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왕 사울의 방황과 종말
사무엘과의 결별 : 사무엘이 사울 왕에 대하여 슬퍼하게 된 것은 믹마스
에서 일어난 블레셋과의 전쟁 때와 아말렉과의 전쟁 때의 일이다. 이로 말
미암아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겨 드디어 결별하기까지에 이르렀다.
(1) 막마스 전쟁 때: 블레셋 사람들은 믹마스에서 당한 심한 패배 후잠잠
잠했으나 사울이 즉위한지 2년만에 다시 이스라엘에 침입하여 수도기브아의
동북쪽 7km, 믹마스에서 진을 폈다. 사울은 길갈 진영에서 그들에게 대항할
군대를 긴급히 소집하고 임박한 전쟁에 임하기 직전에 희생제를 드리기 위
해 사무엘을 기다렸으나, 그의 도착이 늦어지므로 사울은 자기가 제사장직
을 대신 행하였다. 이 전쟁에서 사울은 블레셋 군대를 격파하고 크게 승리
했다.
(2) 아말렉과의 전쟁:얼마후 아말렉과 싸울 때 사무엘은 사울에게 [ 모든
사람과 가축을 전멸하라] 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아말렉의아각 왕과
좋은 양과 소를 남겨두고 좋지 못한 것만 멸하였다. 아마 병력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조치였는지도 모르나, 사무엘은 사울이 불신했기때문에 [ 하나님
이 사울로부터 왕권을 철회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사울은 배신한 사
실을 시인하고 용하기를 원했으나 사무엘은 이에불응했으며 그 이후 사무엘
은 죽난날까지 사울을 만나지 않았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베들레헴의 유다 지파 이새의 일곱째 아
들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이렇게 하여 참된 왕권은 하나님 앞에서는 이
미 다윗에게로 옮겨졌다. 다윗은 주전 1085년 베들레헴의 농촌에서 출생한
양치기였다.
(3) 다윗에 대한 사울의 질투 : 몇해 동안 사울은 블레셋 사람과 싸웠다.
나중에 사울은 악령이 들어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이것은 요즈음 말하는
일종의 우울증인 것 같다. 그는 생애 후반에 젊은 양치기로 평판이 높은 수
금 악사인 다윗이 마음에 들어 그를 기브아의 왕궁에 불러들였다.
그 매력적인 젊은 이는 왕궁에서 사울의 장자 요나단과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영원한 우정을 맺었다. 또 사울의 차녀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여 두 사
람은 결혼하게 되고 다윗은 사울 왕가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 무렵에 블
레셋 사람이 내습하여 세벧라 구릉지의 엘라 골짜기와소고 부근의 에베스담
밈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그때 다윗이 단신으로블레셋의 장수, 신장 6규빗
(2m 70cm)의 거인 골리앗을 물맷돌로 그의 이마를 쳐 땅에 쓰러뜨리고 골
리앗의 칼을 빼어 그의 목을 베었다.
이로 인해 블레셋 군은 모두 흩어지고 싸움은 이스라엘의 빛나는 승리로
끝났다. 그러던 중 40년전 입다에게 패배했던 암몬 사람 나하스가이스라엘
고을 길리앗 야베스를 공격해 왔을 때 주민드른 사자를 이스라엘 각 지파
에게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이스라엘의 용사 33만을 소집하여 요단 강을
건너 길르앗 야베스 전투에서 암몬 군을 패주케 하여 전쟁을 크게 승리로
이끌었다(삼상 11:8-11). 초대 왕 사울의 진통과 종말 : 다윗은 놉을 탈출
하여
(4) 블레셋의 성읍 가드로 길을 옮겼다. 그곳에서 가드 왕 아기스의 신하
에게 사울의적이란 것이 탄로되자 다윗은 미친 사람으로 위장하여 겨우 유
다로 되돌아가 예루살렘의 서남쪽
(5) 아둘람굴로 도망하여 숨었다.
(7) 모압의미스바로 모시고 가서 그곳에 거하게 하였다. 그 후 선지자 갓
의 충고에 의해 일행은 유다로 돌아가
(8) 헤렛 숲에 본거지를 두었는데 그 숲은 아둘람굴의 서남쪽에 있었다.
다음은
(9) 세벧라 구릉지의 그일라에거하였다.
블레셋 인이 습격해 왔을 때 그들을 쳐서 그일라 사람을 구출했으나,그일
라 사람들이 자기를사울에게 넘기려는 음모가 있다는 소문이 돌로 있어 다
윗은 급히
(10) 헤브론의 동남 6KM 지점인 십 광야에 가서 숨었다. 거기서 다윗은 사
울의 아들 요나단과 작별하여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을 추종
하던 자들이 난국에 처하게 되매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때 십 사람들은 사울의 환심을 사려고 다윗이 숨은 장소를 알려 주었
다. 다윗은 사울이 쫓아왔을 때 그를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살려
주었다. 다윗은 그곳을 도망하여
(11) 헤브론의 남족 사막지대의마온으로 갔다. 다윗은 재차 사울에게 생명
이 위험해졌다. 그러나 블레셋인의 습격 정보가 들어와, 사울과 그 군대가
그곳으로 출격해야만 했다. 이런 찰나에 다윗은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12) 사해의 서쪽 언게디성읍 부근의 한 굴에 숨었을 때 다윗은 600인의
용사를 부하로 거느리고있었다. 마침 그 굴에 사울이 들어와서 용변에 열중
하고 있을 때 그를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사울이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왕이므로 죽이지않고 자신이 가까이 있었다는 증거로서 그의 옷자락을 베어
서 멀리서 보여주었다. 그때 사울은 자기의 목숨을 살려 준 것을 깨닫고 큰
소리로 통곡하여 울면서 다윗에게 계속적인 자비를 요청했다. 다윗은 재차
(13) 블레셋으로 도망갔다. 가드 왕 아기스는 다윗을 봉신으로 삼고 동남
쪽 40KM 유다 남부의 시글락 성읍을 주고 유목민의 침입을 변경에서 막을
임무를 지웠다. 시글락의 위치는 미불명이나 네겝 지방에 있었다.
그릭 아기스는 만약 유다 6지파가 침입할 때 사울가 대립되고 있는 다윗
이 중립을 지키고 그가 블레셋 사람의 충실한 봉신이 될것으로 믿었다. 그
리하여 아기스는 에브라임 산지에서 이스라엘과 싸울때 다윗을 완전히 신용
하고 이에 참전케 하였으나, 블레셋 인들과 그가이스라엘 측으로 도망할 것
을 겁내어 시글락으로 되돌아가게 했다.
다윗과 그 부하가 근거지 시글락에 돌아와 본즉 급변이 있었다. 다윗이출
정한 동안에 아말렉이 시글락을 급습하여 성읍을 불살라 버리고 여인들과
아이를 사로 잡아가고 양 떼와 소 떼를 탈취해 갔다. 그때 다윗의두 아내
도 사로잡혀 갔다.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에 힘입어 용기를 내어그들을 공격
하여 자기와 부하의 모든 처와 가족과 재산을 찾아오고,뿐만아니라 많은 전
리품을 노획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사울의 길보아 산 전사 : 블레셋이 사론 평야의 아백에 군대를 집결하여
사울과 싸우려고 에스드라엘론 평야를 통하여 진군하여 수넴으로 향하였다.
한편 사울은 다윗에 대한 시기 때문에 정신이 돌아 사고력이똑똑치 않고 기
진 맥진하여 블레셋 인과 싸울 수 없는 상태였다. 또 한편블레셋은 이스라
엘에 대하여 완전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만반의 준비 태세가 갖추어져 그 위
험이 점점 증대 될 뿐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블레셋근에 대항하려고 북으
로 향하여 길보아 산록에 진을 쳤다. 길보아 산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이스
라엘 군은 크게 패하여 요나단을 포함한 사울의 세아들이 살해되고, 사울
자신도 적의 화살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
그는 포로로 잡히는 것을 원치 않아 자기 칼 위에 엎어져 자결했다. 블레
셋 사람들은 왕가의 네 시체를 찾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벧산성벽에 못
박아 걸어 놓았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그 비극의 소식을듣고 사울이
생전에 그들의 성읍을 암몬 사람의 손에서 구해 주었던 은혜를 기억하고 밤
새도록 행군하여 그 시체를 몰래 취하여 길르앗 야베스에 돌아와서 장사했
다(삼상 31: 1-13).
몇년후 다윗이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취해 사울의 고향 베냐민 땅 셀라로 옮겨 장사했다. (삼하 21:12-14)이스라
엘 최초의 왕 사울은 이와 같이 최후를 끝냈다. 실로 그는 구약성서에 있어
최대의 비극적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저가 성실과 열심으로 통합한 이스
라엘의 여러 지파는 다음에 세워질 다윗 왕조에 의하여 더욱 공고한 국가
를 이루게 되었다. 블레셋 인은 길보아 산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둔 동시에
이스라엘은 그 강적에게 완전 굴복했던 것이다.
애도시 활 노래 : 다윗은 아말렉을 치고 시글락에 돌아온 셋째 날 아말
렉의 한 소년으로부터 사울과 그 아들이 전사했다는 그 비참한 정보를 들
었다. 그의 죽음을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된 다윗은 종일통곡하며 울
었다. 다윗은 비운의 사울과 요나단 부자에게 올리는 비통한애도의 [활 노
래]를 지었다. 이 노래는 다윗의 우정과 충절을 표현한것으로 절절한 애조
를 띠고 있어 문학적으로도 가장 아름다운 애도가이다.
그는 이 이노래를 온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게 하였다. 그 당시의 무기로
서는 활이 주종이었기 때문에 전장의 노래로서 적합한 제목이라고 일러왔
다. 이스라엘아 너의 영광이 산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오로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 것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됨이라 내 형 요나단이
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다. (삼하 1:19-27).
구세주의 전형 영광의 다윗 : 이스라엘 역사상 다윗은 아브라함, 모세와
비견되는 거성이며 그의 이미지는 선지자를 웃돌 정도이고,그는 조상의 종
교에 충실하며 선지자 앞에서 겸허하였다. 그는 지용이 뛰어난군인이며,
발군의 지도력과 정의 공정의 감각을 가진 대 정치가로 또위대한 시인이며
음악가이며 로맨틱한 영웅이었다. 왕으로서는 그는 여호수아가 약 2세기 전
에 시작한 가나안 정복을 완전히 성취하여 조상이꿈꾼 약속의 땅은 드디어
현실이 되게 되었다.
유다 왕으로 즉위 : 다윗은 피난지 시글락에 있었을 때 사울이 전사했다
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가족과 부하 전원을 이끌고 유다의 헤브론으로
갔다(주전 1013년) 다윗은 유다 사람들의 신임을 얻어 나이 30 세때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할 팔레스틴 남부 지파 연합의 [유다왕] 으로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사울이 죽은 후 곧 이스라엘 전 지파를 통일한 명실
상부한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없었으며, 유다왕으로 즉위한지 7년후 사울
의 아들 이스보셋이 죽고 난 뒤에야 이루어 졌다. 그것을 북방과 남방의 부
족이 전면적으로 화합하여야만 이루어지게 되기때문이었다.
기브온 전쟁과 전 이스라엘 통일 : 그런데 블레셋을 국외로 축출하기위
해서 새 왕 다윗은 남부와 북부 그리고 트란스 요르단의 각 지파를통합하지
않으면 그 실현이 어려웠다. 그런데 남부와 북부의 지파 사이에는 이미 심
각한 불화가 있었다.
사울의 넷째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며, 요단강 동편에 있는 마하
나임으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의 왕이라 선언하고, 이곳을 수도로정하였
다. 그러나 왕은 유명무실한 존재이고, 그 실권은 아브넬이 장악하고 있었
다. 아브넬의 군대가 예루살렘의 북방 9km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경계선
에 위치한 기브온에서 남쪽의 헤브론에서 북상하는 다윗의군대장 요압의
군대와 충돌하여 이에 기브온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에기브온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에서 아브넬은 요압의 아우이며
다윗의 생질인 아사헬을 살해하였다. 그 뒤에 아브넬은 유약한 이스보셋왕
을 떠나 다윗에게 귀순했다. 그 때 요압은 아브넬을 유인하여 살해함으로써
아사헬의 원수를 갚았다. 이스보셋도 파란의 붕진을 지낸 후 심복으로 살해
되었다. 아브넬이 살해되자 다윗은 그를 위대한 장군이라칭찬하고, 그의 무
덤에서 큰 소리로 높이 울었다. 다윗 왕은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 (삼하
3:34) 를 지어온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울면서 불렀다고 한다.
이때 북부 이스라엘 장로들은 [유다의 왕]을 지지하기로 결정하고 다윗에
게 전 이스라엘을 다스려 주도록 요청하여 드디어 다윗은 [전 이스라엘 왕]
으로 정식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대등하게 합병
하는 유다-이스라엘 연합 왕국의 형태였다. 이때가 바로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를 통치한지 7년 6개월이 경과한 때였다. 다윗의인격의 힘과 매력으로
1세대간에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 사이의 불화는완전히 해소되었다.
새로운 수도 예루살렘 : 다윗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을 포함한 연합이
스라엘 왕국의 왕이 되자 그의 비범한 정치 감각으로 남북 연합정권하에 수
도로서 헤브론은 남쪽에 너무 치우쳐 있기 때문에 북 이스라엘지파들이 좋
게 여기지 않을 것이고, 세겜이나 실로와 같은 북쪽으로 수도를 옮기면 자
기의 향당들이 즐거워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남쪽도 아니고 북쪽도 아닌 [왕의 직할도시]가 필요하였다. 그
렇지 않으면 왕국이 영구히 존속할 수 없게 된다. 이 목적에 부합된이상적
인 성읍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계선상의 중립지인 [ 여부스 족의
산성] (현 예루살렘)이었다.
그 입지적 조건을 보면
(1) 중앙적 위치로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경제 선상으로 어느 지파
에도 속하지 않은 구릉지이고
(2) 동쪽에좋은 수원의 기혼 샘이 있고
(3) 해발 800m 의 고원상에, 주위가 글으로둘러싸여 외적의 방어에 유리
한 천연적 요새지이다. 여호수아나 기타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들이 끝내
이곳을 정복하지 못했던 것도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다윗 군대는 성
외의 기혼 샘의 물을 성내로 운반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터널(지하도)
을 통해 잠입 공격하여 여부스인을 멸망시키고 이를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기원전 996년, 애굽 형의요새를 건설하고 헤브론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그 이후 33년 동안이곳에서 전 이스라엘을 통치 하였다. 예루
살렘 천도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 일대 전기를 가져왔던 것이다. 천도
하자 다윗은 중앙집권의조직을 제도화하였다. 그러나 그는 통일을 서두르지
는 않았다. 유다지파와 북부 제 지파간에는 아직 은연한 대립이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그러므로 12지파가 서서히 통일의 필요성을 공감할 때까지는 각 지파자치
를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한동안 실제적인 통치력은 남부 지방에만 미
쳤으며, 무리한 통합은 반란이 일어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종교적 수도로 : 정치와 종교에 밝은 눈을 가진 다윗은 새수
도 예루살렘을 통치하려고 했다. 이스라엘의 여러 지파는 여호와의이름이
아니면 전국을 통일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 통일을 이루
기 전에 종교적 통일을 시도했다.
블레셋 격파로 남북에 다 같이 일체감이 고양되었을 무렵에 예루살렘에서
15km 떨어진 [기럇여아림]에 있는 여호와의 궤를 수레로 예루살렘에 옮겨
오다가 재앙이 돌발하여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동안 안치한 일이
있었다.
이곳에서 여호와의 궤를 이미 여부스 인으로부터 매입한 그의 타작장 즉
오늘날 성암 이라고 하는 평평한 큰 바위에 성막을 치고 그 안에 안치하고,
번제와 수은제를 올렸다. 사울이여호와의 궤를 무시하고, 또 제사장을 자기
곁에서 추방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것은 다윗의 뛰어난 수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