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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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L 키쇼르

여섯 시 육 분 전. 그랜드 센트럴 스테이션의 안내소 위에 걸려있는 커다랗고 둥근 벽시계가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기차 내리는 쪽에서 방금 나온 키가 크고 젊은 육군 중위가 햇볕에 그을린 얼굴을 들어 정확한 시간을 보려고 미간을 좁혔다. 그의 심장은 고동치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그것을 가눌 수가 없는 것에 놀랐다.

육 분만 있으면 지난 십삼 개월 동안 그의 삶 가운데에서 그처럼 특별한 자리를 차지했던 여인을, 비록 본 적은 없지만 그 여인이 써준 이야기들이 자신과 더불어 있으면서 어김없이 스스로를 지탱해 주었던 바로 그 여인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역직원들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 바로 뒤에서 최대한으로 안내소에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블랜포드 중위는 최악의 전투가 벌어졌던 어느 날 밤을 유별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밤, 그의 비행기는 한 떼거리의 일본 비행기에 의해 포위당했다. 그는 일본 조종사들 중에 한 사람이 기분 나쁘게 웃는 얼굴마저 보았다.

그는 언젠가 편지에서 그 여자에게 자기가 종종 두려움을 느끼노라고 적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 전투가 있기 불과 며칠전에 그는 그 여자의 답장을 받았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해요. 모든 용감한 사람들이 그렇잖아요. 데이브드 왕도 공포심을 느끼지 않았던가요? 그래서 시편 23장을 썼던 거예요. 다음번에 당신이 자신을 잃게되면 내 목소리가 당신에게 이렇게 읊어주고 있다고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렇습니다. 비록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계곡을 거닐지라도 나는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까요."

그는 또 자신이 그 여자의 목소리를 상상 속에서 들으면 그의 용기와 솜씨가 되살아나던 일을 기억했다.

이제 그는 그 여자의 진짜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여섯시 사 분 전. 그의 얼굴이 긴장되었다.

별빛처럼 휘황찬란하게 불이 밝혀진 커다란 지붕 아래로, 잿빛 거미줄 속에 엮어져 있는 색실처럼 사람들이 서둘러 걸어가고 있었다.

젊은 여자 한 명이 자기 가까이로 지나가자 블랜포드 중위는 흠칫 놀랐다. 그 여자는 윗옷 옷섶에 붉은 꽃을 꽃고 있긴 했지만, 그건 두 사람이 약속한 붉은 장미가 아니고 진홍색 스위트피였다. 거기다가 홀리스 메이넬이 자신의 나이가 서른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는데, 그 여자는 열여덟 살 정도밖엔 안 돼 보였으므로 나이로 봐서도 너무 젊은 셈이었다.

"그래서요, 그게 어떻단 말입니까?"

그가 답장에다 썼다.

"나는 서른두 살입니다."

그는 스물 아홉 살이었다.

그의 생각은 그 책 - 플로리다 훈련소에 보내진 수백 권의 육군 도서관 책 가운데서 주님께서 직접 골라서 자기 손에 쥐어준 듯 싶은 - 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굴레>였는데, 그 책에는 온통 여자의 글씨체로 주석이 달려 있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책에다 글씨를 적어 넣는 버릇을 싫어했지만, 이 주석은 달랐다, 그는 한 여인이 한 남자의 마음 속을 그처럼 부드럽고 이해심있게 꿰뚫어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여자의 이름이 장서표에 적혀 있었는데, 홀리스 메이넬 이었다.

그는 뉴욕의 전화 번호부를 구해서 그 여자의 주소를 찾아냈다. 그가 편지를 쓰자 곧 그 여자가 답장을 했다. 그 다음날, 그는 국외로 전출되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 받았다.

십삼 개월 동안 그 여자는 충실하게 답장을 보냈고, 답장을 하는 심정이 그 이상인 경우도 있었다. 그의 편지가 닿지 않아도 그 여자는 여전히 편지를 썼다. 그는 자신이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 여자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그가 아무리 사진을 보내 달라고 졸라도 들어주지 않았다. 물론 그 점은 좀 마음 상하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 여자는 변명을 했다.

"만일 당신이 내게 지니고 있는 감정이 조금이라도 진실되고 정직한 것이라면 내 용모쯤이야 중요하지 않겠죠.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해 보세요. 난 항상 당신이 단지 내 외모에 끌렸다는 느낌에 시달려야 할텐데, 그런 종류의 사랑은 정말 싫어요. 내가 못생겼다고 - 당신도 인정하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더 커요 - 생각해 보세요. 그럼 나는 당신이 단지 외롭고 나밖에 사람이 없으니까 계속해서 내게 편지를 하고 있지는 않나, 항상 그런 걱정을 해야 될 거예요. 안 되요. 사진을 달라고는 하지 마세요. 당신이 이곳 뉴욕에 오시면 날 직접 만나 보고 마음을 정하면 되니까요. 잊지 마세요. 우리 둘 다 그러고 나서 그만 사귀든지 계속 사귀든지 그건 어디까지나 자유예요. 어떤 쪽을 선택하든지 말이에요."

여섯 시 일 분 전··· . 그는 담배 한 가치를 힘주어 빨아드렸다. 그때 블랜포드의 심장이 자기가 탔던 비행기가 제일 높이 올라갔을 때보다 더 세게 고동쳤다. 젊은 여인이 자기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여자의 몸집은 길고 늘씬했으며, 금발 머리가 우아하게 생긴 귓가에서 곱슬거리며 젖혀져 있었다. 그 여자의 눈동자는 꽃처럼 투명했고, 그 여자의 모습은 봄 날씨가 사람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 같았다.

그는 그 여자가 장미꽃을 꽂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여자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 여자의 입술 위에 희미하면서도 약올리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군인 아저씨, 이쪽으로 가시는 거예요?"

그 여잔 속삭였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한걸음 더 가까이 그 여자 곁으로 다가섰다. 그때 블랜포드는 홀리스 메이넬을 발견했다.

홀리스는 얼핏 보기에도 사십살은 넘어 보였으며 잿빛 머리카락을 낡은 모자 속에 감추고 있었다. 그녀는 오동통한 정도를 넘어서 투실투실 살이 찐 발을 굽이 낮은 구두 속에 쑤셔 넣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구겨진 코트의 옷섶에다가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꽃고 있었다.

초록색 양장을 한 여인은 재빨리 걸어서 멀어지고 있었다.

초록색 여인을 쫓아가고 싶은 욕구는 너무나도 강렬했고, 그 영혼이 진실로 자신의 영혼을 범하고 지탱해 주었던 그 여인을 향한 동경심 또한 너무도 사무친 것이었다. 블랜포드는 자신이 둘로 쪼개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 순간 거기 서 있는 그 여자의 얼굴이 창백하고, 살이 오르긴 했지만 부드럽고 분별있어 보였다. 그제서야 블랜포드는 그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여자의 회색 눈동자에도 따사롭고 인정있는 빛이 깃들어 있었다.

블랜포드 중위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표시인, 파란색 가죽으로 장정된 자그마하고 낡은 <인간의 굴레>를 움켜쥐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닐지는 몰라도 무언가 고귀한, 어쩌면 사랑보다도 더 귀한 그 어떤 것 - 그때까지도 그래 왔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은혜롭게 생각해야 할 우정 같은 것이리라.

비록 말을 하는 동안에도 블랜포드는 통렬한 실망감에 목이 메었지만, 그는 넓은 어깨를 펴면서 인사를 하고 책을 여자에게 내밀었다.

"저는 존 블랜포드 중위 입니다만, 당신이 메이넬 양 이시죠? 당신께서 저를 만나 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저, 제가 저녁을 대접해도 될는지요?"

그 여자의 얼굴이 귀엽다는 듯한 미소로 환해졌다.

"젊은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구려."

그 여자가 대답했다.

"방금 지나간 초록색 옷을 입은 젊은 여자분 말이요, 그 여자분이 내게 코트에다 이 장미꽃을 달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 여자분 이야기로는 젊은이가 내게 저녁 초대를 하면 자기가 길 건너편, 저기 큰 식당에서 젊은이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 주라고 하더군. 그 여잔 이게 무슨 시험 같은 거라고 합니다. 내게도 군에 간 아들놈이 둘이나 있다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네들 일을 좀 봐줘서 나쁠 것은 없을 것 같아 이렇게 여기 서 있는 거라오."

NAMFX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