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 대하여

우리는 철학학회 커리큘럼을 작성하면서 계속 '도대체 철학이 뭐냐'라는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참으로 골치아픈 문제임에 틀림없다.

일단 겸손하게 우리의 목적을 한정시키자. 우리는 '학회에서의 철학'을 정립하고자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는 중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질문에 거창한 대답을 마련하기보다는, 소박하게 우리의 '학회'라는 공간에 알맞는 '철학관'을 찾아보도록 하자.

우선 철학이란 '철학과에서 배우는 것'이라고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함으로써 우리의 탐색을 시작해보자. 다음 인용문을 보자.

"본 학과의 교육목적은 사물을 높은 견지에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고 치밀하고 타당성있는 논리적 사고력을 훈련하여 역사적 현실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편견없이 사태를 헤아리는 슬기로운 판단력을 함양시키는 데 있다."

필자는 철학과가 좋은 과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좋은 과인지는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위와 같은 규정은 좋다는 말은 모조리 쓸어다 붙여놓은 것이지만 그만큼 '빚좋은 개살구'이기도 하다. 두리뭉실한 규정인만큼 이야기하는 것이 별로 없다. 우리의 학회에서는 위와 같은 철학교육 목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궁극적인 목표는 저런 수준에 두어야겠지만 너무 추상적인 목표는 구체화되기 어려운 법이다.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 학회의 철학관, 철학 교육목표를 찾아나서는 중이라는 것을 잊지말자.

그러면 이런 것은 어떨까? 다음 인용문을 살펴보자.

"철학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가장 일반적인 이론과 방법의 기초를 제공하며, 철학이 제공하는 이 기초는 모든 분야의 지식과 인간의 실천을 포괄하면서 발전의 이론이요 혁명적 사고방식인 변증법과 통일되어 있는 일관된 유물론이다."

실제로 우리의 선배들 중에는 위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철학하면 맑스주의였다. 철학공부를 한다고하면 그것은 곧 맑스주의를 공부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 교과서를 학습하는 것을 의미했다. 1학년학회에서 철학을 공부한다해도 그것은 변유/사유 교과서를 보는 것이요, 철학전문학회에서 다루는 것도 실상은 맑스주의 심화학습이었다. 어떤 사람은 철학과는 맑스주의를 공부하는 곳인줄 알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것은 80년대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다.

그러면 우리 학회에서의 철학개념으로 위와 같은 견해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불행히도 그렇지 못하다. 이유는 여러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위와 같은 철학은 우리의 삶과 유리된 것이라는 점이다. 철학은 우리가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들과 정면으로 부딪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시도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철학개념으로 과연 그러한 기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제 그 적합성을 심각히 의심받고 있는 철학체계(소비에트 맑시즘)와 철학개념을 우리가 무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일까? 우리의 학회가 우리 삶의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는 공간이라면, 과연 위와 같은 의미에서의 철학학습으로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대답은 부정적이다. 우리는 이제 위와 같은 철학관을 폐기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제까지 필자는 기존의 것을 부정만 해왔다. 이제부터는 적극적 주장을 펼칠 생각이다. 그리고 그 주장을 하기위해 상당부분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맑스주의자의 생각을 끌어올 생각이다. 그람시의 철학개념은 우리 학회에서의 철학개념으로 쓰이기에 매우 적당하다는 판단이다. 더 확장해서 이야기하면 학회운동 전반에 대한 이론적 뒷받침으로서 그람시의 이론이 매우 유용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우리는 "모든 사람은 철학자이다"라는 그람시의 과감한 주장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다음과 같은 인용문을 살펴보자.

"철학을 어떤 특정 범주의 전문가나 직업적이고 체계적인 철학자가 하는 특수한 지적 활동으로만 보고 생소하고 어렵게 여기는 만연된 편견을 깨부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에게 고유한 '자생적 철학'의 영역과 특성을 규정함으로써 모두가 철학자라는 점이 밝혀져야 한다."

그람시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철학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철학은 첫째, 언어에둘째 '상식'과 '양식'(good sense)에 셋째, 대중종교와 '민속'이란 이름으로 집합적으로 묶이는 신념,미신,의견,사물을 보는 방식,행위방식 등의 전체계 속에 담겨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철학자이긴 하지만 모두가 같은 수준의 철학자인 것은 아니다. 사고의 '정합성', '논리성'등에 있어서 사람마다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있는 기존의 '철학자'라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그람시에 의하면 그들은 다른 일반인들에 비해 '사유'를 매우 엄격하고 정합적이고 체계적으로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사상사 전체까지도 숙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우리 학회에 적용시켜보자. 학회원 모두는 이미 철학자이다. 철학공부를 했건 안했건 관계없이 말이다. 그런데 별로 좋아할 게 없는 것이, 철학자이긴 철학자이되, 아주 수준낮은, 형편없는 철학자들이다. 학회교사의 경우엔 약간의 철학적 훈련이 되어 있으므로 1학년생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수준 높은 철학자이다.

학회원 : 형, 저는 철학자가 아니에요! 저는 철학의 '철' 자도 모른단 말이에요. 그런데 어째서 제가 철학자란 말이에요! 저는 철학자가 싫어요!

학회교사 : ('퍽'소리나게 한대 때리며) 임마, 너도 철학자야! 단, 아주 형편없이 질 낮은 철학자일 뿐이지.

계속해서 다음 인용문을 보자.

"비록 각자 나름대로이고 무의식적이기는 하나 '언어'로 표현되는 가장 단순한 지적 활동에서도 특정 세계관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일단 모든 사람이 철학자임이 밝혀졌다고 보면, 그다음 단계인 자각과 비판의 제2단계로 옮아간다. 말하자면, 비판적 자각없이 산만하고 삽화적인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질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외적환경, 곧 태어남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이 속하게 되는 많은 사회집단 가운데 하나에 의해 기계적으로 강제된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더나은 것일까를 묻게 되는 것이다......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물음도 생기게 된다. 즉 의식적이고 비판적으로 자신의 독자적 세계관을 마련하여 자신의 정신노동에 부합하는 독자적 활동 영역을 선택하고, 그리하여 세계사 창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신이 자신의 안내자가 되어 인격형성을 외적 자극에 수동적으로 나태하게 맡겨 버리기를 거부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물음이다."

우리는 위의 구절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각과 비판의 제2단계'에 대한 언급으로서 여기에서 철학교육의 가능성과 목표가 도출된다. 인간은 산만한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에서 벗어나 의식적이고 비판적으로 자신의 독자적 세계관을 마련할수 있다. 태어남과 동시에 속할 수 밖에 없었던 사회집단에 의해 강제된 세계관에서 벗어나 자신의 독자적 세계관을 마련하고 세계사 창조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가능성을 지닌다. 이것은 사고가 처음의 무질서한 단계를 벗어나 비판적인 단계로 옮아가게 됨을 의미한다.

이것을 우리 학회에 적용시켜 보자. 학회원들은 맨처음에 아주 혼란된 사고를 가지고 있다. 자신이 속해있던 사회집단에 의해 주입된 세계관을 상당부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지배이데올로기, 대중문화의 포섭력등등). 그는 아주 질낮은 철학자의 수준 그대로이다. 그러나 학회원들은 '자각과 비판의 제2단계'로 도약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학회활동을 통해 그는 기존의 세계관에 의문을 제기하고 의식적이고 비판적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관을 마련하기 위해 애쓴다. 그것이 쉽지는 않지만, 자신이 자신의 안내자가 되기위하여, 자신의 인격형성을 외적 자극에 수동적으로 맡기지 않기 위하여 그는 부단히 노력한다.

학회원 : 오빠, 오빠는 서태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원래 서태지를 무지무지 좋아했었는데요, 요즘에는 어딘지 모르게 께름직한 구석이 있어요. 꼭 제가 골 빈 애 같기도 하고 대중문화의 노예가 된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저는 서태지가 너무 좋거든요? 이럴때 오빠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학회교사 : 사실은 오빠도 프로야구가 좋아서 미치겠거든. 근데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좋아하는 것은 문제가 많은 것 같아. 대중문화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정말 엄청나거든. 냉정하게 그것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지. 우리 같이 대중문화에 대해서 깊이 알아보고 바람직한 우리의 대응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그러면 이러한 '2단계로의 도약'은 왜 필요한가? 그냥 편히 살아도 될 것을 왜 굳이 그 힘든 과정을 겪어야 하는가? 이것은 '바람직한 삶'에 대한 문제이다. 어떻게 살것인가의 문제이고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의 문제이다. 실제로 이러한 2단계로의 도약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도 왜 굳이 우리는 '2단계로의 도약'을 성취해야 하는가? 그람시의 인간관을 간략히 살펴봄으로써 이문제에 접근해보자.

"우리가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을 던질 때 참으로 뜻하는 바는 인간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서 이는 과연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지배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며 또 '스스로를 만들' 수 있으며 나아가 자신의 삶을 창조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을 하나의 과정으로, 더 엄밀히 말해 스스로의 행위의 과정으로 보고자 한다."

그람시는 맑시즘의 전통에 따라 인간의 본질을 형이상학적으로 규정하려는 견해들에 반대한다. 그람시에게 인간은 '동적인 관계와 과정의 연속'으로서 이때 개인의 개별성은 유일한 고려대상이 될 수 없다.

"...각 개체에 반영되어 있는 인간성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첫째, 각 개인 둘째, 다른 사람들 셋째, 자연세계..... 우리는 각자를 중심으로 엮여있는 복합적 관계를 변화시키고 변형시키는 만큼 자신을 변화시키고 변형시키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철학자는 정치가이며 또 정치가일 수 밖에 없다. 즉 참된 철학자란 우리 모두가 참여하고 있는 관계의 총체로서 환경을 이해하여 그것을 변형시키는 적극적인 인간이다."

그람시에게 있어 '인간적인 삶'은 변혁지향적인 삶이다. 이것은 그의 인간 이해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인간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요소와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요소의 결합으로서 이해되며 따라서 자신과 얽혀있는 복합적 관계들(다른사람과의, 자연세계와의 복합적 관계들)을 변혁함으로서 자기자신도 변화시키고 변형시키게 된다. 자기 자신의 발전과 인간적인 삶을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을 둘러싼 복합적 관계에 대한 인식을 획득해야하고 또 그것을 능동적으로 변혁시켜야 한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수신(修身)에 힘쓰고 완전한 삶을 향한 몸부림을 친들, 그것이 자신과 다른사람, 자연세계와의 연관고리를 상실한 것일때 그 시도는 완전한 것일 수 없다. 인간은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잘 알기 위해서는 자신과 다른사람, 자신과 자연세계와의 관계를 명확히 인식해야만 한다. 이러한 것들을 위해서 '비판과 자각의 제2단계'로의 도약이 필수적임은 물론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2단계로의 도약'은 어떻게해서 가능한가? 학회에서의 철학학습을 통해 '2단계로의 도약'을 이루고자 한다면, 철학학습은 어떤내용이 되어야 할 것인가? 계속해서 다음의 인용문을 살펴보자.

"철학을 가르치는데서, 학생들에게 과거 철학의 발달에 대한 사적인 정보나 제공해주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그들에게 어떤 문화적 조직을 제공하고, 그들 스스로의 사유를 비판적으로 가다듬어 이데올로기 공동체와 문화 공동체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면, 우리는 학생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과 그들의 철학적 경험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우선 학생들에게, 그들이 무의식중에 '철학자'임을 경험하고 있음을 설명해 주면서). 우리가 학생들의 일정한 문화적, 지적 평균수준을 지금까지 기껏해야 분산적이고 단편적인 쪼가리 지식이나 습득했을뿐 방법론적이고 비판적인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로 전제한다면, 우리는 우선 상식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다음으로는 종교를 다루어야 하며, 세번째 쯤에야 전통적인 지식인 집단에 의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철학체계들로 옮아갈 수 있다."

여기에서 그람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일단 모든 사람이 철학자임을 강조하면서, 우선 상식으로부터 출발해서 종교, 그리고 전문적인 철학체계의 순으로 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철학이라고 해서 대뜸 철학자들의 전문적인 저작들을 읽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구석구석에서 형성되고 표현되는 '상식'으로부터 철학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람시의 주장은 우리가 철학커리를 만든 문제의식과 상당한 유사점이 존재한다. 우리 역시 상식비판으로부터 철학커리가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람시가 살았던 이탈리아 상황과는 조금 다르게 우리 사회는 종교의 영향력이 당시 이탈리아보다는 덜 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대신 대중문화라든가 매체를 통한 지배이데올로기의 광범한 유포는 그 당시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따라서 우리의 철학커리는 대중문화 비판, 지배이데올로기 비판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여기에서부터 출발된 철학학습은 점차 상승과정을 거쳐 전문적 철학체계에까지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과거 철학의 발달에 대한 사적 정보'를 제공하기 위함이 아니라 '문화조직'을 제공하고 '이데올로기 공동체', '문화공동체'에 참여시키기 위해서이다.

학회원 : 형, 철학 공부를 한다더니 무슨 커리가 이렇죠? 롯데월드를 놀러가질 않나, 동화를 다시 보질 않나... 그리고 현대사태나 한국전쟁이 도대체 철학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죠? 저는 철학학회에 칸트와 헤겔을 알고 싶어 들어왔단 말이에요! 형 혹시 철학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어서 이런 것들만 하는 것 아니에요?

학회교사 : (속으로는 뜨끔해하며, 그러나 곧 태연한 표정으로) 건방진 자식! 우리가 칸트,헤겔을 실력이 안돼서 못하는 줄 알어? 할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그러나 지금은 때가 아니야. 우리의 철학은 우리의 상식을 뒤집어 보는데서부터 시작하는 거란말이야. 무조건 유명한 철학자를 공부한다고 철학이 되는 것이 아니야. 우리가 우리의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는 상식, 대중문화, 지배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있다면 진정한 철학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 아니겠니?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모든 사람은 철학자이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매우 혼란되고 비일관적인 사고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혼란되고 비일관적인 사고단계를 벗어나 '비판과 자각의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 철학학습을 해야 한다. 우리가 보다 인간적인 삶을 살고자 한다면 이같은 학습은, 또 그에 따른 실천은 불가피한 것이다. 철학학습의 효과적인 경로는 상식이나 이데올로기 비판에서 출발하여 점차 전문적인 철학체계로 상승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