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인식과 진리
철학은 옛날부터 과학이나 철학을 막론하고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 자체와 그 결과를 끊임없이 비판해 왔다. 과연 어떤 지식이 참된 지식인가? 따라서 진리란 무엇인가? 또는 인간의 인식 능력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가? 등등. 이런 문제를 철학은 근세에 와서 인식론이라는 테두리에 묶어 철학의 한 분과로서 다루기에 이르렀다. 인식론이란 지식에 관한 이론이다. 그것은 참된 인식, 진리에 관한 이론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우리는 먼저 진리의 의미에 관한 전통적인 세 학설, 즉 대응설(관념이 실제와 일치 내지 대응할 때의 진리), 정합설(새로운 이론이 기존 체계와 부합할 때의 진리) 그리고 실용주의 진리관(어떤 생각을 실지로 행동으로 옮겨 보아 예상대로 들어맞을 때의 진리)을 살피고 다음에 진리의 기준에 관한 역시 전통적인 세 학설, 즉 본유 관념의 직관적 파악에서부터 연역적 추리에 의해서 진리에 이른다는 합리론, 이 본유 관념을 부정하여 우리의 지식을 오로지 감각적 경험에서부터만 설명하려는 경험론, 그리고 이 양자를 종합하여 우리의 인식이 경험적이므로 실질적 내용도 갖추고 동시에 논리적이므로 보편타당성도 띰으로서 진리라는 칸트의 비판론을 살펴보겠다.
1. 인식론의 뜻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여러 가지 앎을 필요로 한다. 가령 먹는다는 행동도 정상적으로는 먹는 것에 대한 앎을 전제로 한다. 길을 걷는 데도 이것이 차도가 아니라 인도임을 알고 신호등을 식별하고 사람이나 차를 피하고 또 지금 걷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가를 알고 있다. 이런 여러 앎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우리는 단 한가지 행동도 할 수가 없다. 물론 앎에는 이런 일상적인 앎뿐만 아니라 학문적 연구를 통해서 얻는 고차원적인 지식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이든 앎에는 아는 자와 알려지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즉 인식에는 인식의 주관과 객관의 두 요소가 있다. 따라서 안다는 것은 주관이 객관, 즉 대상을 아는 것을 말한다. 이때 우리의 관심은 대상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관심을 대상에서부터 앎 자체에로 옮길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앎이란 과연 어떤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살피게 된다. 이와 같이 통상 대상으로 향하고 있는 우리의 관심을 앎과 앎의 작용 자체에로 돌림으로서 우리는 인식론이라는 특수한 분야에 들어서게 된다. 인식론이란 Theory of knowledge로서 '지식에 관한 이론' 또는 '인식론을 뜻한다. 그것은 지식이 자기 자신을 반성하여 문제삼는데서 이루어 진다. 인식론은 지식의 자기 반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II. 진리의 의미<진리문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진리라는 말을 많이 쓴다. 직접 진리라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네 말이 옳다"든 가 "네 말이 맞는다"든 가 또는 "거짓말이 아니라 참말"이라든가 하는 표현도 많이 쓴다. 이렇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나 특히 학문적 활동에서 직접 간접으로 추구하고 있는 진리란 어떤 것인가? 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하는데>,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는 사실상 두가지 물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진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물음이요, 또 하나는 우리가 어떤 판단이 거짓이 아니고 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는 물음이다. 다시 말하면 앞의 것은 진리의 본성이 무엇인가, 진리라는 낱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 물음이고, 뒤의 것은 참과 거짓을 판가름할 기준을 묻는 물음이다. 진리의 본성을 알면 그 본성 유무에 의해서 어떤 판단의 진위를 가질 수 있다고 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진리의 본성에 대한 대응설, 정합설, 실용주의등 여러 학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대응설(Correspondence Theory)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네가 직접 가보면 알 것 아니냐?"는 말을 흔히 우리는 한다. 직접 가 보아서 사실과 들어맞으면 내 말이 옳은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른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생각이나 판단이 사실이나 대상과 일치할 때 진리라고 한다. 이때 '일치'라는 말이 너무 과하다고 하며 '대응'이라고 하는 수가 많다. 판단과 사실을 하나의 관념적 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물질적 존재이므로 이 둘이 일치한다는 것은 기하학에서 두 삼각형이 합동이라 할 때나 또는 좌우 양손을 모아서 서로 일치한다고 할 때와는 다르다. 존재 방식을 서로 달리하기 때문에 구태여 말하자면 서로 대응한다고 하는 것이 좀 더 적합할 것이다. 따라서 판단이 사실에 대응할 때 진리라고 하는 견해를 대응설이고 한다.
(1) 대응설로서의 모사설(Copy Theory)
대응설의 가장 구체적인 나타남이 모사설이다 특별한 장애가 없는 한 통상적인 조건하에서 우리는 대상을 조금도 왜곡됨이 없이 정확하게 파악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가령 앞에 있는 책상이 모나고 노란 색깔이라고 볼 때 우리의 시각으로 파악된 표상(모나다, 노랗다)은 우리밖에 있는 대상(책상)이 사실상 지니고 있는 성질을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즉 그 책상은 우리가 지금 시각을 통해서 알고 있는 그대로의 모양(모나다)과 색깔(노랑)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그 책상을 모나다고 보는 것은 그 책상이 실제에 있어서 모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시각이 마치 거울과도 같이 밖에 있는 대상을 충실하게 비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우리의 인식 능력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반영한다는 주장을 모사설이라고 한다. 우리가 마음에 가지는 표상이나 관념은 바깥 대상의 모사라는 것이요, 이런 의미에서 대상은 우리의 표상과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우리 마음이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을 보통 감각과 이성의 둘로 나눈다면 여기에 따라서 모사설에도 감각적 모사설과 이성적 모사설의 두 가지가 있게 된다.
衁) 감각적 모사설과 실재론
거울은 사물을 비쳐 보는 도구이다. 거울 앞에 사물이 없으면 거울은 아무것도 비치지 못한다. 거울을 없는 것을 있게 하지는 못한다. 반면 사물은 거울에 비치건 말건 스스로 존재한다. 사물의 존재는 거울의 유무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이런 사물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거울이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모사설에서 생각하는 우리의 인식 능력도 거울과 마찬가지다. 사물은 우리의 의식과 아무 관계도 없이 존재한다. 우리가 그것을 보건 보지 않건 간에 사물은 자체에서 존재한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이와 같이 일반적으로 대상이 주관과는 독립해서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생각을 실재론(realism)이라고 한다. 실재론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인식의 대상은 보통 물질적 사물이다. 이 일상적 물질적 사물이 우리 주관과 독립하여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할 때 이것을 우리는 소박한 실재론(naive realism)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바로 감각적 모사설이 취하는 입장이다. 대상이 먼저 실재하며 우리 감각이 이것을 그대로 모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주관보다 객관, 대상에 비중이 더 있음을 알 수 있다. 주관은 객관을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遁)이성적 모사설과 플라톤의 이데아(idea)
실재를 모사하는 인식 능력이 감각이 아니라 이성일 때 이것을 이성적 모사설이라고 한다. 감각이 파악하는 것은 개별적인 물질적 사물이지만 이성이 파악하는 대상은 보편적 존재이다. 이성이라고 할 때 우리는 곧 이론적 사유를 생각한다. 사실 논리적으로 추리하고 사유하는 것이 이성의 기능이다. 그러나 이성은 이론적 사유 이외에 또 하나 직관의 기능이기도 하다.
이성적 모사설은 이성이 그 대상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되 이때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모사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감각적 모사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실재론이 밑에 깔려 있다. 즉 대상이 먼저 실재하고 이것을 이성이 있는 그대로 모사 하는 것이다. 이런 이성적 직관의 대상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 플라톤의 이데아를 살펴보고자 한다.
플라톤은 참된 실재를 이데아(idea)라고 부른다. 이데아란 모든 존재의 본질을 말한다. 가령 노란 책상은 네모난 형태를 가진 일인용 크기의 책상이다. 이 책상이 가지고 있는 이 색깔이 빨갈 수도 있고 모양이 둥글 수도 있다. 이렇게 색깔이나 모양이나 크기가 아무리 다르더라도 그 책상들을 모두 책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그렇게 부르는 것은 이 모든 책상이 색깔이나 모양이나 크기등 가변적인 성질을 가지어 서로 다르지만 그 어떤 불변의 것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책상을 가변적인 성질에 관계없이 바로 책상이라고 부르게 하는 것을 책상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어떤 것을 바로 그것이게끔 하는 것을 그 사물의 본질이라고 한다. 이데아란 바로 이런 본질을 의미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런 이데아는 물질적 사물에 대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속에 가지는 관념이나 개념에 대해서도 각 각 이데아가 있다. 즉 현실적으로 실재하는 모든 물질적 및 정신적 존재에 대해서 이데아가 있다. 그러면 이들 이데아는 어디에 있는가? 플라톤은 이데아가 천상계에 있다고 한다. 그것은 이데아가 현실계를 초월하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물질적, 정신적 존재는 지상에서 생멸하는 가변적인 존재이지만 이 이데아들은 불생불멸이며, 영원 불변한 존재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변화무쌍한 현실계로서의 지상계와 영원 불변한 이데아계로서의 천상계를 구별하는 이원론을 주장한다.
2. 정합설(coherence theory)
대응설은 관념과 실재의 일치(대응)를 진리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가 과연 관념과 실재가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우리는 결국 그 전에 가졌던 관념과 지금 가지는 새 관념을 비교할 수 있을 뿐이 아닌가? 즉 관념과 실재의 일치를 노리면서도 우리가 실지로 할 수 있는 일은 관념과 관념의 일치를 확인하는 일에 불과하지 않는가? 대응설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우리의 지식에 대한 새로운 반성을 촉구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지각한다는 것은 카메라가 대상을 잡듯이 우리의 감각에 나타나는 것을 그대로 기록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우리가 그 대상을 책상이 아니라 걸상이라고 안다는 것은 그런 식별을 가능하게 하는 과거의 경험적 지식이 토대가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즉 지금 가지는 지각을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과거의 경험의 그물에 비추어서 걸상이면 걸상이라고 이해하며 해석하는 것이다. 이 과거의 경험의 그물이란 우리가 그 속에 젖어 있는 기존의 지식의 체계 또는 판단의 체계를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갖는다는 것 또는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 무엇이 기존의 판단 체계로 설명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하는 것은 모두 어떤 판단이나 지식의 영역에서의 일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철학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은 그리고 다루어야 하는 것은 과거의 것이건 새로운 것이건, 오로지 판단 또는 지식뿐이다. 여기서는 진리를 위해서 실재로 찾아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고 진리는 오직 판단 상호간의 정합성에서만 구해진다. 즉 새로 가진 지식 또는 판단이 기존의 판단 체계에 모순됨이 없이 알 맞는가, 어떠한가 만이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진리 관을 정합설이라 한다.
우리의 지식이 단편적이 아니라 전체적인 체계를 이루어야 한다면 진리에 관해서 우리는 정합설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수학이나 논리학과 같은 감각적 지식에 직결되거나 거기에로 환원할 수 없는 형식 과학에 있어서는 경험적 관찰에 의한 진리의 검증은 생각할 수 없고 오로지 새 이론이 기존의 이론 체계와 정합 하는가에 따라서 진위를 가질 수 있을 따름이다.
3. 실용주의(pragmatism)
미국의 실용주의는 이제 까지의 대응설이나 정합설과는 아주 다른 관점에서 진리를 본다. 실용주의에서는 지식을 그 자체로서 다루지 않고 언제나 생활상의 수단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지식은 실제 생활에 있어서 성공적이거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어 낸다거나 또는 편리하고 유용하다거나 하는 실제 효과를 나타낼 때, 참이라고 한다. 실용주의에서는 진리를 실제 생활과의 관계에서 찾고 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행동과 관련해서만 진리를 고찰하고 있다. 본래 Pragmatism의 pragma란 행위를 의미하는 말이다. 실용주의는 이렇게 행위와 직결된 사상이다. 실용주의에서 진리란 만족스러운 것(what is satisfactory), 유용한 것(what is useful), 효험이 있는 것(what works), 또는 편리한 것(what is convenient)이다. 즉 옳은 주장, 옳은 신념은 그것에 따라서 행동하면 끝끝내는 만족스러운 결과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명제나 확신은 그것 자체로서 참인 것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보고 또 그 결과를 살피고 나서 비로소 참인지 거짓인지가 밝혀지는 것이다. 명제는 진리이기 때문에 유용한 것이 아니라 유용하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다. 결국 나무의 좋고 나쁜가를 그 나무의 열매로 검토하여 정하자는 태도이다. 실용주의는 도구주의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즉 관념이 우리를 행위로 인도하는 도구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관념은 그때그때 실제로 적용해 보고 그 결과를 살핌으로써 비로소 그 진위가 가려지는 것이다. 이때 실용주의자들은 관념이 이렇게 행위로 인도해 가는 과정에 아무런 모순도 없고 모든 것이 순탄하게 진행되면 그것은 정합 적이라고 한다. 즉 관념과 실재의 일치 내지 대응은 관념이 행위를 인도하는 힘을 매개로 하여 사실에로 인도됨으로써 진리와 또는 검증(verification)됨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실용주의는 대응설과 정합설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가 인간의 행동과 실천을 매개로 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은 종전과는 전혀 다른 진리관이다. 즉 관념이나 신념은 그 자체로는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며 이것이 행위를 통해서 검증됨으로써 비로소 참도 되고 거짓도 되고 거짓도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진리는 일반적·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의 행위에 따른 특수적인 것이 된 다. 이것은 실용주의 진리관이 상대주의이기 때문이다.
III. 진리의 기준<인식의 기원>
지금까지 진리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대응설, 정합설, 실용주의라는 세 학설에 따라서 살펴보았다. 이제 진리의 기준을 다룰 차례가 되었다. 모든 인식은 진리를 목표로 한다. 이 진리가 어떤 조건하에서 이루어지는가를 밝히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참된 인식이 인간의 어떤 능력에 의해서 어떻게 발생하며, 어떻게 하여 타당성을 얻는가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인식의 기원 문제라고 한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인식의 성립 과정을 밝힘으로써 진리가 어떻게 이루어지며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가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인식의 기원에 관한 많은 학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서 근세의 합리론과 경험론을 그리고 비판론(선험론)을 다루어 보기로 하겠다.
1. 경험론<empiricism>
경험론이란 우리의 인식은 오로지 감각적 경험에서부터만 생긴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도 합리론과 같이 고대부터 있어 왔다. 즉 고대의 소피스트,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중세의 유명론 등은 모두 이것을 주장하였다. 경험론 자들은 우리의 지식을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감각 경험을 통하여 얻어진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경험론 자는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어떤 사람의 주장의 정확성을 확인할 경우 어떤 사람의 주장을 참다운 지식이라고 말할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 그 주장은 참다운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 경험론 자들이 지식의 참과 거짓을 구분하는 방법은 관찰하고 실험하여 검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론 자들에게 있어서 지식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검증 가능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경험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두 가지인데 그것은 첫째 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 둘째 지식의 진리성이다.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은 객관적 대상이고 그것을 아는 것은 인식하는 주관이다. 다음으로 지식의 참과 거짓은 대상의 존재를 다수의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검증함에 의해서 판명된다.
경험론은 감각 지각이 제공하는 경험을 인식론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택한다. 로크는 인간의 분별력이나 이해력(오성)은 원래 백지(tabula rasa)와 같은 것이지만 성장하면서 감각 경험이 백지에 쌓여서 소위 관념(지식)이 형성된다고 한다. 로크와 같은 맥락에서 참다운 지식은 유사성, 규칙성, 인과율을 기준으로 삼아서 성립한다는 주장 역시 경험론의 입장이다. 똑같거나 비슷한 현상을 경험할 때 그것을 일반화할 수 있는 것은 유사성 때문이다. 경험론 자는 자연계의 지식은 현상이 나타내는 규칙성에 의존한다고 본다. 과거의 사건은 동일한 조건을 가진 현재에도 똑같이 일어나며 따라서 조건만 같으면 미래에도 일어날 것이다. 경험론 자는 규칙성과 아울러 인과율을 신뢰한다. 원인이 없는 결과란 있을 수 없고 특정한 원인에서는 항상 특정한 결과가 생긴다는 지식은 바로 인과율을 바탕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경험론 자는 특정한 사실들을 관찰함으로써 일반 원리를 이끌어 내는 귀납법을 자신의 최선의 방법으로 채택한다.
그러나 경험론 자들은 얼마만큼 감각 경험을 신뢰하느냐에 따라서 몇 가지 부류로 나뉘어 진다. 첫째로, 버클리처럼 감각 경험을 지식의 근원으로 삼으면서도 "존재는 지각된 것이다"(esse est percipi, To be is to be perceived). 다시 말해 "있다고 함은 지각되어 있음을 말한다"라고 주장함으로써 모든 대상은 관념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부류의 경험론자가 있다. 두 번째로 로크와 마찬가지로 관념을 경험과 반성에서 생긴다고 보는 경험론 자가 있다 로크가 반성을 내적 경험이라고 해도 반성은 결코 감각 경험이 아니다. 세 번째로 감각주의자 또는 근본적 경험론 자에 속하는 경험론 자들이 있다. 여기에는 영국의 홉스라든가 18세기 프랑스의 심리학적·자연 철학적 계몽주의자들 및 현대의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근본적 경험론 자에 속한다. 이들은 지식이란 외적 대상으로부터 오는 자극에 대하여 나타나는 인간의 신경생리학적 반응이라고 본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이 모든 지식은 감각 경험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2.합리론(rationalism)
합리론이란 우리의 인식 능력을 이성과 감각의 둘로 나누어 감각 아닌 이성만이 우리를 진리로 이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합리론을 이성론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이성이라 함은 후천적인 감각 능력에 대립되는 선천적인 인식 능력을 말한다. 합리론은 상대적 지식 대신에 보편적 지식을 , 감각경험 대신에 이성의 사유를 내세우고 있다.
일반적으로 합리론 자는 인간에게 보편적 지식(인식)이 가능한 근거로서 첫째로 인간이 대상을 파악하는 완전한 인식능력으로서의 이성과 둘째로 불변하며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관념 이 두 가지를 제시한다. 합리론은 합리주의 내지 이성주의로 일컬어지는 서구 문화의 정통을 형성하는 철학사상으로서 주로 다음의 네 가지 서로 다른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합리론은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존재 일반의 원리를 이성으로 보고 형이상학 체계를 밝히려는 학설이다. 희랍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변하는 사변적 합리주의는 이와 같은 합리론의 성격을 가진다.
⸂합리론은 경험과 대립하여 인식의 기원, 근거 및 타당성을 이성에서 찾는다. 이러한 경향의 합리론은 근대의 데카르트로부터 독일 관념론의 헤겔까지를 장식한다. 경험론은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에서 인식의 기원과 근거를 찾고자 했으나 이와 반대로 합리론은 주권적 이성안에서 인식의 기원과 근거를 찾고자 했다.
⸃세 번째 형태의 합리론은 신비주의·주정주의·직관주의 등 모든 비합리주의에 대립하여 주지주의의 성격을 가진다.
⸄신학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합리론은 오직 신앙에만 의존하는 신앙주의와 반대로 신앙의 내용을 자연의 빛인 이성에 의해서 논리적으로 밝히고자 한다. 물론 이들 네 가지 형태의 합리론은 상호 밀접히 연관되어 있긴 해도, 철학사에서 일반적으로 합리론으로 인정되는 경향은 근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되는, 인식론에 초점을 맞추는 합리론이다.
합리론은 인식의 원천을 이성으로 여기며, 이성으로 파악한 보편 원리를 특수한 사실이나 개별 법칙에 적용하고 연역법을 방법론으로 택한다. 경험론은 영국에서 베이컨, 홉스, 로크, 버클리, 흄 등에 의해서 발전된 반면에, 합리론은 대륙에서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찌 등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데카르트는 수학적 방법을 근거로 삼아 명석 판명한 인식으로서의 학(學)을 성립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필연적, 보편적 인식을 얻으려면 모든 편견을 버리고 가능한 모든 회의를 미리 제거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꿈, 감각, 수학 등 일체를 의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말한 의심은 명석 판명한 관념, 곧 제 1원리를 찾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의심이므로 그러한 의심을 방법적 회의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나 의심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고, 생각한다면 생각하는 주관이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으므로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 또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소위 제 1원리가 드러난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제 1원리로부터 "명석 판명한 인식은 진리이다"라는 제 2원리를 이끌어 낸다. 이러한 방법적 회의에 의해서 데카르트는 신, 정신, 물체라는 세 가지 실체의 인식에 도달하는데, 그러한 인식에 도달하는 기원은 자연의 빛인 이성 이외의 어떤 다른 것도 아니다. 합리론 철학의 특징으로서 지금까지 설명한 수학적 방법 외에 또 하나 본유관념설을 들 수 있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가지는 모든 지식 즉 관념을 셋으로 분류한다. 그것은 감각을 통해서 외부로부터 얻어지는 외래 관념과 이것들을 기초로 하여 우리가 멋대로 꾸며내는 허구관념, 그리고 본유 관념의 셋이다. 본유관념(innate idea)이란 우리가 나면서부터 본래부터 구비하고 있는 것으로서 생득 관념이라고도 한다. 본유관념이란 논리적인 개념으로서 경험에 의해서 후천적으로(a posteriori) 습득하는 것이 아닌, 선천적(a priori)으로 간직하고 있는 관념을 말한다. 본유 관념이란 그저 우리가 본래부터 간직하고 있는 관념이라는데 그치지 않고 어디까지나 진리로운 관념, 참된 지식을 말한다. 진리로운 본유관념을 우리는 이성에 의해서 직관적으로 파악해 낸다.
이성이란 중세에서부터 이어오는 '은총의 빛'도 아니고 '계시의 빛'도 아닌 인간 본유의 '자연의 빛'이다. 그것은 직관과 추리의 능력을 말한다. 이성에 의해서 본유 관념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필연적인 연역적 추리를 해나가면 그것은 모두 진리이다. 이것이 직관과 연역이라고 하는 합리론의 방법이다. 합리론은 인간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토대로 하여 올바른 지식의 원천인 선천적인 이성적 사유(직관과 추리)로 진리에 도달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본유 관념으로서의 제 1원리를 직관으로 파악하고 거기서부터 모든 진리를 연역해 내므로 합리론의 방법을 거미의 방법이라고 한다. 거미가 자기의 몸 속에서 실을 끄집어내서 집을 짓는 데 비유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의 확립은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었고 그 후계자인 스피노자, 라이프니쯔 등에 그대로 이어져 간다.
3. 비판론<선험론>
앞서 살펴본 경험론과 합리론은 인식의 원천에 대하여 대립된 견해를 가지고 서로 예리하게 분리되었다. 데카르트를 비롯한 합리론자들은 이성에 의한 본유적, 보편적으로 불변하는 개념과 법칙으로부터 확실한 대상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편, 로크, 버클리, 흄 등 영국 경험론자들은 경험을 전체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주장하였다.
경험론과 합리론의 잘못은 경험이나 이성을 인식의 유일한 원천으로 여기는 일면성에 자리잡고 있다. 칸트는 철학적 인식의 확고한 기초를 마련하기 위하여 경험론과 합리론의 전제들을 상세히 검토하고, 양자의 정당한 주장을 현실과 인식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통일적 파악방식으로 통합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칸트의 비판 철학을 일컬어 경험론과 합리론의 통일 내지는 종합이라고 한다.
★ 표 1
|
합리론 |
선천적 |
필연적·보편 타당적 |
공허(내용 없음) |
|
경험론 |
후천적 |
개연적·상대적 |
객관적(내용있음) |
|
비판론 |
선험적 |
필연적·보편 타당적 |
객관적(실질적) |
표 1에서와 같이 합리론은 지식의 원천을 이성의 사유에서만 찾기 때문에 그 지식은 선천적이며 따라서 필연적, 보편타당적이다. 그러나 경험과 관계가 없는 지식이므로 내용이 없고 공허하다. 이에 대하여 경험론은 지식의 원천을 감각적 경험에만 있다고 하므로 그 지식은 후천적이며 따라서 현실에 부합하여 객관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필연성이 없고 개연적이며 또 보편적인 것이 못되고 주관적·상대적이다. 칸트는 이 두 사상을 종합하여 진리는 경험적이어서 내용도 있어야 하고 동시에 이성적이어서 필연적 보편 타당성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진리는 실질적 진리이어야 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식 능력의 구조와 인식 형성에 대한 인식 능력의 관계를 탐구한다. 대상에서 오는 다양한 인상은 직관 형식에 의해서 경험적 직관인 지각으로 종합된다. 경험적 직관에 주어지지 않는 것은 인식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칸트의 주장은 경험론의 정당성을 살린 것이다.
그러나 지식이란 사유활동의 결과라는 칸트의 주장은 합리론의 정당성을 살린 것이다. 오성(이해력)이 대상을 사유함에 있어서, 곧 오성이 직관을 개념으로 가짐으로 인식이 성립한다. 오성은 모든 경험에 선행해서 특정한 사유 형식을 포함하는데, 그것은 12범주(순수오성개념)이다. 결국 오성이 직관을 범주에 연결시킴으로써 오성은 직관을 개념으로 가져온다. 칸트에 의하면 사유는 오직 경험적 직관에만 관계하고, 경험적 직관 자체는 내용적으로 인상으로 되돌아 가지만, 형식적으로 는 인상에 첨가되는 직관의 주관적 형식인 시간과 공간으로 되돌아 간다. 대상을 받아들이는 틀인 시간·공간에 의해서 표상이 구성된다. 우리는 우선 시간·공간의 틀에 의해서 대상을 표상 함으로 사물 자체(Ding an sich)는 결코 경험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사물이 우리들의 시간·공간의 틀에 잡히는 대로만 표상 된다. 따라서 우리가 관계하고 아는 것은 물자체가 아니라 현상일 뿐이다. 칸트는 우리가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고 단지 사유할 수만 있다는 것을 인식의 한계로 설정한다.
칸트는 종래의 모사설이나 정합설 대신 비판주의의 입장에서 지식을 결정하는 요인을 선험적인 직관형식과 오성형식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철학적 공적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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