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신앙, 현실 그리고 노래
-- 기독인 노래운동 이야기 --
주 현 신
1. 시작하는 이야기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년 이태리에서 태어난 첼로 연주자
이자 지휘자. 파시즘 치하의 조국과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를 떠나 미국으로 가야
했던 그. 19세에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외워서 지휘한 것을 계기로 크게 인정
받은 후, 뉴욕 필하모닉등을 거친 거장. "베토벤의 [운명]을 가장 빠르게, 가장 격
정적으로 연주한 그의 '운명'은 벼랑 끝으로 몰려가는 영웅적인 전사의 그것이었는지
도 모른다"
제가 처음부터 토스카니니 운운하면서 잘난 척 하는 이유가 뭐냐하면요.. 며칠 전
텔레비젼에서 본 영화 [토스카니니]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핵심은 두 부분인데.. 하나는, 음악만을 사랑하던 토스카니니가 "세상에는
음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점을 깨닫는 과정이고, 또 하나는 음악보다 더 중
요한 것의 성취를 위해 음악이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부분이지요. 브라질의 흑인 어
린이를 돌보는 수녀 마가리다와의 사랑이 그로 하여금 노예제도의 비인간성에 눈뜨게
하고.. 그가 처음으로 지휘한 공연 [아이다]는 브라질의 노예해방을 앞당기는
하나의 계기가 되고..
요컨대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술은 자신보다 더 중요한
그 무엇의 성취를 위해 쓰임받을 때 진실로 아름답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나
라를 일구기 위해 밤낮으로 애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노래는 유력한 '선교의 도구'
가 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주현신. 1962년 영주에서 태어나 중학생 때 목사 안수를 받고
(그의 아버지가), 지금은 아버지가 담임하는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하는 백수. 음
대를 다녔더라면 토스카니니 못지 않은 음악가가 될 수도 있었으나 '가정형편상' 사
범대를 갈 수 밖에 없었고.. (음대에 가려면 거액의 레슨비를 들여야 하고, 사범대는
등록금이 쌌으니까) 결국 해직교사가 된 주제에 자칭 '우리 시대의 작곡가'라고 우
기고 다니는 사람.
국민학생 때 마분지에 그린 건반으로 바이엘의 기초를 돌파하고, 중학생
때 교회 선배에게 한 달동안 빌린 기타로 코드감각을 터득하고, 고등학생
때는 김민기에 심취하여 노래의 맛을 느끼더니.. 드디어 대학교 1학년 때
실연을 계기로 '님'을 울부짖는 노래를 쓰기 시작했던 그.
많은 학생운동 조직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유주의자'였지만, 호시탐탐 만난 '불온
서적'에 의해 형성된 '과학적 사고'와 이십 여년 교회생활 경험에 근거하여, 교회와
신앙을 포기하기도 하는데.. 그 대신 '가슴앓이'를 하게 되고.. 다분히 관념적이고
감상적이지만, '광주'를 아파하고.. 5공화국을 아파하고.. 원풍모방의 '공순이'들
을 아파하고.. 부모님의 기도를 아파하고.. 그리하여 시위현장에서는 운동권 학생
들보다 더 열심히 돌을 던지고, 포카족과 당구족 그리고 '술퍼족'의 일원이 되어 보
기도 하지만, 그 놈의 가슴앓이는 해결되지 않고....
그러던 와중에 만난 장청운동. 교회갱신과 사회변혁의 제단에 한 몸 바치고자 하는
기독청년학생들의 진지함에서 '가슴앓이 치유'의 전망을 발견한 듯.. 막연한 자유와
'님'을 찾던 그의 노래는 장청문화선교단 활동을 통해 하나님나라 운동의 도구로 거
듭나기 시작하고, 그는 '비로소' 신앙인이 되었던 것. 그의 치열했던 기독청년운동
경험은 교사운동에 반영되고, 전교조에서의 활동은 그의 노래를 일반 노래운동의 좌
표 위에 위치짓게 하고..
환상적인 [노태우 - 정원식]콤비 덕택에 학교로부터 자유로와진 그는, 다시금 기독
운동과 기독인 노래운동의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다나....
이 쯤 되면, 제가 왜 자기자랑을 길게 늘어 놓는지 아시겠지요? 앞으로 주장할 얘
기들이 그냥 머리 속에서 나온 게 아니라, 나름대로의 경험과 고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겁니다. 특히, [기독청년운동 --> 전교조운동 --> 일반 노래운동] 이라는 과
정을 거친 '몸으로' 기독인 노래운동을 바라 보는 게 저의 강점이자 한계라는 점을
미리 이해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2. 기독인 노래운동을 일구는 이야기
(1) 예수운동 -- 기독인 노래운동의 터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지요. 자신이 의
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기독인이 노래를 부르거나 노래운동을 한다고 할 때도,
비기독인에게서 찾기 어려운 어떤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그 노래할 이유란 다름아닌 '신앙'입니다.
신앙은 '힘'입니다. 기독인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도록 만드는 힘, 기독인의 삶
을 '배후조종'하고 있는 힘, 기독인 노래의 성격과 내용, 형식과방법을 통제하고 있
는 힘이므로.. 신앙에 대해 먼저 고민하는 것이 좋을 듯하군요. 어떤 신앙이냐가 중
요하니까요.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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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적 가치 <--------------+---------------> 수단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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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할 때 배운 그림입니다만, 우리의 신앙을 살피는 데도 도움
이 될 것 같아 그려 봤습니다. 내면과 수단, 개인과 관계를 기준으로 신앙의 경향성
을 파악해 보려는 것이지요. 미리 밝히지만, 내면적이냐 수단적이냐 하는 좌우구분보
다는 개인이냐 관계냐 하는 상하구분이 훨씬 의미있습니다.
에 해당하는 신앙의 특징은 [내세지향 = 현실세계에 대한 무관심], [개인영혼구
원 중시 = 육체로서의 개인에 대한 무시], [금욕적인 개인윤리 강조 = 정치경제적
'관계'의 탐욕스러움에 대한 무책임].. 등입니다. 는 예수 믿으면 병 고치고, 사
업이 번창하고, 시험도 잘 보고, 출세도 하고, 심지어 운동경기에서 이기기도 하고,
나아가 10월 28일에 휴거도 된다고 믿는 기복적인 신앙, 한탕주의적인 신앙이라 하겠
습니다. 혹독하게 말해, 와 는 '개인주의 신화'의 신앙적 표현입니다. 양자는 일
견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현실에서는 개인주의 신앙의 '안과 밖'으로 통일
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수의 기독인들이 이런 신앙을 갖고 있지요.
그림의 세로축에서 '관계'는 '개인'의 반대개념이 아니라 완성개념입니다. 인간(인
간)은 본래 관계적 존재(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너'없는 '나'가 있
을 수 없고, '우리'없는 '개인'은 공허할 수 밖에요. 와 는 관계(사회구조, 공동
선)을 중시하는 신앙의 안과 밖입니다. 가 기독교적 공동삶의 가치를 내면화하여
'관계의 영성'을 계발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면, 는 정치경제적인, 문화적인 실천을
통해 사회를 정의롭게 하는 일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굳이 구분할 수는 있겠군요. 경
우에 따라 나타나는 미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와 는 서로를 보완하고 있습니다.
그 '만남'을 지지합니다.
다시 제 얘기를 합니다. 모태에서부터 저에게 '주어진' 신앙은 였습니다. 의
요소도 상당히 있었구요. 머리가 커지는 만큼 거부감도 커졌지요. 특히, 교인들이 싸
움질할 때는 혐오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 신앙을 버린 거지요. 그 때 버린 것은
였습니다. 장청을 통해 새로 얻은 신앙은 였구요. 요즈음은 의 중요성을 깨닫
고 있습니다. '관계의 영성'이 지배하는 삶과 사회, '해방의 영성'이 충만한 투쟁..
사실, 아래의 신앙( )은 위의 신앙( )이 초래한 현실에 대한 '안티테제'로부
터 형성되었다고 봐야 겠군요. 마치 마틴 루터가 타락한 구교를 승인하지 않는 것에
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듯이.. 담배가게보다도 더 많아 보이는 붉은 네온사인이 도
시의 밤을 밝히지만, 세상의 참빛으로 빛나지 못하는 교회.. 경건하고 웅장해 보이
는 초현대식 예배당과 그 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많지만, 거기에는 고난의
십자가 대신 현세의 축복과 내세의 안락함을 보장하는 '보험'의 십자가만 있을 뿐..
겨레의 아픔과 민중의 고통을 잊으려는 듯한 '나만의 찬양'이 황홀할 뿐.. 거기에는
'역사'를 빼앗긴, 나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이 거하시고.. 온전히 책임지지 못하는
이웃사랑이 있고.. 그릇된 교권에 대한 순종이 있고.. 교인수와 교회예산이 늘어나
는 하나님나라의 확장이 있고.. 장로를 대통령으로 모시는 기독교 국가에 대한 꿈이
있고.. 이런 한국교회의 일그러짐을 회개하고 거듭나기를 열망하는 눈물이 '아래신
앙'의 출발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도식적인 구분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구분 자체가 거짓일 수도
있고, 는 모두 밉고 는 모두 예쁘다는 식의 흑백논리로 받아 들여질까봐요.
살아 있는 신앙을 함부로 칼질한다는 것 자체가 비신앙적일 수도 있지요. 다만 여기
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갱신과 사회변혁(개혁)이라는 구호로 표현되는 '예수운
동'은 와 로 분류된 신앙과 신학에 '주로'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섬기는 것(우상화하는 것)을 거부하고, 예수와 함께, 예
수처럼, 예수가 되어 '지금 여기를' 사는, 행동하는 신앙.. "하나님나라는 '너희 가
운데' 있다"는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나라를 역사진보의 현장에서, 사람들의 관계
(사회구조) 속에 구현하려는 노력..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죄인'들을 구제의 대
상으로 여기지 않고 그 나라의 주인(역사의 주체)으로 고백하고.. 그리하여 민중 속
에서, 민중과 함께, 민중의 몸으로, 민중의 십자가를 지고 한반도의 골고다를 오르기
로 결단(회심)하고 실천(선교)하는 삶..
이것이 제가 고백하는 예수운동의 골간입니다. 기독인 노래운동은 이러한 예수운동
을 '터'로 하는, 예수운동의 한 부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인 노래일꾼은 일차적
으로 예수운동가이며, 예수운동가의 실천적인 삶의 한 형태로 노래일을 하는 셈이지
요. 흔히, 노래(찬양)를 곡조있는 신앙고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2) 노래운동 -- 기독인 노래운동의 벗
여기서의 노래운동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래마을], [꽃다지],[새벽], [정태
춘], [안치환] 등의 활동을 통해 알려진 일반 노래운동을 뜻합니다. 왜 노래운동을
얘기하려고 하는가 하면요.. 기독인 노래운동은 예수운동과 노래운동의 만남 속에서
성장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운동이 '터'라면 노래운동은 '벗'이라는 생각
에서입니다. 여러모로 조금씩 앞서 있는 노래운동은,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 든 기독
인 노래운동에 따뜻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다정한 벗이 되고 있지요.
노래운동의 역사와 현황, 전망을 모조리 설명하기는 어렵군요. 노래운동이 이 얘기
의 주인공이 아니기도 하구요. 여기서는 단지 기독인 노래운동의 벗이 되고 있는 부
분을 살펴 보기로 합니다.
노래운동은 세상을 세상답게 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노래를 노래답게 하려는 움
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70년대 후반에 대학가에서, 80년 대 중반 노동현장에서,
제도권 음악계 일각에서, 일부 '지각한' 대중가수들에 의해 시작한 노래(음악)운동은
창작, 연주, 이론 등 각 분야에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고, [민족음악협의회]의 결성을
계기로 더 분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민족적, 민중적 노래는 어느덧, 우리나라 음악문화의 한 부분으로 정착되고
있는 바, 기독인의 노래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민족적 음악어법에
대한 고민, 뒤틀린 노래현실을 극복하려는 노력, 민중의 현실과 전망을 이모저모로
그러나 '정직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실험정신 등의 과정적 성과들은 기독인의 노래에
좋은 '조언'이 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80년대 초중반부터 일구어 진 기독청년 노래패들은 대학가 노래운동
의 직접적인 영향과 도움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감청과 장청의 노래선교단과 명동성
당의 [신새벽] 등의 중심 구성원들은 대개 대학 노래패 활동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
습니다. 이들 중에는 기독청년운동을 상대적으로 괜찮은 활동의 장으로 생각하는 '위
장교인'들도 더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물론 이런 '외피론'은 이미 극복되었지
요. 예수에 대한 고백이 없는 운동은 일반 사회운동이니까요. 그러나 이 때의 활동은
최근에 다시 활성화되고 있는 기독청년 노래운동에 좋은 자산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요즈음 노래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환자계열'이라는 사실에 주
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개 기독신앙을 품고 있고 교회로부터 노래와
음악의 '달란트'를 받았음에도, 기독교라는 '친정'을 버리고 일반 노래운동에 전념하
는 '배반자들'인 셈이지요. 그 배반의 장미들 틈에 우리시대의 작곡가 주현신 선생
님처럼, 자신을 길러 준 교회와 기독인 노래운동에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
니다. 성공회에서 국악찬송을 일구고 있는 [민음협] 의장 이건용 교수, 주현신 집사
와 함께 음반 [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를 낸 백창우와 류형선, [편드시는 주님]의 고
승하 권사, [돌아가리라]의 문홍주 장로, 광주 우리소리연구회의 정세현.. 주로 작
곡가들 중에 많이 있지요. 이들이 아직 기독인 노래운동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는
않지만, 각자 나름대로 '노래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들은 자신의 노래운
동과 활동 전부를 예수운동의 실천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일반 민중가요를 창
작해도 그 속에서 기독인의 언어와 정서가 발견되는 것을 볼 때, 역시 어쩔 수 없는
'환자'더군요.
따지고 보면, 노래운동 또한 기독교 음악의 영향를 받았지요. [그날이 오면]이나
[아침이슬]만 보더라도, 그 노랫말에 하나님이나 십자가 등의 단어만 없을 뿐이지 얼
마나 '은혜'스럽습니까? 노래운동은 이렇듯 가까운 친구입니다. 노래운동가들 중에
서 '친정살림'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보다 조직적으로 기독인 노래운동에 나서고, [민
음협]내에 기독교 음악위원회라도 생긴 다면.. 그렇게 되면 거의 한 집안식구가 되
겠지요.
중요한 것은 우리 기독인 노래일꾼들이 노래운동의 성과를 발전적으로 수용하고,
우리의 성과를 민족 민중의 노래에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운동이냐 참
세상운동이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 참노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한 길을 가고 있
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노래운동의 진지한 고민을 함께 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벗들
도 우리의 '아래신앙'을 존중하고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기독인 노래운동
지금까지 예수운동과 노래운동을 얘기한 것은 결국, 우리가 다듬어야 할 기독인 노
래운동을 잘 살펴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주장하고자 하는 기독인 노래운동은 요
컨대,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일구려는 예수운동가들이 벌여 나가는 참노래 가꾸기 운
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인 노래운동을 일구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살펴 보고,
몇 가지 과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제 얘기를 정리할까 합니다.
요사이 교회 청소년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는 [찬양과 경배] 등의 활동도 기독인
이 하는 노래운동이라 할 수 있지요. 그 헌신성과 대중성, 나름의 전문성을 인정하구
요. 그러나 이들의 활동이 대체로 '위의 신앙'을 근거로 하고 있고, 이들의 노래에서
치열한 역사현장의 예수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이 우리로 하여금 문제의식을 갖게
합니다. 우리의 노래운동은 이런 활동에 대한 안티테제로부터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한편, 참 반가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새하늘의 찬양과 새땅의 노래"를 선언한 [뜨
인돌]의 일꾼들입니다. [서울대기독인연합]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의 등장은
저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 왔습니다. 한국교회의 신앙과 노래에 절망한 나머지
'출가'하여 일반운동의 품에 안기더니, 기독인 노래운동 운운하면서 다시 '친정'으로
돌아 올지말지 하고 있는 '탕자'에게, 뜨인돌의 "가슴앓이, 예수찾기, 땀흘리기, 바
라보기"는 일종의 '회개 명령'이었습니다. 그 예리하고도 뜨거운 고백과 질타..
이들의 "시대에 민감한 찬양"에 동의합니다. "반시대적이고 반역사적인 찬양의 영
향력에 대한 안타까움"과 "이 반도의 민족적, 계급적(?) 모순이 철저히 기만된 찬양
만이 귓가에 들리는 아픔"에 공감합니다. 이 점에서 저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군요.
물론 다른점도 적지 않지만, 앞으로 함께 가는 실천의 과정에서 좀 더 가까와 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서로가 '애정어린 비판'으로 격려하면서.. "진정으로 거듭난
자로서 민중복음성가로 무장한 사회운동 지체들"은 [뜨인돌]과 같은 활동들을 넓게
포괄하면서 그 성과를 소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의 부류가 "사회운동 지체들"입니다. 기장의 [JPIC노래패], 감리교의 [고난
중창단], 각 교단 청년회와 신학대학의 노래패들.. 얼마전 장애인과 함께 하는 공연
으로 데뷔한 독창자 고상미, 노래운동 부분에서 소개한 작곡가들.. 산돌노동문화원
의 [노동자합창단]처럼 기독인 노래운동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노래패와 개인들..
이들은, 앞에서 얘기한 예수운동과 노래운동의 만남을 근거로, 기독인 노래운동의 중
요한 축을 형성해 가고 있는 일꾼들입니다. '시대에 민감한 객관적인 입장'이 아니
라, '시대 자체를 노래하는 주체적인 입장'에 서려고 애쓰는 사람들이지요.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에서 펴 낸 [민중복음성가], 젊은 노래꾼들과 목회자들이 함
께 만든 노래책 [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는 이들의 존재와 활동을 알리는데 기여했
고..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음반 [평화의 아침을 여는 이]
는 이들의 노래를 널리, 합법적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그동
안 '입과 입'(Mouth-Communication)에 의해, 주로 반지하에서 유통되던 이들의 노래
를 (일부이긴 하지만) 자본시장에 내놓는 첫 번째 시도라는 점.. 이들의 노래가 음
악적인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 등이 음반 [평화의 아침..] 출반의 역사적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인 노래운동을 일구고자 한다면, 몇 가지 과제를 피할 수 없습니다. 첫
째로, 성숙한 예수운동가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끼리 이런 노래하는 게
그냥 좋은" 사람들은 기독인 노래운동에 큰 도움이 못됩니다. "예술은 자신보다 더
중요한 그 무엇을 위해 쓰임받을 때 진실로 아름답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의 노래는 '아래신앙'(예수운동)을 터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되짚어 봐야 합니다. 하
나님나라에 대한 확신과 십자가의 희생정신으로 무장된 참신앙인만이 기독인 노래운
동을 올바로 할 수 있습니다.
예수운동을 한답시고 '교회 밖에서만' 바쁜 사람들 역시 반성해야 합니다. 예수운
동의 중요한 대상이자 주체가 바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니까요. 나아가, 우리 모
두 '현장 신학자'가 되어야 합니다. 현장에서 땀으로 쟁취한 실천의 성과들을 예수운
동의 '언어'로 고백해야 합니다. 민중현장에서 우러나오는 문예실천의 성과들을 신학
화하는 일을 연구실의 몫으로만 여겨서야 되겠습니까?
둘째로, "반시대적이고 반역사적인 찬양"을 바로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찬양의 신앙적, 음악적, 대중적, 재정적 근거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일고의 가치
도 없다"는 식의 '영양가 없는 발언'에 머물지 말고.. 무엇이 왜 문제인지, 혹시 배
울 점은 없는지를 잘 따져 봐야 합니다. 스타들의 공연장 못지 않게, 청소년들로 매
주 성황을 이루는 [찬양집회]현장에도 가 봐야 할테구요. Christian Contemporary
Music 이 뭔지, 그것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은 어떤지.. "사탄은 대중문
화를 선택했다"고 울부짖는 이유가 뭔지, 그것이 노래운동의 대중문화비판과 어떻게
다른지.. 정확히 알아야 제대로 극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세째로, 노래일꾼의 전문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대안없는 비판이나 제안은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대안을 내 놓으려면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연주(가창과 반주), 창작(작곡과 편곡), 비평(이론), 기획 중에서 적어도
한 가지의 전문성은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믿음만 가지고", "단순한 취미로" 버틸
수 있는 때가 아닙니다.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열심히 공부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음
악을 전공한 사람들이 뜻을 가지고 함께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
다. 점차로 음악전공자들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구요.
우리가 전문성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서툰 점을 없앤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래가 '음악적인 주장'을 하는 차원이지요. 연주, 창작, 비평 등 모든 면에서 우리
의 신앙과 모국어와 민중의 삶을 주장할 수 있도록 애써야 합니다. 맨날 남이 해 온
숙제를 베끼기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네째로, 우리의 노래는 기독인의 삶과 그 정서에 기반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운동이 소수에 의해 시작되는 게 보통이지만, 그 운동의 주인은 다수의 대중
이지요. 그러니까 소수의 생각과 정서를 일방적으로 다수에게 강요하는 식으로 되어
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기독인의 삶 한 가운데서 우러나오는 정서의 질감을 정직하게
담아 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실주의(Realism)는 우리노래의 미
학적 기초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독인 노래에 있어서, 민족적 어법과 민중적 내용의
획득은 '관계의 영성'과 '해방의 영성'에 근거한 현실주의에 의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뜻을 함께 하는 동지들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교회와 교단이 다
르다고, '색깔'이 약간 틀리다고, 수입에 지장이 있을까봐, 수준에서 좀 차이가 난다
고 해서 저마다 '각개약진' 한다면, 십리도 못가서 '각개격파' 당하기가 쉽습니다.
예수운동과 기독인 노래운동의 큰 뜻에 공감한다면, 연대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머
리를 맞대고 기도하고 의논하고.. 공동의 실천(행사나 프로그램)도 하고.. 합작품
도 만들고.. 그러다 보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한국교회가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우리로부터 하나되는 연습을 해야지요. 장
르의 경계를 넘어 '기독인 문화예술운동'을 모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기
독인 문화예술운동 연합'과 같은 조직은 벌써 생겼어야 하지요. 필요하다면 비기독인
과도 협력해야 하겠구요. 우리의 벗인 일반 노래일꾼들, 문예일꾼들과 말입니다. 기
독교냐 아니냐 하는 문제보다 하나님의 뜻을 '실제로' 이루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3. 맺는 이야기
맺는 이야기를 막 쓰려고 하는 지금, 문화방송 여의도 사옥에 경찰들이 난입하여
파업 중인 조합원들을 연행했다는 뉴스가 들리는군요. 젠장, 10월 28일이 아니라 지
금 당장 '구세주가 와야 할 판'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손석희씨도 구속될 것 같습
니다. 문화방송 노조의 공정방송을 향한 몸부림을 보며, 야훼를 향한 울부짖음을 들
으며.. 우리 기독인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기독인은 어떤 노래를 불러
야 할까요.
그 뿐입니까? 죽어가는 아이들을 살리고, 잘못된 교육을 바로 잡고자 일어선 전교
조와 전추위.. 참스승들이 또 쫓겨나고 있는 이 난리통에..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
진 땅에 '투쟁의 칼'이 되지는 못할 망정, '따뜻한 햇볕 한 줌'이라도 되어야 할텐
데.. '기쁘고 복된 소식'이 되어야 할텐데..
기독인 노래운동은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목적의식하는 예수운동가들이 노래를 무기
로 하여 전개하는 지속적이고도 조직적인 활동이다.. 예수운동을 '터'삼고 일반 노
래운동을 '벗'삼아야 한다.. 어렵더라도 이런저런 숙제를 해야 한다.. 겨우 요 얘
기를 하기 위해 어수선하고도 긴 수다를 떨었군요.
예수운동과 노래운동의 관점에서 기독인 노래운동을 얘기하려 했다.. 는 것이 이
얘기의 궁색한 의미일 것입니다. 어설픈 몸짓에 불과한, 맺을 수 없는, 부끄러운 얘
기였습니다. '노래하는 예수'들의 거듭되는 고민과 실천 속에서 기독인 노래운동의
'지혜와 키'가 쑥쑥 커 가기를 기도합니다.
아이고.. 정말 힘듭니다. 한 달에 두어 곡도 생산하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작곡가
라고.. 창작의 전문성 획득이 당면한 최대의 과제인데.. 여기저기 다니며 횡설수설
떠들어야지, 낑낑거리며 글도 써야지, 공연이나 문화집회를 기획 연출 진행하는 일도
심심치 않지, 상황공부도 해야지, 설겆이도 해야지, 전진하는 백수로 이땅에 살기 위
하여 돈 벌어야지.. 몸은 날로 시들어 가지, 차탈레 부인(마누라님) 생과부 만들기
쉽상이지, 요즈음은 또 컴퓨터 통신하느라 수면부족이지, 아버지는 자꾸 신대원 가라
고 그러시지, 당장의 정세는 불투명하지..
기독인 노래운동을 일군다는 게 저와 같은 몇몇 개인으로서는 참 벅찬 일입니다.
부족한 게 너무 많구요. 유능한 일꾼들이 기독인 노래운동으로 많이 진출하기를 갈망
합니다. 특히 이런 강좌는 싱싱한 비평가들이 해야지요. 깊이도 없이 말만 많은 작
곡가에게 맏긴다는 게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할 사람이 적군
요. 대중의 요구는 있으나 참노래는 빈곤하군요. 그리하여 이 연사, 다음과 같은 '이
적표현'으로 여러분께 호소하나이다.
기독인 노래운동 '고무'하고
일천만 기독인 '선동'하여
겨레(민중)의 하나님을 '찬양'하자.
찬양하자아 ~~ 찬양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