정한 하나됨, 신화적 하나됨이란 과연 어떤 상태이겠는가? 경계없는 하나됨에 이르는 길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2. 반쪽되기와 하나되기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경계없는 하나이기를 원한다. 경계가 있는 한, 견딜 수 없는 분리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가까이 있어도 더 가까이 있고 싶은 그런 안타까움이 남겨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랑의 지향점, 사랑의 理想은 경계없는 하나됨이다. 둘을 갈라놓는 경계가 기적처럼 사라져버린 완전한 하나.

그러나 그 이상이 실현된 순간에도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까? 이미 경계없는 하나가 되어 버렸다면, 내가 어디에서 당신과 접촉할 수 있겠는가? 이미 하나가 되어 버렸다면,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어디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보면 사랑은 반쪽됨에서 시작해서 하나됨으로 끝나며, 경계지움에서 시작해서 무경계로 끝난다. 둘을 접촉케 하지만 다시 그 둘을 분리시켜놓는 경계는 그 형성과 더불어 사랑을 시작하게 하며 그 사라짐과 더불어 사랑을 끝나게 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사랑이 하나되고자 함이라면, 그 하나되고자 함은 반쪽되기로부터 시작한다. 당신에 대한 사랑의 느낌이란 결국 내 마음 안에 당신이 차지해야 할 공허한 자리를 마련함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당신만이 채울 수 있는 그런 빈자리가 되며, 그 빈자리의 마련 속에서 나는 반쪽이 되고, 당신은 그 빈자리를 채워줄 나의 반쪽이 된다. 당신이 아니였다면, 나는 하나이었을 것이다. 당신이 있기에, 하나이고 싶은데 하나가 아닌 당신이 있기에, 나는 하나 아닌 반쪽이 되고, 당신과 결합하여 하나가 되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된다. 이처럼 당신으로 인한 나의 반쪽되기는 나와 당신 사이의 견딜 수 없는 경계긋기이다.

그러나 사랑이 지향하는 바는 그 경계를 없애는 것이다. 나와 당신의 경계를 없애서 나와 당신이 하나되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경계를 긋게 되고, 사랑하기에 그어진 경계를 견딜 수 없는 것이라면, 사랑하기에 반쪽이 되고, 사랑하기에 반쪽임을 견딜 수 없어 하나가 되고 싶은 것이라면, 사랑이란 이 얼마나 자기모순적이고 자기소모적인 활동인가?

3.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

사랑을 포함한 욕구가 지닌 이러한 특징, 즉 욕구는 그 욕구적 활동을 통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마는 특징을 흔히 욕구의 보수성 또는 회귀성이라고 칭한다. 우리의 신경은 긴장 상태가 되면, 스스로 그 긴장을 없애려는 성향을 가진다. 긴장을 통해 성립한 욕구가 지향하는 바는 그 긴장의 증대이기보다는 오히려 그 긴장의 소멸이다. 욕구가 충족되는 순간의 만족감은 바로 그 욕구를 일으킨 긴장이 사라짐에서 오는 만족감인 것이다.

이처럼 욕구의 과정이 긴장과 긴장해소, 고통과 고통의 끝이라는 자기부정적 자기소모적 운동과정이며, 그 결과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마는 과정이기에, 욕구는 항상 제자리에서 다시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욕구 또는 본능의 "반복강박"이다. 긴장은 시작되고 나면 곧 해소되기를 지향하며, 해소되고 나면 다시 긴장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이 되풀이 되는 긴장과 긴장해소의 운동 속에서 밝혀지는 것이 곧 우리의 욕구 안에 작동하는 두가지 대립된 본능인데, 이것이 곧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이다. 무경계의 평정상태를 벗어나 나의 개체의 경계를 형성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다른 개체와의 긴장관계에 들어서는 것은 바로 삶의 본능이다. 생명이란 외적 자극에 의해 형성된 일종의 교란상태이다. 무기물이 안정된 상태라면, 유기물적 생명체는 불안정 상태이다. 이 자극상태 또는 긴장상태가 흥분이며 고통이기에, 유기체는 또 본능적으로 그 긴장과 흥분과 고통을 종식시키고자 욕구한다. 유기체적 교란상태에서 비롯되는 긴장과 흥분과 고통의 종식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유기체가 욕구 속에서도 궁극적으로 그 욕구충족을 통해 흥분과 고통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것은 욕구가 죽음의 본능을 좇고 있음을 말해준다. 삶의 본능을 따라 형성된 욕구가 죽음의 본능을 좇아 지향하는 것은 바로 생명체가 가지는 교란, 긴장과 흥분상태를 벗어난 고통이 없는 상태, 영원한 불변의 정지상태, 일체의 경계가 사라진 무기물적 하나됨의 상태, 원시적 동일성의 상태이다. 긴장과 흥분의 惑이 없는 "不惑"의 상태, 고통스런 번뇌가 없는 "열반"의 상태이다.

사랑 역시 자신 안에 만들어진 빈자리의 의식, 경계지움에서 비롯되는 반쪽됨의 의식이기에 일종의 긴장과 흥분과 고통이며, 따라서 다른 모든 욕구와 마찬가지로 바로 그 긴장과 흥분과 고통의 종식을 목표로 한다. 하나됨으로서의 사랑의 완성은 하나되고자 하는 사랑의 욕구가 담고 있는 긴장과 흥분과 고통의 끝, 사랑의 욕구의 끝을 의미한다. 사랑의 욕구의 궁극적 목표는 바로 그 욕구의 종식인 것이다. 이렇듯 사랑은 반쪽됨의 긴장상태로부터 출발하되 하나됨을 통해 그 긴장을 없애려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 결국 사랑으로 인한 반쪽되기와 하나되기는 우리의 생이 함축한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의 표현이다.

4. 공성의 자각

삶의 본능이 궁극적으로 죽음을 향해 있으며, 죽음의 본능으로 회귀하고 만다는 것, 하나되고자 하는 사랑은 반쪽됨의 긴장에서 출발하되 하나됨을 통해 그 긴장의 소멸, 사랑의 욕구의 소멸로 나아간다는 것,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다른 모든 욕구와 마찬가지로, 아니 삶 자체와 마찬가지로 사랑의 완성은 곧 사랑의 끝이 된다는 이런 모순과 역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바로 이 모순과 역설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위한 삶인가?"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무엇을 위한 사랑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그 답을 찾지 못하고 당황하게 된다. 삶은 그저 있는 것이다. 삶의 끝은 삶의 시작과 마찬가지의 원점으로 돌아갈 뿐이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면서 힘들여 무수한 문제들을 해결하며 살기에 마치 우리의 삶이 무엇인가 많은 것을 이루는 것인듯 생각하지만, 실제로 삶이 해결해가는 문제들은 바로 그 삶이 있기에 비로소 생긴 문제들일 뿐이다. 삶은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다시 그것을 풀어가는 과정이기에, 다 살고 나서 문제가 풀리고 나면, 문제가 시작되지 않았던 처음과 동일한 상태로 돌아간다. 그러니 일평생 살았어도 사실 살지 않았어도 마찬가지였을 그런 삶이 될 뿐이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사랑하기에 반쪽이 되어 다른 반쪽과 하나가 되고자 열망하지만, 하나가 되어 사랑이 완성되고 나면 긴장과 흥분의 사랑은 끝난다. 사랑의 끝에 우리가 되돌아가게 되는 곳은 결국 사랑 이전과 마찬가지의 조용한 평정상태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고통과 기쁨의 파행은 왜, 무엇을 위해 일어나는가? 그에 대한 답은 없다. 그냥 그렇게 있는 것이다. 없어도 괜찮았을 것, 사실 있지 않았어도 마찬가지였을 그런 사랑이 그냥 그렇게 있는 것이다. 삶의 끝이 그 시작과 맞물리기에 한편 공허한 것이라면, 사랑 역시 그 끝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기에 그렇게 공허한 것이다.

사랑의 욕구로 하여금 그러한 공허한 운동을 하게 만드는 이 죽음의 본능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사랑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삶의 본능이 죽음의 본능을 따르고 있다는 것, 사랑의 욕구가 흥분억제의 열반원리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우리는 삶을 살되 맹목적 삶을 넘어서 있다는 것, 우리는 사랑의 욕구를 따르되 그 맹목적 욕구를 넘어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삶의 본능을 좇으면서도 이미 그 본능을 넘어서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구에 따라 살면서도 그 욕구의 끝을 내다볼 줄을 안다. 우리는 사랑하되, 그 사랑이 가지는 자기도취적 성격, 그 반복성이 함축하는 자기기만성과 허구성, 사랑으로 위장한 자기보존본능과 종족보존본능의 위력 등을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의 허구성과 허망성을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되 사랑 뒤의 공허함을 미리 직감하고, 웃음을 웃되 웃음 뒤의 공허함을 미리 예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과 사랑의 공허함의 자각은 삶 속의 죽음, 사랑의 욕구 속의 죽음의 본능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최대의 선물일 것이다. 공허함의 의식, 일체의 空性의 의식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인생을 "空手來 空手去"로서 파악하고, 사랑을 그 빈손을 장식하는 화려한 꽃으로 이해한다. 힘들게 피었다 아프게 지고마는 꽃, 결국은 빈손 위의 가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공성의 자각을 통해, 삶과 사랑의 본능의 맹목성과 허구성과 허망성의 자각을 통해 우리는 삶의 본능, 사랑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삶을 살되 삶의 본능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 사랑을 하되 사랑의 욕구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랑이 가능해진다. 욕구에 매이지 않는 사랑, 집착을 벗어난 사랑, 반쪽되기와 하나되기가 하나의 운동임을 알고, 사랑의 고통과 사랑의 기쁨이 하나의 느낌이라는 것을 알아, 어느 하나를 취하지도 않고 어느 하나를 버리지도 않는 사랑, 시작의 순간 끝을 예감하기에 시작과 끝을 넘어선 사랑, 이런 사랑이 끝없는 신화적 사랑이 아니겠는가?

5. 하나됨의 왜곡

사랑이 지향하는 하나됨, 반쪽의 고통이 멎는 기쁨의 하나됨이란 고통에 대한 빚갚음으로써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공허한 근원회귀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삶의 본능과 사랑의 본능은 궁극적으로 죽음의 본능으로 회귀하고 만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한마디로 죽음의 본능이 전해주는 메시지, 즉 삶과 사랑의 공성, 그 가상성과 공허성, 그 열반원리를 자각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있어 죽음의 본능은 삶의 본능과 대립되는 삶을 부수고 부정하는 악마적 원리, 파괴본능이나 공격본능으로 작용하고 만다. 그 경우 우리는 어떻게든 죽음의 본능을 극복하고 그것을 삶의 본능에 유용하게 기여하도록 변형시켜야 할 과제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일체의 공성을 왜곡하여 가상에 종속하게 만든다. 가상이 회귀하는 공성을 변형시켜 오히려 가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고 말 때, 삶이 귀착하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죽음을 변형시켜 오히려 삶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 만들고 말 때, 공성을 자각한 자유로운 사랑은 공성을 망각한 부자유한 사랑으로 바뀌고 만다.

죽음의 본능을 변경시켜 삶의 본능에 유용하게 만든다는 것은 죽음의 본능을 좇는 우리의 하나됨의 욕구를 삶 속에서 실현시키고자 함을 의미한다. 죽음은 삶의 끝인데, 우리가 어떻게 삶 속에서 죽음을 경험할 수 있겠는가? 하나됨으로서의 사랑의 완성은 사랑의 끝인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되고자 하는 사랑의 열망 속에서 사랑의 끝을 경험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사랑하는 자가 추구하는 진정한 하나됨이란 단지 이상일 뿐이다. 이것을 망각하고 하나됨의 이상을 현실 속에서 구할 때, 그 하나됨의 느낌은 다른 반쪽을 배제한 자기도취적 느낌 또는 대상존재를 부정하는 속에서 자기동일성을 확보하려는 폭력일 수 있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의 왜곡이나 변질일 수 있다. 대상으로 향한 죽음의 본능, 대상의 존재를 부정함으써 그 만족에 이르는 죽음의 본능은 사랑이 지향하는 하나됨의 왜곡된 방식이다. 욕구된 대상을 먹어치우는 행위 역시 대상존재를 무화하여 자기 자신과의 영원한 동일성, 하나됨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타인을 공격하고 말살시키려는 행위 역시 타인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나의 하나됨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타인으로 인해 그어진 경계, 타인으로 인해 자극된 교란상태를 그 타인을 부정함으로써 지양하여서 평안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사랑에 있어서 상대에게 폭력을 자행하고 학대함으로써 만족을 얻는 새디즘은 사랑 안의 죽음의 본능, 또는 변형된 공격본능을 대변해주는 것이다. 반대로 상대로부터 죽도록 학대받음으로써 만족을 느끼는 매조키즘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속에서 타인의 하나만을 남김으로써 자신 안에서 간접적으로 하나됨의 느낌을 가지려는 것이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둘 중 하나를 파괴함으로써 하나됨을 회복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아무리 새디즘이라도 상대를 죽일 수는 없다. 타인을 완전히 지양할 수 없고 따라서 완전히 하나됨의 꿈을 이룰 수 없다. 대상으로 방향을 바꾼 죽음의 본능의 또 다른 방식은 상대의 인격을 부정하는 것이다. 상대와의 분리의 괴로움을 상대를 완전히 자신 아래 종속시킴으로써, 상대의 인격을 배제함으로써, 그 자신만이 하나됨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신체적 학대가 아닌 정신적 차원의 학대와 피학대로서 일종의 공격본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상대의 자립적 삶의 의미를 부정하려 한다거나, "나는 당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나 자신의 삶의 완전한 희생과 헌신을 바치려 한다거나 하는 것은 둘 다 반쪽을 소멸시킴으로써 하나됨을 이루려고 하는 기형적 사랑의 모습일 것이다.

공성을 망각한 또 다른 방식의 하나되기는 아예 본능의 반복강박의 힘에 자기 자신을 맡겨버리는 것이다. 긴장증대와 긴장해소라는 본능이 가지는 반복적 운동성에 자신을 맡기고 끊임없이 하나됨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끊임없는 사랑의 유희를 되풀이 함으로써 아편처럼 사랑에 빠져버리는 것, 사랑의 탐닉에 빠지는 것 역시 일종의 하나되기의 길일 것이다. 그러나 고통이 기쁨과 연결되어 있듯이 기쁨은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 무절제의 탐닉은 결국 무절제의 좌절과 병행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탐닉이란 사랑에 대한 주체적 결단이 아니라 본능 자체의 힘에 이끌리는 무기력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탐닉을 통한 하나됨이란 나와 당신의 하나됨이 아니라, 오히려 나도 없고 당신도 없는 하나됨, 오직 본능에의 좇음만이 있는 하나됨이며, 그런 만큼 본능과 욕구에 매인 부자유의 사랑일 뿐이다.

6. 신화적 사랑: 진정한 하나됨

야누스적 사랑이란 사랑이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의 양면을 지녔다는 것, 반쪽되기와 하나되기, 긴장증대와 긴장해소, 고통과 기쁨이라는 양면을 지녔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삶,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랑이 우리가 의미없다고 생각하는 죽음, 우리가 공허하다고 생각하는 죽음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과 마찬가지로 사랑 자체가 공허하다. 그것은 단지 삶이 언젠가 끝나기 때문에, 사랑이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스스로 삶 속에서 사랑 속에서 바로 그 끝을 지향하고, 그 끝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삶을 자유롭게 살 수 있고, 우리가 사랑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죽음, 그 공허성 때문이다. 우리는 반드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사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살지 않을 수도 있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는 아무런 강제도 필연성도 의무도 없도 따라서 아무런 목적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우리의 자유로운 작품이며,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부터 하나의 사랑의 신화, 신화적 사랑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사랑이라는 하나됨의 신화를 갖고 사는 것은 아마도 누구나 내심으로는 삶의 공허함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공허함을 아는 자는 그렇기에 그 공허함을 같이 아파할 자를 찾는다. 함께 신화적 사랑의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그런 동반자를 구하는 것이다.

신화적 사랑, 그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사랑이다. 그러기 위해 그 사랑의 끝, 하나됨의 완성은 곧 삶의 끝, 죽음과 일치하도록 짜여진다. 그 사랑은 언제나 그 완성이 반복되는 확인된 사랑이 아니고, 언제나 그 하나됨이 미래로 연기되는 기다림의 사랑이다. 자기소모적 사랑을 창조적 사랑으로 전환시키는 길은 하나됨의 이상을 삶의 경계 너머에, 죽음 안에 설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둘의 현실적 사랑을 신화적 사랑으로 바꾸는 것이다. 하나됨의 본능적 욕구를 멸하지도 억압하지도 않고 단지 연기시킴으로써, 반쪽됨의 고통을 기다림의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활동, 그러한 활동을 통해 탐닉적 사랑은 신화적 사랑으로 승화된다.

누군가는 그 신화적 사랑의 대상을 神으로 삼기도 하고, 하나의 이념으로 삼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종교와 문화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종교보다 문화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신격화되고 이념화되기 이전의 사랑, 구체적 인격과의 하나됨일 것이다. 하나됨의 완성을 삶의 완성 순간인 미래의 것으로 연기해 놓음으로써 삶의 전체 과정을 사랑의 완성과정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기다림의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 기다림이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공허한 빈자리를 언제나 당신을 위한 빈자리로 남겨 놓으면서 만족을 끝없이 연기시켜, 우리의 사랑이 다함이 없는 사랑, 끝이 없는 사랑이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이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하나됨의 열망을 간직할 수 있는 그런 사랑만이 아름다운 신화적 사랑이 아니겠는가? 하나됨의 완성이 곧 삶의 끝이 되어, 삶의 전체 과정이 곧 사랑의 완성과정이 되는 그런 사랑의 삶만이 아름다운 신화적 사랑이 아니겠는가?

신세대의 사랑의 문법*

임 규 정 (군산대)

1. 죽음, 철학의 저 영원한 문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반드시 한 번은 죽어야 한다. 그런데도 오직 인간만이 죽음을 문제삼는다. 왜냐하면 여타의 것들과는 달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죽음이 온통 삶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항상 죽음과 함께하고 있으며, 삶의 한 가운데 죽음이 들어앉아 있다. 오로지 인간만이 살면서 죽음을 의식한다. "도대체 죽음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인간은 죽음을 통해서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런 것들이 숨가쁘게 살아가는 인생들을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다. 그래서 인생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한 편의 길고 지루한 장례식이다.(La vie est une sorte de funérailles longues et ennyeuses.)

정신 없이 바쁜 삶을 살아가다가 불현듯 정신을 차릴 때, 그때 우리는 대부분 초상집에 와 정좌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초상집의 고스톱판에 앉아서야 우리는 비로소 인생을, 자신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생각한다. '이 다음은 누가 우리를 초대할까?.' 오늘 관 속에 누워 있는 사자(死者)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내면에 연기처럼 피어 오르는, 그러나 이제는 타성에 젖어서 화석처럼 거의 굳어진, 그러면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에 빠진 채, 상주가 권하는 한 잔 술에 취해서 기세좋게 "죽어도 고"를 소리 높이 외쳐대는 저 "선수들" 중에서 누군가가 반드시 언젠가는 그것도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나머지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해서 관 속에 누워 '영원히 광을 팔게 될 거라는' 절대진리를 우리는 다 알고 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진면목인 것이다.(C'est la vie!)

포이에르바하는 자신의 취임연설에서 "죽음과 불멸성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죽음의 문제, 혹은 죽음과 불멸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만일 철학이 죽음의 문제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철학은 그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무신론자이지만, 바로 이런 점을 고려하면 종교주의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그는 무신론적 종교주의자인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도 다른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미래(未來)이자 장래(將來)로서의 무(無): 삶 또는 현재 깊숙히 들어와 있는 죽음은 우리의 미래, 혹은 장래이다.(미래는 무엇이고 장래는 무엇일까?) 그런 점에서 미래는 현재와 병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죽음은 무(無), 즉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을 통해서 없어져 버린다고, 사라져 버린다고, 소멸된다고, 혹은 무화(無化)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는 무(無)이다. 결국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혹은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두려워하는 셈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유 없이, 공연히 그저 두려워한다는 것이요, 부연하자면 두려움은 있는데 그 대상이나 원인이나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이런 두려움을 혹자는 불안(不安)이라고 말한다. 정리하자면 불안의 원인은 죽음, 무(無),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불안한 것이다'.(우리는 여기에서 불안과 고독의 철학자 키에르케고어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누가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이해의 대상도 아니지만 말이다.

2. 불안한, 그래서 고독한 자아

무(無)로서의 자아: 데카르트는 자아존재의 증명을 시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구도 그런 바보 같은 짓을 설령 꿈에서라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데카르트를 위대한 철학자라고 말하지, 우리를 '똑똑하다고' 칭찬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이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따라서 나는 생각하는 존재인 정신이다. 그런데 정신으로서의 나는 존재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정신은 과연 무엇이냐를 생각할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 이 광대무변한 세계가 내 눈 앞에 찬란하게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정신으로서의 나의 존재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도 강력한 증거이다. 내가 없으면 세계도 없다.(이것은 얼빠진 소리가 아니다. 칸트도, 또 사르트르도 이 비슷한 소리를 해서 위대한 철학자의 반열에 오르지 않았던가?)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세계가 있다는 것, 그것처럼 정신으로서의 나의 존재를 강력하게 입증하는 것은 다시 없다. 그런데 이 생생한 세계에 의해서 그 존재가 확실하게 입증되는 나의 자아에 내 의식이 미칠 때, 그때 나는 마치 마법사의 주문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바보 같이' 자아존재를 증명하려고 애를 썼던 데카르트가 위대한 철학자인 것이다.

정신으로서의 나는 무엇일까? 정신은 간단히 말하자면 거울과 같은 것이다. 거울은 특정한 사물이면서도 그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우리가 거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거울에 비친 사물의 모습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정신도 세상의 모든 것을 비추인다. 혹은 정신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 안에 담을 수 있지만 그러나 자신을 담을 수는 없다. 그래서 정신은 무(無),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의 상태로 있다.(때때로 우리는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불가피하게 사용할 때가 있다. 물론 그래서는 안 되지만 말이다. '무의 상태로 있다'는 말도 역시 말도 안 되는 말이다. '있다'와 '무'는 모순개념이니 말이다. 무는 있을 수 없고, 또 있는 것은 무가 아니다. 여러분은 저 옛날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과, 그의 똘똘한 제자 제논의 재미있는, 그러나 심각한 역설을 떠올리기만 하면 쉽게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사정이 그러한데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저 여러분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만을 빌 뿐이다.)

혹은 다르게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들은 믿기를 자신이 육체와 정신의 종합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상식은 인간의 육체를 동물적 요소로, 그리고 인간의 정신을 신적(神的) 요소로 간주한다.(사람들의 상식 만큼 진실에 가까운 것도 없다. 물론 이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누구든지 자신을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광기의 철학자 니체마저도 인간을 신과 동물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존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동물적 요소인 육체는 유한한 것, 신적 요소인 정신은 무한한 것이다. 그런데 무한하다는 것은 곧 무한한 자유,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것들이 바로 우리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다. 무한한 자유나 무한한 가능성은 곧 현실적인 무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지금 무엇인가 특정한 것으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무한하게 자유롭지도 않을 것이요, 무한하게 가능한 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무로서 현존한다. 즉 나는 무이다.(여러분이 살면서 허무를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때 여러분은 바로 이런 깨달음에 직면한 것이다. 일상어로는 '나는 무이다'가 아니라 '나는 허무하다'이다. 이는 사실 같은 말이다. 또는 '나는 허전하다'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절대적 고독을 느끼게 된다. 아니, 나는 절대적으로 고독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내가 바라보고, 느끼고, 의식하는 것들은 모두 유형의 것들, 특정의 모습과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들인데 반해서(여기에는 他人들도 예외가 아니다) 오직 나만이 무의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와 타자(他者) 사이에는 절대적 차이가 존재한다. 나는 무, (사람들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들은 有, 유형의 것들, 또는 물질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이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시라. 우리는 과연 인간의 육체 이외의 것들을 보거나 듣거나 만지거나 느끼거나 한 적이 있을까?) 고독이란 무엇인가? 나 혼자라는 뜻이다. 나와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오로지 나 혼자만이 유별나게, 기이하게 존재한다는(즉, 무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존재의 부재로서의 절대적인 고독을 느낀다. 그래서 불안과 고독은 늘 함께 오는 것이다.

고독, 바로 이것이 우리의 병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고독으로부터 줄곧 헛되이 도망질쳐 왔다. 마치 혹성탈출이라는 영화의 저 끔찍한 마지막 장면처럼 말이다. 여기 잠깐 멈추어서 우리 인간들이 고독으로부터 얼마나 필사적으로, 그러나 헛되이 뒷걸음질쳐 왔는지를 살펴 보자.

고독과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 버린 현대인의 슬픈 이야기 셋

첫째 이야기: upi 통신에 따르면, 1976년 미국의 어느 도시에서 열 여섯 살 된 여자아이가 마약에 의한 환각상태에 빠져서 팔과 손을 난자한 다음 성당 계단으로 뛰어들어 가서 자신의 목을 면도칼로 찔렀다. 그러자 순식간에 우르르 몰려든 300 여명의 군중들은 고함을 지르면서 마치 응원이라도 하는 듯이 "잘한다! 잘한다!" 하고 소리 높여 악을 썼다. 경찰은 군중의 응원이 "구역질나는 것"이었다고 증언했다..."그들은 '끝내 버려!', '그래, 바로 그거야!'라고 소리쳤다." 이윽고 그녀가 출혈과다로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자 군중들은 환호성을 울렸다.

이반의 이야기-1: 아이를 품에 안은 한 젊은 여인이 터키 침략군에게 둘러싸여 있다. 여흥거리를 찾던 군인들은 아이를 여인에게서 빼앗아 품에 안은 채 얼르기 시작한다. 마침내 아이는 방긋방긋 웃는다. 그 순간 군인 한 명이 아이의 얼굴에 권총을 겨눈다. 아이는 티없이 맑은 얼굴에 하나 가득 웃음을 띠고서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 권총을 붙잡는다. 그러자 군인은 방아쇠를 당기고 살과 뼈와 피가 사방에 튀기면서 아이의 얼굴은 박살이 난다.(어때? 환상적이지?...만일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인간은 자신의 형상과 모습을 본따서 악마를 창조해 냈을 거야.)

이반의 이야기-2: 다섯 살 된 여자 아이가 있었다.(장소는 아마 시베리아였을 것이다.) 그녀의 부모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그들은 아이를 얼음이 꽁꽁 언 야외변소에 가두었다.(물론 아이가 뭔가 잘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이는 밤이 되어서도 용서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용서를 빌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더우기 옷에 오줌을 싸서 옷이 꽁꽁 언 데다가 매우 더러웠기 때문에) 그들은 아이의 얼굴에 오물을 묻히고 아이의 입에 똥을 처넣었다. 어머니, 아이의 어머니가 말이다. 그녀는 불쌍한 아이가 구슬프게 울부짖으면서 마침내 숨을 거두는 가운데 불빛이 따뜻한 방안에서 천사 같이 평화롭게 잠이 들었다.(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는 저 가여운 어린 아이가 춥고 캄캄한 밤에 고사리 같은 작고 연약한 주먹으로 고통으로 헐떡거리는 자신의 심장을 두드리면서 죽어가야 하는 이유, 슬피 울면서 그 누구도 원망할 줄 모르는 채 그저 저 자비로운, '사랑으로 가득찬 하나님'에게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빌어야 하는 이유를 그대는 알겠는가?)

3. 성과 사랑의 관계, 혹은 잘못된 사랑에 관하여

다시 포이에르바하에게로 돌아가 보자. 그는 철학의 중심에 놓여 있는 죽음과 불멸의 문제를 남녀간의 사랑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와 너의 변증법, 남녀의 변증법만이 진실한 변증법"이라는 것이다. 그는 남녀의 관계 혹은 이성적 사랑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요컨대 철학의 근본문제는 죽음인 바, 죽음은 오직 남녀의 사랑에 의해서만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은 궁극적으로 삶 자체의 사랑이며, 사랑하는 가운데 우리의 육체와 영혼의 온 존재는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 논의를 쉽게 하기 위해서 데카르트, 포이에르바하, 키에르케고어, 그리고 사르트르를 종합해 보자.

⸁ 나는 정신이다.(데카르트) ⸂ 정신인 나는 무의 상태로 존재한다.(사르트르) ⸃ 정신인 내가 자신을 의식하는 순간, 나는 불안에 빠지며 동시에 고독을 느낀다.(키에르케고어) ⸄ 나는 죽음의 미래로서의 무와 불안으로서의 무가 불러 일으키는 고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사랑을 갈구한다.(키에르케고어, 사르트르, 포이에르바하) ⸅ 사랑만이 유일한 탈출구이다. ⸆ 이것이 철학이 다루어야 할 문제이다.

고독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이 곧 우리 인생의 최대의 목표이다. 포이에르바하는 그것이 사랑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곧 철학이 도달한 결론이기도 하다. 인류의 역사를 보라. 슬픈 운명을 걸머진 우리의 선배들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사랑에 매달려 왔는가를.(편의상 여기에서 사랑을 성적 사랑, 혹은 에로스에 국한하기로 한다. 사랑을 에로스, 필로스, 아가페 등으로 구별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사실 에로스, 필로스, 아가페는 사랑의 세 가지 성질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마치 플라톤의 인간론이 셋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랑과 성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혹은 사랑이 성을 포함하는 관계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는 사랑은 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사랑에 반드시 성이 현존하는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랑은 성에서 시작하지만 '제대로 길을 간다면' 성을 떠나게 된다.(한 쌍의 원앙처럼 금슬이 좋은 곱게 늙은 두 노부부를 상상해 보라.) 그런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성을 고집하면 파국적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이것이 논자의 오늘의 결론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은 사랑을 촉발하는 계기 이상의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 성에 그 이상의 의미가 부여되면 성은 실족하게 되어 절망에 빠지게 된다.

먼저 성을 살펴 보자. 여기에서는 사르트르의 이론이 도움이 될 것이다. 사르트르는 성이 성욕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성욕에는 두 종류가 있다. 성적 욕망을 명제로 정식화하면 "나는 너를 성적으로 원한다"가 될 것이다. 그것은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 나는 너를 통해서 성적 만족을 얻고 싶다.

⸂ 나는 내가 너에게 품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성적 욕망을 너도 나에게 품고 있기를 원한다.

여러분의 성적 욕망의 대부분은 아마도 첫 번째일 것이다.(잠시 여러분들도 눈을 감고 과거, 혹은 현재의 여러분의 성욕이 다음 두 가지 중 어느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것을 나는 동물적, 혹은 보편적 성욕이라고 부르겠다. 왜냐하면 동물들이 느끼는 성욕이 대부분 첫 번째이기 때문이다.(대부분 그렇다는 말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현대의 행동주의 심리학이 입증하고 있는 사실이다. 예컨대 비비원숭이의 경우는 성적 관계를 가지되 사정은 하지 않을 때가 있는데, 동물심리학자들은 그것이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성'이라고 말한다.) 이 욕망은 오로지 욕망의 충족만을 갈구한다. 가장 단적인 예는 여러분의 자위행위가 될 것이다. 자위행위는 말 그대로 동물적 행위여서, 본래적 의미에서의 인간적 관계가 결여되어 있거니와(자위행위를 둘이 하는 경우는 좀처럼 상상하기 어렵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또 그럴 여지도 전혀 없다.(그런데 동물의 세계에서 자위행위를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아닐까?...자위행위를 통해서 인간은 '동물의 바다'로, 혹은 그 아래로 하강하는 것은 아닐까?) 어쨌건, 이 경우에는 성적 욕망을 품고 있는 주체에게 타자는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된다. 동시에 자신도 동물적 쾌락의 주체로만 떠오르게 된다. 따라서 이중의 성적 소외가 발생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은 동물과는 다른데(혹은 다르다고 생각되는데) 반해서 동일한 성적 욕망에 몰두한 결과 이중의 성적 소외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욕망의 대상은 2인칭이(너, 그대) 아니고 3인칭(그, 그녀) 내지 비인칭(그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이러한 욕망에서 비롯된 일련의 행위가 마무리된 다음에는 어김 없이 쓰디쓴 허탈감이 엄습하는 한 이유이다.(이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으리라 믿는다. 여러분의 생생한 경험이 증명할 테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일단 이러한 욕망에 탐닉하게 되면 끝없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잠시 뒤에 다시 언급이 있을 것이다.

한 편 두 번째 성적 욕망은 욕망의 충족을 갈구하는 게 아니라 욕망 그 자체를 원한다. 다시 말해서 성적 욕망의 주체는 타자의 성적 욕망을 원한다는 말이다. 이 경우에는 타자는 욕망의 대상이자 주체로 떠오르게 된다. 나는 이것을 성애라고 부른다. 이때 욕망의 주체인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욕망의 충족 내지 나의 쾌락이 아니라 너의 욕망,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를 향한 너의 욕망이다. 이것은 사실 인간학적 성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물론 동물의 영역에서 이와 유사한 현상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원숭이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성'이 바로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인간학적 성욕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이러한 성욕이 현실화될 때 거기에 비로소 인간적 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머물러 있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언제까지 욕망의 상태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또 설령 그런 일이 가능하더라도 욕망이 욕망을 부르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일단 성에 몰입하게 되면 욕망의 바다에서 끝없는 갈증을 느끼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애를 써도 어느새 욕망은 쾌락을 향해서 번개 같이 달려가 버린다. 그래서 첫 번째 욕망과 두 번째 욕망 사이에 변증법적인 전선(戰線)이 형성되고 팽팽한 긴장관계가 유지된다. 그래서 '만나 보면 시들하고 헤어지면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윽고 인간학적 욕망은 동물적 욕망에 자리를 내어주게 되고, 그럼으로써 더욱더 동물적 욕망에 몰입하는 악순환이 빚어진다. 그래서 끝내는 고독도, 불안도 더욱 깊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끝없이 동물적 욕망에 탐닉하는 시대가 바로 현대이다. 그렇지 않아도 불신이 만연된 현대는 더할 나위 없이 절망적이고, 음울하고 고독한 시대이다.(물론 우리의 시대가 그렇게 된 데에는 또 다른 몇 가지 원인이 있다. 그것은 첫째, 상호 개별적 친분 관계의 공동체에서 상호 익명적인 대중 사회로의 변화에 대한 충분한 감정적 대처 자세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 둘째, 계몽과 현대적 보도 기술의 결과로 문화적 전통과 권위에 대해 이전보다 더욱 비판적인 입장을 취함으로 인해서 전반적인 불안정과 세대 갈등의 첨예화가 초래되었다는 것, 셋째, 과거에는 불안과 불신이 낯선 사회 구성원들과의 관계에서만 나타난 반면에 현대에는 상회익명적 사회의 형성과 함께 이웃에 대한 불신이 형성되었다는 것 등이다. 다람쥐 등의 실험 결과 특정한 인구 밀도를 초과하면 동물들은 서로 심하게 신경을 건드려서 호르몬의 변화를 일으키며 심지어 그 때문에 죽기까지 한다.)

사랑을 성으로 오해한 탓에 빚어진 아주 웃기는, 그러나 매우 슬픈 이야기 셋

첫째 이야기: 지난 한 주 동안 언론에 보도되었던 가장 충격적인 연재기사는 '여고생 윤락행위의 만연'에 관한 것이었다. 이 기사가 나간 뒤 문의전화가 빗발쳤다는데 그게 대부분 "시골에서는 여고생을 고용하지 않고서는 단란주점 영업을 할 수 없는데 이런 기사를 쓰면 어떡하느냐?"라는 업소측의 격렬한 항의성 전화였다는 것이다.(여고생이 없으면 장사가 안 되는 현실, 그리고 이러한 항의를 신문사에 대놓고 할 수 있는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통계에 의하면 어떤 여학교는 전체 학생의 20%가 단란주점에 '아르바이트'를 나간다고 한다.)

또 하나: 지난 5월 31일 음란문서제조죄 등이 적용되어 징역 10월의 실형이 선고된 작가 장정일의 문제의 작품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중년의 사내와 여고생의 희한한 관계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돈 쥬앙의 비극 이야기: 미국의 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 대통령이 어느 주지사의 농장을 방문했는데, 닭장을 살펴 보던 영부인이 농부에게 "수탉은 하루에 몇번이나 암탉과 관계를 하는지" 물었다. 농부는 "10번 이상"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부인은 그 말을 대통령에게도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대통령은 농부에게 "언제나 같은 암탉하고만 관계하느냐고" 물었다. 농부는 "아니요. 항상 파트너가 바뀝니다."라고 대답했다.(이런 효과는 동물에서도 나타난다. 숫양을 한 마리의 암양과 같이 있게 하면 처음 한 시간에 7번의 관계를 갖지만, 한 번 숫양이 관계를 가진 뒤 새 암양을 넣어 주면 30분에 11번의 관계를 갖는다고 한다. 동아일보 5월 31일자) 그렇기 때문에 저 유명한 돈 쥬앙은 어떤 여자에게도 애정을 품지 않으며 오직 아름다움에만 전념했던 것이다. 그는 사랑을 추구한 게 아니라 영원히 재발되는 만족시킬 수 없는 욕망에 허우적거렸으며, 영원이 아니라 찰나를, 불변보다 끝없는 변화를 선택했다. "만일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면, 나는 여자를 정복하기 위해서 그곳으로 갈 것이다." 그는 승리보다는 싸움 그 자체를 즐겼다. 그래서 표적이 항복하면 흥미가 떨어져 걷어차 버린다. 1003명이라는 그의 연승기록 뒤에는 일종의 절대성에 대한 추구가 숨어 있다. 그의 영혼은 감각의 쾌락 속에서 헛되이 무한을 추구한 굶주린 쾌락주의자의 저주받은 영혼 바로 그것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억제할 수 없는 욕망에 괴로워하면서도 사랑을 할 수 없었던 비극적 인물이었다.(혹자는 여기에서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을 떠올려도 될 것이다.)

4.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굳이 쿨리지 효과를 거론하지 않아도 현대가 얼마나 극단적으로 자극을 추구하는 시대인지는 잘 알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현대를 야수의 시대라고 부른다. 현대인들이 이처럼 끝없이 순간적인 관능만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진정한 사랑, 진정한 에로스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로스는 무엇일까? 긴장과 놀람, 동요의 순간들의 연속인 사랑은 성적 아름다움에 대한 공감이다. 성적 아름다움은 영원성에 대한 순간적인 계시이며, 동시에 시간성(유한성)에 대한 비극적인 암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개가 끼고 이슬이 내린 아침과 같은 사랑을 통해서 삶을 확인한다. 사랑은 우리 자신의 가장 고고한 증인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사랑의 준비과정에 불과하다.(릴케) 연인은 정열 위에 난파하여 고통과 격동과 혼란과 부딪히고, 황홀경과 조우하며, 환희와 죄와 흥분, 그리고 신과의 신비한 합일, 기절할 것 같은 무아지경의 상태를 발견한다.

그러나 사랑은 패배가 예정된 싸움이며, 덫과 같은 것이다. 결국 사랑하는 자는 슬픈 음성으로 이렇게 노래하고야 만다. "내 연인은 머나먼 곳을 향해 떠나갔다. 그러니 나를 죽게 해다오. 나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으니."(아폴리네르의 [로렐라이]) 세상에 행복한 사랑이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영원의 가식을 집어 던진 채 자신의 덧없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고독은 제거될 수도, 또 경감될 수도 없는 것, 로미오와 줄리엣은 마침내 죽음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상처입은 한 마리 새처럼 사랑하는 자를 가슴에 품고서 다시금 타나토스의 위협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가망이 없는 것인가? 어디에서 잘못된 것인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포이에르바하는 사랑을 통해서 죽음을, 고독을, 불안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그는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곧 불멸에 대한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자들의 유일한 소망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영원하고도 완전하게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죽음이 삶의 궁극적인 끝이라면 그것은 불가능해지고 삶은 일시에 암흑 속에 빠지게 된다. 여기에 포이에르바하의 비밀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비밀도 또한 있다. 포이에르바하가 종교주의자였던 것처럼 우리도 종교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불멸에 대한 어떤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이라도 좋고, 절대자라도 좋다. 문제는 불멸에 대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원이 사랑을 영원한 것으로 만듦으로서 사랑을 구제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을 통해서 죽음도, 불안도, 그리고 고독도 마침내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영원 안에서 말이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겠다고 노래하고(윤동주, [서시]) 또 어떤 시인은 "사랑하다가 죽어버리"라고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사랑하다가 죽어 버릴 때, 혹은 죽도록 사랑할 때, 그때 우리는 죽음을 뚫고서 지상에서 영원으로 비상할 것이다. 그럴 때 사랑은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맺어 준다.

영혼을 돌보는 일로서의 교육과 사랑의 의미*

박 철 홍 (영남대)

1. 에로스의 의미 : 영혼의 부족을 채우는 일

사랑을 주제로 한 오늘의 모임은 그 주제나 진행방법에 있어서 플라톤의 『향연』을 생각나게 합니다. 아가톤이 시(詩) 경연대회에서 우승하자 그의 우승을 축하하기 위하여 아가톤의 집에서 향연을 베풀게 됩니다. 여기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아마 음식을 어느 정도 먹고 술이 한 순배 쯤 돌고나서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할 때 쯤에 그저 먹고 마시는 일로만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유익한 이야기를 하자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이 때 제안된 주제가 에로스(eros)이며 앉아 있는 순서대로 에로스를 찬양하는 간단한 연설을 하고 서로 질문을 주고받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하여 『향연』에서 논의하고 있는 단어는 에로스이며 이 단어는 우리말로 보통 사랑이라고 번역됩니다. 일차적으로 에로스는 '부족한 것'을 채우거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열망'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에로스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지고 싶어 하는 것, 또는 그것을 가지는 것이 나에게 매우 중요하거나 이익이 된다고 생각되는 것을 얻는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이스 어원에 충실할 때에 에로스는 우리나라의 사랑이라는 말에 담겨있는 헌신적인 마음이나 지극히 자애로운 마음과 같은 뜻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그리이스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가 그 헌신적인 정도, 이타적인 정도에 따라 아가페, 에로스, 필레오로 구분하여 사용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향연』이 가장 오래된 사랑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에서 유추해 본다면 아가페나 필레오도 결국 에로스라는 단어의 의미에 비추어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에로스로서의 사랑을 충족시킬 때에 정신적인 것이나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할 때에 사랑은 아가페가 되며, 물질적인 것과 자기 이익을 우선시할 때에 사랑은 필레오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에로스로서의 사랑이 부족한 것을 채우고 욕망을 충족시키는 열망을 의미한다면 결국 사랑은 그 부족한 것 또는 열렬히 갖고 싶은 것을 추구하는 일이며 동시에 이 부족한 것을 채운다는 것은 인간에게 중요한 의미를 띨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로스로서의 사랑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이 때에 '부족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점을 명료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핍되어 있는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결핍을 느끼는 주체는 인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결핍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 따라서 인간이 충족시켜야 할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하여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생각은 인간은 그의 짝(배우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결혼식장에서 주례를 서시는 분들이 주례사에서 흔히 말씀하시는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남자(凸)는 여자(凹)를, 여자는 남자를 만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녀 사이의 연애는 출생시에 결여되어 있던 반쪽을 열렬히 찾아 헤매는 것이며, 결혼은 그 사랑을 찾는 노력이 결실을 맺는 것이며, 그 후의 삶 속에서 자녀를 낳고 함께 사는 것은 사랑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설명은 결핍을 채우는 것으로서의 사랑을 뜻하는 에로스의 의미를 잘 보여 주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 설명은 다소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그리하였겠지만 에로스의 의미를 지나치게 육체적인 생김새에만 치중한 설명이라는 감을 지울 수 없습니다.

관점을 달리하여 생각해 보면 결핍의 문제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를 타고 태어납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인간의 육체는 출생시에 이미 완성된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갓 태어난 태아의 몸과 성숙한 어른의 몸 사이에 기능상의 성숙 정도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갓 태어난 아이의 몸 속에는 어른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의 몸에도 어른과 조금도 차이가 없이 눈, 코, 입, 귀가 있으며 오장육부의 모든 기관이 있으며, 뇌세포의 숫자도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른과 아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체적인 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영혼)적인 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인간은 태어난 상태에서 완전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육체를 가졌다고 해서 그 인간은 완전한 의미의 인간이 되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아이는 자라면서 정신과 영혼을 실찌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결핍을 충족시키는 것으로서의 사랑은 자신의 정신과 영혼이 텅빈 상태에 있는 인간이 정신과 영혼을 살찌움으로써 완전한 인간으로 나아가려는 열망과 이 열망을 실천에 옮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2. 교육적 사랑의 구조

정신과 영혼의 부족을 채우는 것으로서의 에로스는 바로 에로스라는 말과 교육이라는 말이 동의어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는 에로스의 개념은 우리말의 사랑이라는 단어의 어원적 의미를 탐구할 때에 더욱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이란 말의 어원적 의미에 대한 탐구는 역사적으로 사랑이라는 말의 어원의 발달과정을 그대로 적어 놓는 것이 아니라 ''이라는 단어의 역사적인 발전과정을 고려하면서 저 나름대로의 상상에 의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무엇 보다도 사람이 사람들 사이에 행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사람이라는 단어를 제외하고서는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말과 관련을 맺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말은 원래 에서 나온 것입니다. 은_. 'ㅿ'이 변천함에 따라 꿋(삶)과 럋(앎)으로 변하게 된다. 꿋은 꿁鿑이 되었습니다. 이 꿁鿑들 사이에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행위를 꿁鿗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꿁鿗이 바로 사랑입니다. 즉 사람은 사랑을 주고 받을 때에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되며, 사람은 사랑을 주고 받을 때에 비로소 완전한 의미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무엇인가 부족하고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채워지고 충족되어야 할 무엇입니다. 사랑은 인간과 인간의 삶을 완성시켜주는 요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사랑의 의미를 보다 명료화하기 위해서 삶과 앎과 사랑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은 꿋과 럋으로 변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총체로서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질 飁에 의 하위 개념으로 구분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삶은 의 하위개념이 아니라 동의어입니다. 삶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총체적인 단어입니다. 삶은 여러 가지 행위와 양상들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의 가장 의미있는 그리고 핵심적인 하위영역은 꿋(꿁鿑→꿁鿗→사랑)과 럋(앎)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이 분석이 지나치게 억지라고 생각될 경우에는 앞 문단에서 꿁鿗은 인간관계의 핵심이라는 점과 에서 앎이 나오는 것을 종합적으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즉 의미있는 (삶)은 사랑과 앎의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석의 순서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원래 의미있는 은 사랑과 앎이 구분되지 않은 채로 통합되어 있는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이 통합된 상태는 (앎×사랑)으로 표현할 수 있을 듯합니다. (앎×사랑)은 앎이 사랑이며 사랑은 곧 앎을 의미한다는 것이며 또한 앎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요약하면 의미있는 은 앎을 사랑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육은 바로 이 앎을 사랑하는 일을 뜻하며 모든 공적 사적인 교육활동들은 앎을 사랑하는 일과 앎의 결과를 자자손손 물려주기 위하여 체계화되고 제도화된 것입니다.

이러한 에로스로서의 교육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교육에서의 '사랑'은 어떤 성격을 띠고 있으며 교육에서의 사랑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교육에서 사랑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기 전에 먼저 교육적 사랑의 기본 구조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교육에서의 사랑의 문제를 언급할 때에 보통 교사의 학생에 대한 사랑을 문제삼게 됩니다. 교사의 중요한 자질 중의 하나는 학생을 사랑으로 대할 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교사는 학생들이 잘못한 점이 있을 때에 적절히 감싸줄 수 있고, 어려운 점이 있으면 도와주고, 마음이 기쁠 때에 같이 기뻐하고, 슬플 때에 같이 슬퍼하며, 외로울 때에 위로해주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할 때에 교육에서의 교사의 역할은 부모의 역할로 잘 묘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 나와 있었던 간결한 글귀에 나타나 있는 이상적인 교사상-- "어머니 같은 선생님, 우리 선생님; 아버지 같은 선생님, 우리 선생님"--은 그야말로 훌륭한 선생님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심지어 교사로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식을 가르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행하는 데에 있다는 식으로 이어집니다.(그리고 이런 생각은 지식교육에 반대하며 인간교육을 무조건적으로 찬양하는 데에로 연결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가장 훌륭한 교사인가? 어머니가 가장 훌륭한 교사인가?) 어쨌든 교사의 역할을 이와 같이 파악하는 입장은 교육에 대한 한 가지 관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육은 일차적으로 교사와 학생 사이의 인간관계이며, 이 인간관계를 제대로 이어주는 사랑이 교육의 핵심적인 과제라는 생각입니다.

문제는 과연 이러한 생각이 실제 교육적 사태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교육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하여 교육의 원초적인 힘을 잘 보여주는 '어린 시절 노는 과정을 통한 교육'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어린 시절 노는 과정을 통한 교육은 서양에서 교육의 전형으로 제시하는 '파이데라스테이아'와 아주 유사합니다.) 이 예는 교육의 핵심은 교사와 학생 사이의 인간관계라기 보다는 학생과 교육내용 사이의 관계이며 교사는 이 둘을 연결시켜주는 매체라는 생각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지금 어른이 되신 분들은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 있는 또래친구와 형들과 함께 어울려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 어떤 형을 지극히 좋아했던 경험이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연예인이나 뛰어난 운동선수를 좋아하는 것은 이와 유사한 현상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형이나 어른 또는 연예인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만 어느 경우든지 간에 중요한 이유는 그 형이나 어른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동네 형의 야구솜씨면 야구솜씨, 어떤 물건을 만드는 재능이면 재능, 공중제비를 넘는 재주면 재주, 고무총으로 새를 잡는 솜씨면 솜씨 등을 표현이 얼설프기는 하지만 "우리 형 솜씨가 왔다야!" 하고 열렬히 찬양하는 아이들을 보게 됩니다. 그 아이들은 바로 그 형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한 아이가 자기 보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사람에 대한 존경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아이로 하여금 그 형과 친하게 되기 위한 온갖 전술을 생각하게 하고 실행에 옮기게 합니다. 그러한 전술에는 그 형이 하는 몸짓이나 언동을 모방하는 것에서부터 삶은 옥수수, 구운 고구마, 껌과 같은 여러 가지 선물공세를 하거나, 나아가 어린 아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뇌물로 상납하는 일까지 하게 됩니다. 아이는 그 형이 시키는 잔심부름을 하는 것을, 심지어 그 형이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켜주는 것 자체를 '영광'로 생각하게 되기까지 합니다. 어쨌든 아이는 그 형을 따라다니면서 그 형에게 그 재주나 솜씨를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 여쭈어 보고 그리고 그것을 가르쳐줄 것을 간청하게 되며, 그 관계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경우 아이는 그 형의 재능을 전수받게 됩니다. 동시에 그 형이 베풀어 주는 여러 가지 혜택, 예를 들어 다른 아이들로부터 시달림을 받는 일이 없도록 보호받거나 최고 참모와 같은 특별대우가 뒤따라오게 됩니다.(이것은 그리이스시대의 '파이데라스테이아'와 그 형식에 있어서 완전히 일치합니다.) 아이가 형을 좋아하게 되고 애정을 갖게 되는 일차적인 조건은 외모도 아니요 형이 자신에게 표현하는 애정도 아닙니다. 아이의 입장에서 볼 때 그 관계를 맺게 하는 일차적인 원동력은 형이 가지고 있는 재능 때문입니다.

위의 예에서 '아이가 누군가를 흠모하는 것'(파이데라스테이아)이 교육의 원초적인 힘이라고 하면 교육적 관계를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얼핏 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가 누군가를 흠모하는 일의 핵심에는 교육내용이 있으며 아이가 교육내용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아이와 교육내용이 이 교육적 관계의 일차적인 문제이며 핵심적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좀더 강조해서 말하면 교사는 아이와 교육내용을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자연적인 삶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원초적인 힘에 대한 설명의 요점은 교육은 교육내용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며, 아이의 교육내용에 대한 에로스가 그 중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3. 교육적 사랑의 성격

오늘날 공교육은 이 '아이가 누군가를 흠모하는 일'로서의 교육이 가지고 있던 원초적인 교육적 힘을 상실한 것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습니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기 전에 교육내용에 대한 유혹을 느낄 기회가 없으며 교사 자신에 대해서도 아무런 매력을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교육내용은 이제 복잡해졌고 추상화되어서 차가운 문자로 각질화된 채 책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 교육내용을 삶에서 보여주는 사람을 일반 삶의 사태에 만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아이는 교육내용과 교사에 대한 아무런 사랑이 없는 채 학교에 오게 됩니다. 아이들은 교육내용과 교사에 대한 아무런 유혹도 느끼지 못한 채 학교에 오기 때문에 오늘날 교육은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며, 교사는 새로운 의무를 떠안게 되었습니다. 이 의무를 이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교육에서의 사랑을 살펴 본다면 교육에서의 사랑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첫째 교육에서의 사랑은 다른 인간 관계에서의 사랑의 의미와는 다소간 다른 방식으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아이가 누군가를 흠모하는 일'에서 교육내용에 해당하는 것이 빠지고 나면 형과 아이 사이의 육체적 물질적 사랑의 관계만이 남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양자 사이의 육체적 사랑으로 치닫게 되면 그 관계는 그야말로 우리가 도덕적으로 나쁜 뜻으로 사용하는 '동성애'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동성애서 알 수 있듯이 육체적 물질적인 것을 돌보는 일로서의 사랑은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사랑은 그 관계에 적합한 방식으로 올바로 표현될 때에 비로소 의미있는 사랑이 됩니다. 가족간에 情을 나누는 방식은 친구들과 情을 나누는 방식과는 다릅니다. 이성의 친구와 사랑을 나누는 방식은 동성의 친구와 사랑을 나누는 방식과는 또한 다릅니다. 만일 이성의 친구와 사랑을 나누는 똑같은 방식으로 동성의 친구와 사랑을 나누려 한다면 동성의 친구 사이의 관계는 타락하고 말 것이며, 동성의 친구와 사랑을 나누는 방식으로만 이성의 친구와 사랑을 나누려고 한다면 그 관계는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성의 친구나 동성의 친구와 정을 나누는 방식을 가정에 그대로 도입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패륜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사와 학생 사이에 情을 나누는 올바른 방법은 무엇입니까? 학교에서 심지어 대학에서도 교사와 학생(또는 같은 과 친구나 대학에서의 친구) 사이의 사랑의 문제를 일반적인 삶의 사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의 문제에 근거를 두고 설명하려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부에 열중하는 것은 비인간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사는 학생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맺고, 사랑과 정을 주고받기 위해서는 학생의 요구와 필요를 돌보아주고 같이 놀이에 참여하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하는 것이, 교육적 사태에서 특히 대학에서, 정을 나누고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사랑의 범주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가 지금까지 말한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교육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교육에 있어서 사랑의 왜곡된 형태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진정한 의미에서 교사의 사랑은 학생들에게 교육내용의 의미와 가치를 올바로 가르치기 위하여 전심전력 공부하고 성심성의껏 가르치는 데에 바쳐진 헌신과 노력에 비추어서 판단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교육내용에 대한 관심은 교육내용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라기 보다는 교육내용과는 무관한 외적 보상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교육내용에 대한 이끌림을 받고 있고 교육내용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은 학생이 아니라 교사입니다. 이제 교육의 임무는 교육내용에 대한 교사의 사랑을 학생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교육에서 교사의 학생에 대한 사랑이 발휘되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흠모하는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자신을 위해주는 것이며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결국 교사가 학생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느냐 하는 척도는 교사가 학생들을 교육내용에로 유혹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의해 결정됩니다. 만에 하나 교사가 이 일을 소홀히 하면서 또는 소홀히 하면서까지 학생들과 함께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애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릇된 것이 될 것입니다. 더욱이 교육내용을 제대로 전수해주지 못하는 것을 보상한다는 의미에서 정의적인 사랑을 강조한다면 적어도 그것은 교육에 있어서 왜곡된 사랑이 될 것입니다.

셋째 교육은 학생들에 대한 교사의 짝사랑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짝사랑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학생이 교사를 좋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육내용을 흠모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어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사랑은 교육내용에 대한 아무런 감각도 없는 따라서 교육내용에도 교사에게도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학생들을 교사가 학생들을 짝사랑하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이 짝사랑의 완성은 일반적인 의미의 짝사랑에 비추어 보면 학생은 교사를 사랑하는 데에서 끝나야 됩니다. 교육에 있어서 학생이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은 교사가 아니라 교육내용입니다. 그런데 실제 교육 사태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학생들의 사랑은 교육내용보다는 교사 자신에 대한 애정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경우 그 교사가 가르치는 과목을 좋아하는 것도 그 교사의 사랑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동원됩니다. 사실 '아이가 누군가를 흠모하는 일'에서도 아이의 관점에서 보면 교사를 좋아하는 것과 교육내용을 좋아하는 것은 엄밀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교사의 임무는 아이를 자신이 아닌 교육내용에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교사는 교육내용의 구현체이기 때문에 그리고 학생은 교사가 구현하고 있는 교육내용을 공유할 동료이기 때문에 교사와 학생 사이에는 거의 맹목적이라고 보아도 좋을 정서적 유대와 사랑 관계가 성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교사는 학생들의 이 애정이 교사 자신에게로가 아니라 교육내용에로 향한 것이 되도록 하는, 인간적으로는 분명히 슬프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몸짓을 해야 하며 심지어는 그런 사랑과 애정을 거부하기까지 해야 합니다.

넷째 학생의 입장에서 교육내용을 제대로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연인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를 흠모하는 아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떤 체계적인 이론이나 사상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이론이나 사상을 암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론이나 사상을 공부하고 안다는 것은 그 이론이나 사상이 나의 삶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나와 함께 삶을 같이 한다는 것을 뜻하며, 그 이론이나 사상체계를 형성한 사상가를 만나며 그와 함께 삶을 살아 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플라톤의 교육사상, 듀이의 교육사상, 퇴계의 교육사상을 공부한다는 것은 교육내용의 구현체로서 플라톤, 듀이, 퇴계를 나의 인생의 안내자요 동반자로 되살려 내는 것이며, 나의 삶의 모든 순간을 그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공부한다는 것은 이론가나 사상가와 뜨거운 연애를 하는 것이며 은밀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결론

저는 지금까지 영혼의 결핍을 충족시키는 일로서의 에로스의 의미에 비추어 교육에서의 사랑이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말한 것 이외에 교육에서의 사랑에 대해 더 말씀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오늘 발표하시는 다른 선생님들의 견해와 함께 생각할 기회를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교육에서의 사랑의 문제가 다른 영역에서의 사랑의 문제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는 문제를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교육에서의 사랑의 문제는 다른 영역에서의 사랑의 문제와는 다르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그런 관점에서 교육에서의 사랑의 의미를 언급해 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영역에서의 사랑은 인간관계의 문제이며 정의적 측면이나 실제적인 요구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과 일차적인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과연 타당한 설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각각의 인간관계가 구분되는 것은 그러한 구별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관계의 형식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관계 속에는 항상 모종의 교육내용에 해당할 만한 내용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치 이성의 애인과의 관계가 단순한 육체적 결핍을 충족시킨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그 관계가 그들의 영혼의 결핍을 충족시키는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동성의 친구 관계에서 이런 측면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동성의 친구는 단순히 육체적인 에로스 훨씬 이상의 것 즉 정신적인 에로스를 충족시키는 것을 요구합니다. 아마 이런 시사는 "영혼의 심화 이외에 어떤 목적도/ 결코 우정 위에 두지 말라./ 자기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 이외에 또 다른 무엇인가를 찾는 사귐은/ 이미 사랑이 아니기에"라는 칼릴 지브란의 싯귀에서 잘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다른 영역에서의 사랑도 교육에서의 사랑과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교육은 인간으로서 인간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에로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 또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육체적 물질적 측면만큼이나 정신적 영혼적 측면을 필요로 합니다. 후자의 측면은 문화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학문, 사상, 종교 등 모든 문화는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누적되어 온 것이며,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에로스 때문에 가능한 것이 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문화도 우리 조상들이 단순히 육체적인 에로스를 충족시키는 것을 넘어서서 정신적인 에로스를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의 결과입니다. 교육 또는 공부한다는 것은 인간이 되려면 반드시 필요로 하는 에로스를 충족시키는 대표적인 활동입니다. 즉 교육은 그 자체가 에로스입니다. 그런 점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좋은 보수나 높은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생존 경쟁의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적인 삶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인간다운 인간이 되려는 지극히 절실한 인간적인 노력입니다. 이 노력을 포기할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되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 노력이 성공할 때에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위대한 조상들을 우리의 연인으로 삼을 수 있으며, 함께 공부하고 있는 동료들을 절친한 친구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사는 그 자신이 이 일을 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학생들에게 이 일을 가르치는 자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사의 사랑은 학생 개개인 보다는 누적된 인류문화를 염두에 두어야 하며, 물질적, 육체적, 심리적 필요와 요구의 충족보다는 영혼을 돌보는 일과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의 유희, 사랑의 진실

김 용 일 (계명대)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U. 샤퍼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아무도

그대가 준 만큼의 자유를

내게 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대 앞에 서면

있는 그대로의

내가 될 수 있는 까닭입니다.

나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그대 아닌 누구에게서도

그토록 나 자신을

깊이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 성 性의 시대

오늘날 우리는 성 담론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성에 관한 담론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확산과 더불어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다. 성은 이제 더 이상 신비한 '그 무엇'으로 남아 있지 않고 가장 자연스럽게 파헤쳐져야 할 대상으로서 바뀌어 적나라하게 우리 앞에 노출되어 있다. 누드 스타 이승희의 출현은 육체의 아름다움과 노출의 미학을 강조하는 시대적인 상황을 잘 드러낸다. 이제 옷으로 가려진 신비한 몸의 아름다움이나 만남과 대화를 통하여 서로 나누어 가지던 깊고 그윽한 정신적인 아름다움은 고리타분하고 타파해야 할 구시대의 잔재로 전락되었다. 성을 강조하는 것은 삶에 있어서 분명 중요하다. 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성은 바로 인간을 해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몸과 몸의 만남은 단순히 욕정을 발산하는 육체의 만남이 아니라 오히려 몸을 통하여 영원을 꿈꾸려는, 몸을 통하여 잃어버린 한쪽을 찾았음을 확인하는 강렬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을 찾기 위하여 성을 통하여 숨겨진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들을 찾아내려고 하며 억압된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려고 노력한다. 성에 대하여 말하기를 거부하려는 사람들은 이제 인간의 인간다움을 왜곡하는 사람들로 비판받기도 한다. 성은 분명 삶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

성이 부각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육체에 대한 관심의 고조를 들 수 있다. 건강 식품이나 보양 식품을 무분별하게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육체와 정신 양면에서 그들의 자신 없음과 비이성적인 야만에 비애를 느낀다. 물론 인간의 몸은 인간의 정신을 위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신적인 건강은 많은 부분 신체의 건강에 영향을 받는다. 신체가 건강하지 못하다면 정신 역시 건강하기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삶의 한 부분인 육체가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인간 전체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에 있다. 한 권의 좋은 책을 읽고 마음의 양식을 얻는 것보다 한시간의 신체 단련이 더 큰 의미를 갖는 오늘날 인간의 정신은 도대체 어디로 숨어 버렸는가?

육체의 강조는 필연적으로 육체로부터 시작되는 성의 강조로 자연스럽게 이행된다. 무의식과 욕망의 분석을 통하여 인간은 성에 의한 성을 위한 성의 존재로 바뀌어 버린 것 같다. 성이 바람직한 인간의 삶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성을 위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적인 쾌락의 순간을 위하여 존재하며 성으로부터 지배당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들은 성이 마치 인간이고 인간은 성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많은 책들은 성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하며 인간의 인간다움은 오로지 성적인 능력과 자유로운 성의 실현, 즉 성으로부터의 자유 내지는 성적인 자유의 발산에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성에 관한 풍부한 지식은 더 이상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이제 인간은 없어지고 성이 인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이 성의 주인이 아니라 성이 인간의 주인으로 바뀌었다. 부분이 전체의 위치를 차지하고 전체가 부분의 위치로 전락하여 이제 총체적인 인간의 모습은 사라지고 오직 삶의 한 부분으로서의 성만이 인간을 나타내고 있다. 데카르트 이래 인간을 규정하는 원리였던 정신과 사유는 이제 인간을 기만시키고 인간을 억압하는 잘못된 구속의 굴레로서 간주된다. 인간의 자아는 오로지 성적인 기쁨을 탐닉하는 자아로 전락하였고 성적인 자유를 발산하는 한에서 인간의 삶은 가장 인간다운 삶으로 바뀐 것처럼 보인다.

이제 사유하는 자아나 실존하는 자아, 혹은 희망하는 자아의 개념은 사라지고 욕망 하는 자아, 행동하는 자아, 그리고 순간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자아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제는 인간을 규정할 때 밤이 그리워지고 기다려지는 사람, 밤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천국을 노래하는 사람과 밤이 두려운 사람, 아내의 샤워 소리에 진땀을 흘리며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는 허약한 사람으로 구분될 수 있을 뿐이다. 성적인 능력이 부재한 사람은 가정에서의 권위도, 사회에서의 위치도 찾지 못한 채 밤마다 골목길을 배회하며 자신의 능력 없음을 한탄하며 삶 자체에 회의하며 방황하게 된다. 이제 인간이 성을 통하여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동시에 출산을 통하여 영원히 살려고 하던 현실적이고 이념적이던 시대는 지나갔고 오로지 성적 쾌락의 능력에 의하여 삶의 기쁨을 얻고 자신을 실현시키는 육체 중심의 시대로 이행되었다.

2. 우리에게 있어서 사랑의 의미는?

성의 노예로서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우리는 그렇게 쉽게 인간 없는 성은 존재할 수 있지만 성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성이 과연 인간의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성적인 욕망에 의하여 지배당하는 인간, 그 인간을 우리는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 것인가? 성적인 욕망, 더 나아가서는 욕망으로 모든 것을 규정하려는 욕망 중독의 이 시대에 여전히 낭만적인 사랑은 남아 있는가? 남아 있다면 우리는 사랑의 본래적인 모습을 어떻게 찾아야 될 것인가?

시대가 바뀌고 인간도 바뀌며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세계관도 끊임없이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과 생물들이 나고 죽는다는 것뿐이다. 사람들의 모습은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으나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생각 자체는 이미 예전 사람들과는 많이 달라졌다. 아니 완벽하게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옛날의 진리 규범은 오늘날 더 이상 진리 규범이 될 수 없다. 사람도 변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변하고 사랑 또한 변한다. 사랑한다는 사실은 동일하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옛날과 지금이 다르고 사랑을 느끼는 느낌 또한 다르다. 70년대 말 혜은이가 '제3한강교'에서 사랑을 노래한 이래 사랑은 이제 더이상 정신적인 만남이 아니라 육체적 만남의 관계로 바뀌어 버렸다. 맑은 달빛 아래에서 두 사람이 하나의 마음이 되었지만 몸으로 표현하지 못해 망설이며 고뇌하던 낭만적인 시대는 이제 지나가 버렸고, 달빛이 구름에 가려지길 간절히 기다리며 서로의 육체를 탐하며 둘의 사랑을 확인하는, 하나의 몸으로서 사랑을 확인하는 욕망 충족 내지는 욕망 발산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TV 드라마 '첫사랑'에서 노래하던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이라는 표현은 벌써 진부한 표현이다. '하고 있어도 하고 싶은'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는 노랫말을 정말 흘러간 옛노래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랑의 의미는 무엇인가? 분명히 사랑은 성적인 결합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성은 인간이 갖는 부정할 수 없는 원초적인 욕망이다. 그러나 욕망이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의 결핍과 함께 무한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맹목적인 관계의 연속으로 바뀌어질 때 이기적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욕망은 인간의 인격적인 가치나 혹은 타인의 고귀한 인품을 거부하고 오로지 육체적인 정복의 기쁨 속에서만 삶의 의미를 찾는다. 욕망의 끝은 허무이고 절망이며 고통이다. 불나비에게 불꽃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죽음이 가까이서 미소 짓듯이 욕망과 쾌락이 절정에 달할수록 죽음의 그림자 또한 커진다. 인생을 화려한 꽃으로 가득 장식하는 것처럼 보이는 욕망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자기 밖의 성적인 대상에서 찾는 자기 상실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 욕망이 사그라드는 그 순간 육체적인 영광은 '풀의 꽃'처럼, 그리고 '잠깐 있다 없어지는 안개'처럼 고독과 허무 속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성적인 환희의 순간은 바로 자기 존재의 허무나 자기기만의 극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 지나친 과장일까?

그러나 분명히 인간은 성적인 욕망을 통해서 자신을 실현시키기도 한다. 많은 예술가들이 창작의 원천으로 삼는 것이 바로 성적인 욕망이다. 또한 고대의 우리 민족들의 사랑을 살펴보면 정신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육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육체의 자유로운 표현은 억눌린 정신세계의 해방을 맛보게 하기도 하며 육체의 내지르는 환성은 새로운 삶의 활력소로서 기쁨과 행복을 제공하기도 한다. 육체적인 사랑은 정신적인 사랑의 깊이를 분명 더하게 한다.

세상에는 성적인 관계를 통하여 행복을 얻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성관계를 귀찮은 의식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어쩔 수 없이 의무 때문에 관계를 맺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우리 삶의 나이 가운데 성적인 것이 중요한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물론 짧지만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이 과연 모든 사람들에게 삶 전체를 의미할 정도로 중요할 수 있는가? 성적인 쾌락보다 정신적인 사랑에 더 큰 의미를 두어야 하고 둘 수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들을 우리는 그냥 인생이 끝나 버린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 잃어버린 사랑의 본래적인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모두가 성을 말하고 성적인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 잃어버린 사랑의 본래적인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그 속에서 숨쉴 수 있는 곳, 우리가 그곳에서 삶의 꿈들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곳, 그곳은 육체와 육체가 만나서 동물적인 만족에 몸을 떠는 환상적인 만남을 초월하여 육체의 만남을 통하여 숭고한 정신적인 깊이를 심화시키는 것, 정신의 만남을 통하여 사그라져 가는 육체의 신비를 되살리는 것, 그리하여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둘이면서 하나로서 사는 것일 것이다. 사랑은 마음과 마음이 조용히 어우러져 꿈과 사랑을 실현시키는 곳, 바로 그곳에 있지 않을까?.

3. 유희로서의 성

놀이는 노는 사람들에게는 세계이다. 어린아이에게 구슬치기는 바로 아이들의 삶 그 자체이다. 아이들에게서 구슬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아이의 세계를 빼앗는 것과 동일하다.

아이들은 구슬치기를 통하여 세계를 꿈꾸며 구슬을 통하여 삶의 가치를 찾는다. 욕망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성의 유희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이들에게 성은 유희이다. 그들은 사랑을 이러한 유희를 통하여 확인한다. 그들에게 유희는 곧 사랑이다. 몸과 몸이 부딪치는 놀이가 바로 사랑의 표현이다. 그들에게 사랑은 미래의 세계를 꿈꾸며 현실의 세계를 가꾸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적인 만족감, 그 속에서 얻는 성취감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구슬치기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그 다음날 계속할 동일한 유희를 꿈꾸며 아쉽게 집으로 돌아간다. 얻는 기쁨이 크고 잃는 슬픔 역시 크다 하더라도 그러한 감정들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의미 없이 잊혀지는 순간의 기쁨과 슬픔일 뿐이다. 사랑이 주는 행복에 겨워 가슴 떨리던 그 순간도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생각해 보면 그것은 순간의 헛된 꿈 내지는 착각이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성적인 사랑은 바로 이러한 류의 것이 아닐까? 순간 순간 가장 진실하지만 그러나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것, 매 순간 최상의 기쁨을 선사하지만 그러나 지나서 생각해 보면 그냥 하나의 즐거운 기억들..... 때로는 알 수 없는 허무가 또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고독이 순간의 기쁨이 끝나고 나면 밀려오는 것, 이것은 바로 유희가 주는 잠깐의 기쁨, 내지는 황홀한 착각일 수 있다.

그러나 유희의 순간에 유희는 참된 기쁨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몸과 몸이 마주하며 부딪쳐 떨리는 그 순간보다 더 확실한 순간은 없다. 몸과 몸이 마주치는 순간은 바로 인격과 인격이, 그리고 세계와 세계가 마주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온 몸의 떨림, 그것은 살아 있음에 느끼는 환희의 송가이다. 몸 전체로 원하는 그리움, 그것은 바로 삶의 아름다움이다. 따라서 몸이 열리지 못한 사람은 성이 주는 기쁨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다. 이 기쁨 속에서 사람들은 또하나의 다른 세계를 꿈꾼다. 유희의 기쁨은 때로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형성하며 인간에게 기쁨과 행복을 선사한다.

성적인 사랑은 인간에게 생식의 기쁨과 만남의 기쁨을 선사한다. 인간은 성적인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자신의 몸의 신비를 깨닫는다.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에게 성관계는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중요한 몸짓 대화의 수단이고 두사람이 함께 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부부는 몸으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하고 이들은 몸이 어우러져 하나가 될 때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성적인 관계를 통하여 부부는 서로의 관심을 확인하고 서로의 삶을 이해한다. 또한 성의 언어를 통하여 말로 할 수 없는 사랑의 표현들을 전하며 그 가운데서 서로간의 신뢰를 회복하기도 한다. 새로운 생명을 갖게 되는 출산과 자신의 몸에 대한 신비를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은 분명 인간에게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큰 기쁨임에 틀림이 없다. 그만큼 인간에게 있어서 성적인 사랑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성적인 사랑으로서의 유희는 항상 이렇게 황홀하기만 할까? 아니다. 유희는 분명 유희로서 한계를 갖는다. 가장 가까이서 함께 하는 그 순간 서로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이중성과 그 순간이 끝나면 또다시 새로운 고독 속으로 밀려들어가는 것, 그리고 헤어짐... 이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것처럼 보였던 성적인 사랑의 끝이 가지는 허무함일 수밖에 없다. 부부들이 갖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 방식으로서의 성 또한 가장 진실한 감정과 동시에 가장 허위적인 자기 기만의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는 안기고자 하는 욕망과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허위 의식을 성적인 발산을 통하여 해소하려는 가장된 몸짓은 아닌지? 성적인 사랑은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삶의 형태 가운데 하나의 형태일 뿐이다. 인간은 육체와 정신의 종합이고 따라서 육체가 찾을 수 있는 기쁨은 분명 반쪽의 기쁨일 수밖에 없다.

두사람의 만남인 성관계는 한편으로는 몸의 관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의 관계이기도 하다. 몸이 만나면서 그 몸을 통하여 마음을 진실하게 하나로 모을 때 두사람은 몸의 관계를 통하여 상대방과 하나되는 기쁨을 갖고, 마음의 관계 속에서 진실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성이 욕망에만 관계될 때 성은 통제할 수 없는 파괴적인 본성을 갖고 이성적인 인간의 모습을 파괴할 수 있다.

4. 사랑은 그리움

사람들은 눈을 통하여 세상과 관계 맺는다. 시선이 미치는 곳에 항상 마음도 함께 있다. 그러나 눈은 한편으로는 욕망의 불화살로, 다른 한편으로는 진실된 그리움의 어루만짐으로 타자와 관계한다. 욕망의 불꽃은 모든 것을 살라버리지만 그리움의 시선은 모든 죽어 가는 것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눈의 언어는 깊은 사랑의 눈길을 통하여 얼어붙은 모든 것을 녹인다. 눈으로 살짝이 말하는 언어는 뜨거운 사랑의 시작이며 동시에 사랑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눈의 언어는 그리움의 언어이다.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며 표현하지 못하는 애틋한 마음을 전하려는 깊은 마음의 언어이다. 잃어버린, 혹은 잊혀진 반쪽을 향한 그리움이 말로써 표현되지 못할 때 안으로 숨겨지는 마음의 눈으로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그리워한다. 그리움 속에는 이미 이루어 놓은 과거의 사건과 아직 이루지 못한 미래의 꿈도 포함된다. 때로 인간은 어렸을 적 따스했던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며 또 때로는 아스라히 사라져 간 첫 사랑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아직 실현하지 못한 과거의 꿈꾸었던 환상적인 삶을 그리워하며,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의 꿈을 그리움 속에서 실현하려고 몸부림친다. 또 때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릴 적 고향을 그리워하며 잃어버렸던 어릴 적 장난감들을 그리워한다. 또 때로 부모 몰래 쌈짓돈을 훔쳐서 과자를 사 먹던 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하며 힘이 센 아이들에게 돈을 빼앗기며 억울해 하던 그 시절조차도 그리워할 수 있다. 그래서 푸시킨은 삶을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고 그리고 지난 것은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살아 있다는 것은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워한다는 것은 아직 충족되지 못한 무엇에 대하여 가슴 아파하며, 못 다 채운 그 무엇을 채우기를 간절히 고대하는 애틋한 결핍의 표현이다. 인간은 왜 이처럼 채워지지 않은 그 무엇을 애타게 찾으려 하는 걸까? 자기가 갖지 못한 아름다운 그 무엇을 끊임없이 찾아 헤맬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 이유는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삶이 원초적으로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그리는 영원한 아픈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인간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고향을 끊임없이 그리는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는 슬픈 운명 때문인가? 혹은 자신의 유한함으로부터 오는 자신의 공허한 자리를 메우려는 연약한 인간의 헛된 몸부림인가?

플라톤은 "향연"에서 잃어버린 나머지의 반쪽 자아를 찾아가는, 그리고 그를 통해서 완전한 진리를 찾아가는 열정을 사랑이라고 말하였다. 잃어버린 자아는 육체적인 만남만을 통하여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고향을 그리는 애틋한 마음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본래적인 자아에 대한 그리움인지도 모른다. 완전한 자기에 대한 그리움 혹은 잃어버린 나머지 반쪽에 대한 그리움은 나의 삶과 꿈이 한데 어우러져 나의 모든 것을 이루고 있던 어머니의 품과 같은 따뜻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다. 사랑은 바로 이러한 고향을 그리는 그리움이 아닐까?

그리움은 그 이성적인 이념 때문에 한편으로는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현실적인 우리 삶에서 생동성을 빼앗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리움은 못 다 채운 그 무엇을 채울 수 있게 하는 실천적인 이념으로 인하여 우리 인간에게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꿈과 희망을 안겨 준다. 그리움이 진실할수록 사랑은 진실할 수 있다. 그리움이 깊을수록 깊어진 그리움은 우리의 삶을 영원한 이념의 세계, 아름다움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러한 그리움은 나뉘어진 한쪽을 찾음으로서 신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애틋한 마음의 표현이 아닐까? 사랑을 통하여 영원히 살려고 하는 욕망이 우리를 사랑하게 만든다면 영원히 살려고 하는 마음은 불완전한 자신의 모든 것을 거부하고 영원히 죽지 않는 자기를 만들려는 안타까운 몸짓인지도 모른다. 영원에 대한 그리움, 신이 되고자 하는 그리움이 영원을 사모하는 그리움의 마음으로 표현되는 것이리라.

5. 사랑의 진실

우리가 설정해야 할 삶의 좌표는 무한한 욕망에 의하여 지배되는 동물적인 삶도, 너무 메말라서 건조해 버린 이성적인 허구적 이념의 세계도 아니다. 욕망의 생동력이 아직 아니 도달된 미래의 이념을 현재에 승화시키고 이념의 순수함이 갖는 희망찬 미래가 이 현실적인 욕망을 통하여 성취된다면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이념의 힘과 이념을 실현시킬 수 있는 욕망의 의지가 결합되어 인간은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다.

몸은 분명 마음의 집이다. 몸 없는 마음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마음은 몸을 통하여 사유의 터를 갖는다. 몸으로 표현되는 욕망은 사유의 집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함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마음 없는 몸 또한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줄 수 없다. 마음이 몸의 한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이념의 세계를 꿈꿀 수 있는 것은 마음이 갖는 초월적인 힘이 있기 때문이다. 몸은 마음의 이러한 힘을 통하여 생명을 부여받는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고향은 어디인가? 우리의 기쁨과 희망이 숨쉴 수 있는 삶의 쉼터는 어디인가? 그곳은 함께 서로 믿고 의지하며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곳, 그곳은 몸과 마음이 이어지며 사랑과 이해와 믿음이 함께 하는 사랑의 유토피아가 아닌가? 아직 도달하지 못했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영원한 삶, 그것은 바로 사랑을 통하여 실현해야 할 우리의 이상향일 것이다.

참된 사랑의 언어와 의식, 그리고 관계의 회복은 바로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가능하다. 참으로 자신의 존재를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사랑하며 자신의 바른 삶의 방식을 의식하고 바른 언어로서 삶을 영위할 때 우리는 또다른 하나의 자기인 타자를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바로 너 속에서 나의 참된 생명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고 나 속에서 너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것이다. 사랑의 행위는 몸짓이 없는 마음의 바람만으로도, 마음이 없는 몸의 열정만으로도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몸과 마음의 조화 속에서 사랑이 숨쉴 수 있고 그 속에서 몸의 한계를 극복하는 영원한 사랑이, 마음의 한계를 극복하는 구체적인 사랑이 가능할 것이다.

6. 나오는 말

정신적인 사랑이 성적인 사랑의 기쁨을 통하여 실현된다면 성적인 사랑은 정신적인 사랑을 통하여 승화된다. 애정이 없는 육체적인 관계나 육체적인 관계가 없는 이념적인 사랑은 인간이 육체와 정신의 종합인 한에서 분명히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사랑하기 때문에 갖는 고통과 사랑을 통해서 받는 고독의 깊이는 나와 다른 너를 사랑하면서 나와 같은, 혹은 나의 꿈과 같은 너를 찾으려는 불가능한 욕망 때문에 생기는 필연적인 슬픔일 수밖에 없다. 나와 같은 혹은 나의 꿈속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이상적인 너는 현실적인 나와는 다른 가공의 너일 수밖에 없다.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숨쉬지 못하고 기뻐하고 슬퍼하지 못하는 너는 너 아닌 너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꿈이 바로 나와 너의 사이에서 나와 너를 영원한 타자로 머무르게 한다. 이러한 타자로부터 벗어나는 것, 나 속에서 참된 너의 모습을 발견하고 네가 갖는 아름다운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 내가 사랑하는 너를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며 그 속에서 따뜻한 배려를 통하여 항상 너에게 기쁨을 주려고 노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의 참다운 표현이 아닐까? 때로 심술을 부리지만 이해할 수 있고 또 때로 실수를 하지만 어여쁘게 봐주는 것, 늘 함께 있어도 싫증내지 않고, 함께 있어서 오히려 고마운 것, 늘 새롭게 되도록 노력하면서도 항상 타성에 젖어 있는 너를 이해하는 것, 서로 마주보며 함께 기뻐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함께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이러한 사랑은 바로 류시화 시인이 말하는 사이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 너와 내가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이며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로서 항상 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함께 하는 삶, 삶으로부터 이념이 제시되고 이념과 삶이 하나이어서 둘이 함께 생각하고 함께 느끼며 그 다른 생각과 다른 느낌을 이해하며 마주보고 활짝 웃을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사이가 없는 사랑이 아닐까? 그 삶은 바로 너와 내가 현실적인 고난을 마주보면서 극복하고, 언젠가 다가올 먼 미래를 희망을 갖고 바라보는 것, 그 미래를 위하여 지금 여기에서 조용히 서로를 마주보며 서로를 위하여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일게다.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류시화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시인의 주: 비목= 당나라 시인 노조린의 시에 나오는 물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