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 대한 Critical Approach
Historical-critical Mathod(source criticism, text criticism)
1) 문서설(Document Hypothesis)
구약은, 한 권(예-모세오경)이라 할지라도 단일 저작이 아니고, 한 번에 쓴 것도 아니며 여러 시대에 걸친 여러 저자의 작품이다. 왜냐하면 논리적 일관성이 없고 중복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doublet'(중복보도)는 한 사건을 두 번 이상 기록하는 형식이다.
J, E, D, P 등의 문서들로 성경을 모두 찢어내기 시작하여 현재는 그 분류들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인정하는 상태이다.
Martin Noth : 성경의 문서설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서, 한 사건이 두 가지로 기록된 것을 증명하는 확실한 근거는 'doublet' 밖에 없다.
Eissfeldt(최고의 문서설 학자) : 문서설은 확실한 fact 위에 근거한 이론이라기 보다 가설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
2) Form Criticism(양식사학 비평)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문서설의 극단화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문서설은 J, E, D, P라는 문서의 본래적 성격을 그래도 인정하여 현존하는 원문을 추적하려는 시도를 하는데 비해 양식사학은 기록된 형태 이전의 form을 추구한다.
현재의 구약 형태가 존재하기까지는 간단한 것들의 복합이 아니라 더 오래된 기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J, E, D, P 이전의 문서가 있을 수 있고 문서 이전에도 구전의 형태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pre-literary stage(문서 이전의 상태)를 인정하고 그것까지 추적하려 한다.
그런데 남아 있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사용하는데 그 방법으로 Gattungsforchung(쟝르, 형식)를 사용한다. 이 형식 연구의 근거는, 고대인들은 우리보다 훨씬 형식에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며 뿐만 아니라 종교적 영역에 있어서는 더욱 보수적이므로 더 형식에 철저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서화 이전의 형식은 보수적 성격 때문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형식과 삶의 내용(상황)은 밀접한 관계가 있으므로 현재의 삶의 내용 속에서 고대의 형식(gattung)을 추적할 수 있다 - 삶의 상황을 전제. 현존 형태 이상의 풍부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unit 안에 여러 쟝르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서로 찢어 분류(atomistic)하다보니 원문으로서의 구약 전체는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
3) Canonical Criticism(예일대의 B. S. Childs가 주장)
위의 2가지 비평은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데 비해 이들은 현존하는 정경 자체를 중요하게 받아들인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인용한 구절은 구약이었다고 하여 구약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의 근저에는 문서설과 양식비평이 전제한다. 비평의 방향만 달리하며 현재 형태의 구약에 관심을 두고 이 구약이 어떤 경로를 거쳐 이루어졌나를 연구한다. 연구의 방향은 다르지만 연구의 방법론은 변하지 않았다(Childs의 'The Crisis of Biblical Theology'를 보면 근본적으로 우리와 다르다).
* 이들 3비평의 공통점은 오늘 우리의 성경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점이다. 한 사건의 중복기록은 서로 모순된다고 하여, 그렇게 되면 양자가 모두 그릇되거나 적어도 하나는 그릇되므로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의 한 unit를 다른 새로운 문맥에 집어 넣음으로서 본래 문맥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context 변조).
성경연구의 도입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인 것이 아니다. 기록된 때에 따라 편의상 구별한 것이다. 구약을 접근하는 방식, 구약을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하다. 각자 원하는 방식이나 시각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어떻게 접근하고 바라봐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성경 자체가 성경에 대해서 여타의 책과 구별하는 것이 영감이다. 자유주의는 이 영감을 인정하지 않고 성경과 다른 책들을 구별하는 것을 포기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의 독특성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태초부터 창조, 타락, 이스라엘의 선택, 그리스도의 초림, 재림을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데, 현대는 역사관이란 역사를 보는 제 입장에서 볼 수 있는 여러 다양한 역사관이 있다는 뉘앙스를 준다. 현대신학에서는 역사의 문제와 신학의 문제가 맛물리고 있고, 역사의 의미에 따라 신학의 정립이 달라진다. 그러나 성경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공통적 견해이다. 역사에는 역사 자체와 역사 기술이 있는데 역사 기술은 결국 역사 해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요즈음 역사 해석이 중요한다고 본다. 즉, 성경은 역사를 하나님의 말씀의 실현이라고 보고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은 절대적인 역사관이다.
역사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늘과 땅의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天은 heavenly realm(허공)을 말한다. 地는 earthly realm 즉, 물리적 공간이다. 따라서 두 개의 실재 영역으로 나뉘어진다(realm of reality). 물리적 공간 즉, 인간이 사는 삶의 장은 시,공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물리적 공간 외에 또 다른 실재 영역이 있다. 그것이 heavenly realm이다. 통속적으로는 영계(靈界)라 한다. 역사란 물리적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총체를 가르쳐 역사라 한다. 이 천상의 영역과 물리적 영역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역사는 이 천상의 영역에서 시작되어 물리적 영역으로 넘어간다고 본다.
성경은 하나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물리적 영역인 시,공의 영역의 일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Docetism, 이것이 더 세련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불트만(Neo-Gnosticism)학파로서 시,공의 역사가 다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는 시,공의 물리적 공간에 뿌리를 박은 것이다. 또한 성경의 역사는 하나의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의 흐름이라고 할 때 지혜문학(시편, 잠언 등)이 포함되기 어려운 점이 있긴 하나 하나의 흐름으로 볼 수 있다.
신학의 왕은 조직신학(교의신학)이다. 그러나 모든 신학의 근거는 성경이다. 이제까지의 신학 중 가장 성경과 밀착된 것이 조직신학이었다. 성경의 진수를 체계적으로 진술해 놓은 것이 교의신학이다. 혹자는 교의신학도 시대상황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나 이러한 시대적 영향은 오히려 교의신학을 오도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특히 독일철학에서 그러하다). 독일에서는 철학의 발달의 궤와 신학의 발달의 궤를 같이 한다. 철학과 신학이 매우 밀접하여 신학에 많은 해를 끼쳤다.
성경과 가장 밀착된 것이 조직신학이지만 조직신학 속에서 성경을 더욱 가깝게 느끼기 보다는 멀리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조직신학의 용어가 성경의 용어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은 주제별로 나뉘어져 기록되어 성경의 역사성이 상실되어 있다. 즉, 조직신학은 주제별로 성경 내용을 조직화하였다. 이는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성경에 대한 사색이 들어가고 오늘의 상황에 대한 사색(refleetion)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합리적 설명을 가함).
성경은 구체적, 역사적 사건 기록이다. 교의신학은 추상적, 체계적이다. 이것이 교의신학의 약점이자 장점이다. 사건을 기록한다는 것은 사건 자체로 끝나지만 추상적이라고 함은 하나의 원리를 추출하는 것으로 다른 여러 사건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유익이 있다. 조직신학 자체가 추상적인 것은 사색을 거쳤기 때문에, 철학적 요소가 가미 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에 근거하나 시간의 제약 등의 이유로 성경의 실제기록(직접적인 내용)과 기록 속에서 원리를 추출하는 과정이 생략되었으므로 성경과 거리감 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사색을 통한 추상적, 체계적, 조직적 작업은 정도의 차이 뿐이지 모든 신학에 다 있다. 방법론의 독특성은 과거의 사건 자체 지향보다는 현재지향적이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는 주제별로 발전되어 간다.
신 론 변증가들, 삼위일체론 ↓
인간론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 ↓ 역사적으로 발전되어 옴.
기독론 이성론 논쟁 ↓
구원론 종교개혁시대 ↓
교회론 ↓
내세론 ↓
그런데 성경 자체가 신론, 인간론 등으로 구별하여 이야기하고 있는가? 성경과 교의신학에서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는 ①교의신학이 주제별로 모았기 때문이고, ②이들이 사용한 방법론이 다르기 때문이다. 교의학은 현재지향적(오늘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이고 성경은 과거 사건을 기록(그때 무엇이 일어났는가?)했기 때문이다. 조직신학이 오늘 필요한 교리, 어느 시대나 적용되는 원리 등을 추출하여 기록한 것이기에 이러한 과정에서 구체적인 역사와는 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주제별로 항목을 나누고 이에 관련된 성경 구절을 각 문맥에서 뽑아내므로 문맥 파괴가 이루어지고 유기적인 흐름이 깨어지게 된 것이다. dicta probantia = proof text(특정 교리를 증거해주는 성구들) 때문에 역사성 자체가 증발해 버린다.
이렇게 성경의 역사적 성격은 없어져 버려도 좋은 것인가? 이것에 대한 반론이 성경신학으로 나타났다. 성경의 역사성을 고수해야 한다. 즉 신학에서 꼭 회복해야 할 것으로 자유, 보수 양편 모두 주장한다.
* 성경의 역사성(Geschichtlichkeit : Historicality)
1) 성경의 역사적 성격
성경은 어떤 책이냐? 하는 것이 현대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다. B. W. Anderson의 'Exodus Typology in Second Isaiah'에서 'Allegory와 Typology는 2개의 상이한 존재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Allegory : 구체적, 역사적 시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무시간적, 영원한 어떤 것에서 참 실제를 발견하고자 함. 알레고리칼한 해석은 구체적 관심보다는 배후의 진리에 더 관심이 많다. 이러한 해석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구체적 역사는 실제적 역사의 영역이 아니고 무시간적 영원한 역사의 표면적 구체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참 실제는 구체적 역사 속에 있지 않고 실재를 초월한 것이다. 시공의 역사적 사건은 무시간적 진리의 일시적 구체화에 불과하다. Plato의 Idea에서 이러한 입장이 잘 나타난다. '현상은 영원한 이상의 묘사요 그림자이다'
Typology : 시,공에서 일어난 일은 영원한 실제와 동일하다. 역사 속에서 궁극적 실제가 표출된다 .
성경은 Anderson의 2가지 주장 중 어느 한 범주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성경이 진술한 내용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이 역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에 뿌리박은 구체적 역사요, 구체적 목표를 향해 시작과 끝을 가지고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교의신학은 이러한 역사성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의 주요한 성격을 놓치고 있다(오랫 동안 전통신학과 자유신학의 구체적 충돌이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교의신학의 그런 성격 - 성경의 역사적 상황(context)을 근거하지 않는 - 때문이었다). 만약 성경신학이 전통적인 신학의 조류였다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성격 때문에 처음부터 자유주의 신학의 짜집기 성격과 크게 충돌하였을 것이다.
2) 성경의 중심 주제와 관련된 역사성
요 5:39 - '너희가 성경(구약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눅 24:24 -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구약성경)에 나를 가르켜 기록한 모든 것...'
이런 구절들은 적어도 신약을 영감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열쇠를 제공한다. 신,구약의 근본적 통일성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이다. 신약이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한다는 것은 이견이 없지만, 구약도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한다는 것에는 자유와 보수 사이에 많은 이견이 있으며 정통 견해 중에도 그리스도의 구체적 증거에 대해서 서로 다르다.
신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인 것은 분명한데 구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하는 데에 대해서는 확연하지 않다. 구약에서는 메시야가 나오지만 그 당시의 인물을 말하고 오실 메시야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그 많은 기록들은 다 어떤 의미를 갖는가? 구약의 메시야에 대한 기록은 예수님이라는 한 인격보다는 좀더 넓은 의미에서 메시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구약의 다른 내용과는 별 상관없이 단편적으로 기술하지 않고 구약이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의 방식이 매우 포괄적이며 직접적인 방식과는 다르다.
구약의 다른 내용과 관련되어 있으며 오히려 구약 전체를 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구약의 요약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구약 전체가, 구약 전역사가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다.
흔히 구약은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신약은 그리스도를 성취했다고 한다. 신약의 많은 구절들이 '...이것은 구약의 그리스도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라고'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구약은 예언(prediction)이고 신약은 성취만으로 되었는가? 이것은 약간 주저되는 결론이다. 구약은 예언이고 신약은 성취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구절만 찾으려 한다.
이렇게 할 때 시편, 이사야, 미가 등만 찾기 때문에 역사서 등 그 외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찾지 못하여 구약의 많은 부분을 윤리적으로 해석(moralize)해 버린다. 예표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성막이나 제사, 그리고 그 외의 사건을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풀어가지만, 오히려 그 사건이 그 당시에 갖는 실제적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신약 편향적'이 된다(예언→성취의 입장).이들은 신약 저자들이 '...은 구약의 ...을 이루려함이라'고 기록한 부분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구약은 순전히 예언이고 신약은 그 성취라고 보는 것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구약에도 성취가 있으며 신약에도 예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구약은 모두 예언과 성취의 역사이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겠다. 이러한 결론은 예언 성취의 의미를 단순히 시간적 의미에서 보다도 폭넓게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① 왕하 17:22-23에 보면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말씀에 근거했고, '역사는 바로 하나님 말씀의 실현'임을 말해준다(Actualization). 모든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 말씀의 실현인 것이다. 말씀은 약속의 형태든지 예언의 형태든지 말씀의 실현은 바로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하나님 말씀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 55:11-12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한 번 나오면 반드시 구체화되고 실현된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성경 저자들의 근본적 역사관(참 역사관)은 '전 역사는 하나님 말씀의 실현이다'라고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신약 특히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이미 이런 역사 기술 방법을 이어받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언 성취를 보다 폭넓게 보면 신,구약이 모두 예언과 성취이며 말씀의 실현이다. 성경 역사를 하나님 말씀의 실현이라고 볼 때 사 55:12에는 '내 입의 말이 헛되이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했다(구속 역사와 관련).
결론 :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실현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원리들을 가르치실 때에 반드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통해 하신다. 성경의 구체적 역사성을 부인하는 입장 중 하나는 Gnosistism인데 도세틱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가현설을 주장한다. 성육신은 역사 내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성경은 항상 구체적 역사와 관련이 있다.
신,구약의 관계를 예언 성취의 관계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어법을 잘 모르는 입장이다. 그렇게 될 때 구약은 그 자체의 역사성이 약해지며 신약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② 성경은 하나님 말씀의 실현이라고 할 때(사 55:11-12) 그 의미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라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관련 구절은 암 3:6하 '하나님의 행하심이 아니고서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 7절 '하나님께서 자기 계획을 선지자에게 먼저 계시하시고 행하신다', 8절 '주께서 말씀하시면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장래사의 계획을 선지자에게 말하시고 선지자는 선포하는 것이다.
렘 23:16 거짓 선지자의 하나님께서 말씀치 않은 것에 대하여 예언한 것을 책망함.
18 참 선지자는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하여 비밀계획을 전수 받는다.
왕상 22장에는 하나님의 회의가 나옴(미가야 선지).
이사야는 하나님의 어전회의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알게 된다. 14:27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 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이는 이스라엘 뿐아니라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결정과 뜻에 따라 실현됨을 알 수 있다.
사 40장 이후에는 이방신들을 국문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너희 이방신들아 너희가 장래 일을 말해보라.' 미래사를 말한다는 것은 역사를 주관한다는 것을 뜻하므로 하나님의 그 말씀은 자신만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시 33:9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매 이루어졌다.'
이렇게 성경 역사를 하나님 말씀의 실현이라 볼 때 구약과 신약의 첫 부분으로부터 마지막까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구약도 역시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의 역사이며 의미 있고 실제적인, 하나님 그 백성의 역사이다(여기서 불트만 등은 구약을 무의미하다고 하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허상의 역사, 알맹이 없는 역사가 아니다. 구약은 '예언 모음집'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여러 곳에는 신약을 가리켜 성취의 역사라 한다. 그러므로 구약은 그 자체가 예비적 성격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러한 양자의 입장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구약은 하나님 말씀의 실현임과 동시에 구약의 예비적 성격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인가?)
결론 : 구약은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이루어지는(점진적 성격) 어떤 목표, 종국,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완성의 역사이다.
낮은 단계는 높은 단계를 내다보는 것이다. 구약 자체로서도 의미를 잃지 않고 신약에 대한 예비적 성격도 살릴 수 있다. 구약의 역사가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이 된다는 점에서 진정한 발전의 성격을 가지고있다. 신약의 '...이루려 함이라'라는 뜻의 ՐՋՇՑՏՙ(플레로오)의 뜻은 make full fill이라는 뜻이다. 이는 consummation(가득 채운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성하러 왔다고 했을 때 역시 ՐՋՇՑՏՙ를 쓰는데 그것은, 구약의 절정은 그리스도에서 성취됨을 의미한다.
③ 구속역사가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을 향해 가는 완성의 역사라고 한다면 그 목표를 향해 흘러가는 역사를 꿰뚫고 있는 일관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무엇인가?
대전제 : 성경의 중심 주제는 무엇인가?(요 5:39 성경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킴) 직접적인 대입은 지양하되 성경의 중심 주제는 예수님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야 한다.
전통적으로는 예언 성취의 관계로 신,구약을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 후로는 신,구약의 통일성을 covenant에 의해 이해하려고 했고 이 시도는 구속사의 점진성, 즉 성경계시의 역사적 성격을 드러내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계시의 여러 성격에서는 역사성과 함께 상이성(발전성)을 보이고 있다.
존 머레이는 '계약신학이야말로 구속사의 진전성을 나타내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언약'의 개념이 성경의 중심 주제를 꿰뚫는 중심사상이 될 수 있는가? 관련 구절에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뒷받침 한다(현재는 covenant에 대한 명확한 개념도 설정되어 있지 않다). 보편적인 언약의 개념은 '관계확립'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관계결속'은 다윗과 아브라함 언약에 국한될 뿐 노아에 있어서는 관계결속에 맞지 않다. 그렇다고 할 때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과의 관계확립이라고 할 수 있다('나는 너희 하나님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성경을 흐르는 하나의 핵심사상임을 부인할 수 없지만 모든 성경의 중심사상인가? 하는 것은 주저하게 된다.
이와같이 언약개념이 언약의 실제 내용을 담는 형식에 불과하거나 그 내용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서 그 내용은 어떤 더 큰 주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형식으로서의 언약은 충족되지만 그 내용까지 포괄하지 못한다. 언약이 전 구약 중심 주제에 부합되는 것에 부족하다는 것은 언약을 관계결속이라는 것으로 할 때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을 연결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언약의 개념이 구약의 전 내용을 담지 못하고 여러 가지 언약의 내용이 서로 산만하게 존재하다가 그리스도에 와서 종합됨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것은 언약들의 서로의 성격이 긴밀한 연결을 갖지 못하는 것 때문이다. 그렇다면 구약에는 일관된 중심 주제가 있는가?
그에 대한 대 전제는, 이러한 중심 주제는 신,구약이 지목하는 그리스도에 직결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이것은 신학적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에대한 구절이 바로 마태복음 1장이다. 마태복음 1장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전 구속역사의 뼈대를 보여주고, 어떻게 구속 역사를 이해할 것인지를 설명한다.
마 1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나온다.
{ՂՉՂՋՏՒ ՃՅՍՅՓՅՙՒ ԩՇՓՏՕ ԷՑՉՓՔՏՕ ......ノ}(비블로스 게네세오스 예수 크리스투...)
신약의 저자들이 표현할 때 구약의 표현을 인용하는데 70인역을 많이 참조한다.
예) 구약의 'ࠛࠅࠃࠌࠅࠛ ࠄࠌࠀ'가 모두 족보의 뜻을 가진 것은 아니고 야곱에서는 '약전'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근원, 역사라는 뜻이 더 정확하다. 족보는 어느 의미에서 가장 압축된 역사하고 할 수 있다. 족보의 확대는 바로 역사이다.
ࠛࠅࠃࠌࠅࠛ ࠄࠌࠀ는 성경의 핵심적인 표현이다. 이 말은 훨씬 복잡한 의미가 있다. 이 족보는 인류의 역사를 크게 구분짓는 분기점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데, 족보란 가장 함축된 형태의 역사이다. 인간의 존재방식의 특수성 즉, 혈통, 혈연이 연속성을 통해서 후손을 이어간다. 따라서 족보는 어떤 역사의 줄기를 시사하는데 사용되고, 역사의 근원을 항상 제시해 준다(혈통의 근원을 시사).
성경의 족보 사용례를 살펴보면 어느 근원점에서 시작된 역사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아 새롭게 시작될 때에 그 근원(새 역사)과 이전의 근원(옛 역사)과의 연속성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예) 마 1장은 예수님의 족보와 아브라함의 족보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역사 속에서 어떤 인물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때 그 역사의 근원을 미루어 살피므로 그 역사의 근원과 현재의 사건의 관련성과 연속성을 시사하기 위한 것이다. 그 역사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이 하나님의 약속은 당대로 그치지 않고 혈통을 통해서 계속 이어져 내려온다. 그러다가 이 약속이 성취되거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때, 지금 일어난 일은 특히 한 인물에게서 되어지는 일은 실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족보를 사용한다.
그 역사의 줄기, 근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계획을 의식한다(새로 시작되는 역사의 근원과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고 중심인물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따라서 어떤 혈통이나 역사의 줄기, 그리고 역사와 관련된 하나님의 계획이 그 역사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다가 어떤 인물의 생애에서 실현되려 할 때 그 인물의 족보를 기술한다. 새로운 국면, 한 segment의 시작시 '족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 관점에서 ㉠ 마 1장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된 새 역사의 근원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 아브라함과 다윗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역사를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보고 있다.
17절 아브라함 - 다 윗 / 14대
다 윗 - 바 벨 론 / 14대
바 벨 론 - 그리스도 / 14대
이 두 가지 사실을 통해 성경기자는 전 구약역사를 압축하여 설명함을 알 수 있다.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이루어지는데 이 새로운 역사는 이전의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게되고, 이 하나님의 약속이 누구로부터 주어졌는지를 밝히므로 이 새로운 역사가 이전 역사와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역사는 이전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마 1:17 이 새로운 역사 즉, 아브라함-예수까지의 이전의 역사는 크게 3부분으로 구분된다고 시사해 준다. 이 역사의 구분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로 되돌아와 본 것인데 되돌아와 보니 이전 역사와 관련이 있고 그 역사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역사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역사와 관련이 있고 이 역사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이 있었다. 따라서 창 12:1-3의 아브라함으로 돌아가 보면 잘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 근원인 아브라함의 역사를 이해하여야 한다. 아브라함의 왕국건설의 약속은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이해의 폭을 넓혀가야 하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연결되어져야 한다.
창세기(ࠛࠉࠚࠀ࠘ࠁ; Genesis)
창세기 12장은 이스라엘의 역사 즉, 교회의 역사의 시작을 다루고, 창 1-11장은 인류의 보편사이다. 12장부터의 이스라엘의 역사란 선택된 백성의 역사이다. 이를 구속사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전면에 나타나고 여타의 역사는 필요할 때마다 나타난다.
창 1-3장은 매우 압축되어 있어 이 부분을 다루면 성경전체를 다루게 된다. 그러므로 매우 방대하다. 1-3장이 이스라엘의 역사와도 연결된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아브라함부터 시작했으나 이는 셈으로 연결된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 누가복음은 아담,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 상태에수부터 시작한다. 1-3장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와 연결된다. 구속은 창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창 11장은 바벨탑 사건이다. '동방으로 이주하다가 시날 땅에서 한 평야를 발견했다. 그리고 거기서 정착해서 살았다' → 12장 1절의 땅의 주제가 11장에서도 나온다. 따라서 11장, 12장의 structure가 같다.
ࠬࠎࠚ ࠅࠁࠚࠉࠅ ࠘ࠒࠏࠚ ࠖ࠘ࠀࠁ ࠄࠒࠗࠁ ࠅࠀࠕࠍࠉࠅ ࠎࠃࠗࠍ ࠎࠒࠑࠏࠁ ࠉࠄࠉ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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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ࠀࠄࠫࠌࠊ
(11:2 와예히 베나스암 ꎺ퀘뎀 와임체우 비크아 베에레츠 쉬네아르 와에쉐부 샴)
(11:4 와요메루 하바 | 니베네-라누 이르 우믹달 웨로쇼 바샤마임 웨나아세-라누 쉠 펜-나푸츠 알-페네 콜-하아레츠)
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ࠉࠒ;이르㬉이 중요한 것이다. 탑(망대)은 ࠘ࠉࠒ의 부속물로서 짓자는 것의 주요 대상은 ࠘ࠉࠒ이다. 여기서 ࠘ࠉࠒ는 도시 보다는 국가의 의미이다. 당대는 국가의 경계가 분명한 것도 아니요 한 성을 중심으로 국가를 이룩했다. 즉 11장에서도 하나의 나라 건설을 다루고 있다.
역사 속에서 아브라함 소명 사건을 조명해 보면, 11장 바벨탑 사건과 나라 건설이라는 유사성이 있고, 한편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나라는 축복의 나라인데 다른편 11장의 나라는 그 종국이 흩어지는 결과 즉 분열과 멸망, 저주받은 나라로 끝난다.
언어의 혼잡 : 의사소통의 단절은 인류사의 분열이며 특히 그 내적분열을 의미한다. 고대사회는 농경사회이므로 땅과 유리될 수 없는 때이다. 따라서 자신의 정착지를 떠나지 않는다. 역병, 기근, 전쟁 등 목숨을 내놓는 그런 사건시만 자신의 땅을 떠나는데 따라서 정착지 땅을 떠나는 것은 저주를 뜻한다.
창 12:1-3절은 아브라함의 소명사건이다(각 사건은 전체 역사와 연관되므로 문맥은 중요시된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 시각으로 아브라함을 보았으나 창 12:1-3절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지 않는다. 성경은 구속사와 발맞추어 기록되었다).
창 12장의 key word는 다음과 같다. 11장에는
+- Land +- 지시할 땅(࠘ࠚࠀ ࠖ࠘ࠀࠄ㬉 +- 시날평지
| Nation = | 큰 민족㬈ࠌࠅࠃࠂ ࠉࠅࠂ㬉 ⇒ | 큰 성과 대
+- Blessing | 네 이름을 창대케 함 | 자기 이름
(name, 모든 +- 복의 근원이 됨 +- 저주받음
민족에게 축
복의 매개자) 지시할 땅(하아레츠 아쉐르), 큰 민족(고이 가돌)
이에 앞서 11장에는 바벨탑 사건이 나오는데 성과 대를 쌓는 일이 나온다. 그 이유는 자기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다. ࠌࠃࠂࠍࠅ ࠘ࠉࠒ ࠅࠏࠌࠫࠄࠏࠁࠏ 㬈㬔절; 니브네-라누 이르 우믹달)
이 두 가지 사건은 크게 대조되는데 둘 다 나라(왕국건설)에 관한 것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은 어떤 땅에 나라를 건설하고, 그 나라는 축복을 받고, 그 나라를 통해 만민이 복을 받는다. 11장의 사건은 자기네들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으셨다. 이것은 저주를 의미한다(땅을 떠나도록 한 것, 바벨론 포로는 하나님이 흩으신 저주의 대표적인 예). 하나는 세계 만민의 축복의 나라이고 하나는 저주의 나라이다. 왜 이런 상반된 결과를 낳는가? 여기서 서로 다른 것은 무엇인가?
12장에 나타난 동사는 하나님 1인칭으로 되어 있다. 왕국건설의 주체가 하나님이다(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왕국). 반면 11장의 동사는 사람들(1인칭 복수)이다(우리 이름을 내고 건설하자. 즉 사람이 주어인 인간의 왕국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이 2개의 unit가 공통점이 있으나 한편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축복과 저주). 이 근본적인 차이는 사람을 위한 왕국건설과 하나님이 세우신 왕국건설(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운)이라는 것이다.
인간왕국은 왜 저주로 끝나고 하나님의 왕국은 축복으로 끝나는가? 이 두 사건은 대조로 시작하여 대조로 마친다. 두 사건 모두 주제는 왕국건설이다. 그러나 아브라함(동사의 주어가 하나님,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은 축복의 왕국이고 다음은 저주의 왕국(주어가 사람, 사람의 나라)이다. 두 왕국의 건축자가 다르다. 그런데 창 12:1-3 앞에는 셈-데라의 족보가 나오고 11:1-9 앞에는 노아 후손의 족보가 나온다. 홍수 후 노아 후손의 역사는 홍수 이후의 새 인류의 역사이다. 10장에서는 홍수 이후 인류가 어떻게 세계로 흩어지는가를 나타내는데, 그 다음이 바벨탑 사건이라고 하면 홍수 이후 인류의 새로운 역사의 특성을 드러내주는 전형적인 Topical-event라 하겠다. 홍수 이후 은혜를 입은 노아 후손의 새 역사는 시날 평야에서 자기 이름들을 내기 위한 것으로 특성된다. '하늘에까지 닿는 탑'이 상징하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자세인데 이것은 하나님께 도전하고 반항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같은 상태를 흩어버리셨다. 저주하셨다. 족보의 기능은 ㉠ 지금 시작한 역사는 이전 역사의 근원으로 올라가고, ㉡ 그 역사의 근원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이 세우는 나라는 왜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는가? 창 6장의 문맥으로 살펴보자. 창 6:5에는 'ࠅࠁࠌ ࠛࠁࠚࠇࠍ ࠘ࠕࠉࠫࠌࠓ'(콜-에체르 마쉐보트 리보) 그 마음에 생겨먹은 꼴이 원래(항상) 악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간은 그 생각의 근원이 악한 것이다. 인간은 속속들이 썩었다. 완전히 썩은 상태 즉, core(핵심)까지 완전히, 또한 평생 동안 악했다. 즉, 전적 타락, 부패하여 전혀 돌이킬 수 없었던 상태이다. 이것이 홍수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창 5장에 시작된 아담의 역사로부터 악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두 쓸어버리기로 하셨는데 노아만이 은혜를 입었다.
그런데 8:22에 보면 사람의 내적, 심적 부패성은 치료되지 않은 채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약속하시며, 사람이 근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이것으로 저주하지는 않겠다고 하신다. 이것은 홍수의 근본 원인인 '사람의 악함'이 홍수 후에도 없어지지 않은 채인 것을 아시고 잠정적인 말씀을 하신 것이다. 새 인류는 그 근본부터 심판과 멸망이 자초되도록 되어 있다. 탑의 성격은 그것이 종교적인 건축물인지 어떤지는 상관 않고도 탑의 의미가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해 보겠다는 의미이다.
노아의 세 아들의 새 역사가 결국 바벨탑에서 드러나듯이 인간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나라를 세우려고 함으로써 근본적인 마음의 악이 처리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악의 표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흩어짐). 그러므로 인류의 보편역사는 저주와 심판의 역사이다. 근본적으로 악한 인간의 역사는 스스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결국 망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벨탑 사건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벌이는 어떤 노력이나 왕국은 하나님의 심판밖에 불러오지 않는다. 인간이 자기를 구원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 멸망받음을 나타내 보여준다.
창 11:10부터는 셈-데라의 족보이다. 아브라함 역사의 근원은 셈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노아의 술취한 사건과 셈의 행동을 통해서 인류의 운명이 결정되어버린다(창 9장).
9:26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라'고 노아가 셈을 축복한다. '...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최초로 나타나는데 '셈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셈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실 것이라는 것이다. covenant fomular는 '나는 네 하나님 되고 너는 내 백성'인 것인데 특별한 관계를 표현할 때 쓰인다.
홍수 이후 인류가 새롭게 시작하지만 그 역사는 망하기로 운명지어진 역사이다.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축복의 나라를 건설하시려는 위대한 큰 경륜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겠다는 약속이 12장의 약속이다. 심판과 멸망을 자초할 인류 역사와 인간 나라 속에서, 그 배경 속에서 생명과 축복을 주시는 축복의 나라를 건설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바벨탑 사건 이후에 아브라함의 새 역사가 시작되면서 셈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는 심판과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의 상태를 전제로 하고 또 다른 줄기로 셈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심판과 저주 가운데서 한 sign으로서 셈의 역사는 은혜로 이루어진다. 셈과 함께 하신 은혜의 역사는(데라로부터) 아브라함으로부터 큰 진전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셈의 약속이 구체화되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새 왕국 건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셈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것이다. 스스로 인간의 힘으로 하는 모든 노력은 멸망으로 끝남을 보이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 왕국의 건설을 선언하신 것이다(창 12:1-3).
창 12장의 아브라함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한 형태가 그 이름을 창대케 하고, 만방에 알리겠다는 것, 그리고 열방들이 그를 듣고 그를 통해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왕국 건설의 약속을 주시고 있다. 성경은 역사적 흐름을 따라 기록되었으므로 메시지를 이해함에 있어서 역사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역사적 흐름을 따라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왕국건설의 약속을 곧장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시키는 것은 성경에 대한 가난함이다. 아브라함의 왕국건설의 약속은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이해의 폭을 넓혀가야면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연결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마리아를 통해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바로 아브라함을 통해 생명의 축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서 아브라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건설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에 대한 성취이다. 아브라함의 축복의 한 형태가 그 이름을 창대케 하고 만방에 알리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방들이 그를 듣고 그를 통해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장
+- Abraham - David(구약에서의 하나님 왕국의 형성)
| David - Captivity(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한 왕국의 와해)
+- Captivity - Jesus Crist(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왕국의 재건 → 왕국의 소망)
그러므로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첫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였다(하나님 왕국의 도래). 히브리서 11장 8-9절의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친히 건설하시는 한 성, 왕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에 근거를 두고 있다. 모든 역사의 핵심은 하나님의 왕국건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건설자요,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다. 따라서 구약의 모든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결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다. 히 12:10절의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는 말은 창 12:1-3절의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대한 약속으로 봐야 한다.
참고) 폰 라드 - 성경의 중심주제는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적 역사보다도 각 시대마다 그 공동체에 있어서의 의미를 추구했기 때문에, 당시 각기 나에게 주는 의미를 따지다보면 중심 주제는 없어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역사의 일반적 흐름을 찾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개별적 역사로서 분리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전체로서 일관된 흐름의 한 가운데에서 의미를 가진다. '일관된 무엇' 곧 중심주제를 골자로 하여 형성되는 사건이다. 연속적 흐름으로서의 역사의 증거는 성경에 있어서 족보기록이다. '족보'는 과거의 사건과 현재가 연결된 의미를 주고 그 근원을 파내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주제 아래 그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내 왕국을 세우시겠다고 하신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를 '족장사'(Patriarchal History)라고 한다.
* 족장사의 구조(frame)
+- 아브라함(11:27-)
| 이 삭(25:12-)
+- 야 곱(36:1-) 이 큰 세 덩어리로 구분된다.
이 역사는 성경에서 의미심장한 뜻이 담겨 있다. 여호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으로 지칭된다. 이 3 구조는 전체로서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
* 족장사의 관심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12장) :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나라를 허락하시자 4절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갔더라'고 기록한다. 롯도 함께 간다. 함께 간 의미가 13장에 나온다. 6절 이하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고, 그 도착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온다. 세겜 땅 모레 = 가르치는 사람(종교적 점치는 자). 7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의미는 지시하신 땅이 바로 이 땅이며 이 땅을 후손에게 주겠다 하시며 이 땅에 왕국을 세우실 것을 확인하신다. 하나님 자기 나라를 세우실 땅이 바로 가나안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였다.
8절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이 말은 창 4:26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와 같은데 이것은 예배와 같은 의미이다. 부르는 것은 예배의식에서 한다. 도움을 간구한다. 예배를 드린다의 의미이다. '단을 쌓고' 대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신 곳에 단을 쌓는다. 신을 예배하는 곳에 성전을 짓고 신을 예배했다는 것이 종교적 풍습이었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 내용 자체는 옳을 수 있으나 종교적 풍습이라고 격하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사람을 만나셨다는 의미로서 이는 하나님의 임재를 전제하면서 성막이나 성전의 기능 혹은 의미를 상기시켜 준다. 그런데 8절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나타나셨고 말씀하셨으며 여기에 단을 쌓았다는 것은 다른 의미,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사 19:19 애굽에도 단을 쌓겠다 ⇒ 애굽 백성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리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라는 말씀과 관련하여 제단을 쌓은 의미를 살펴보면 이 땅은 하나님이 섬김을 받는 땅이요,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나라가 세워질 땅임을 확인하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 말씀, 계시, 교통하시며 인간의 섬김을 받으시는 곳이 바로 제단을 쌓는 곳이라는 의미라면 이 땅이 바로 하나님이 섬김을 받는 땅이요, 하나님이 다스리는 땅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실 왕국의 약속을 받은 자이다. 하나님의 왕국건설에 관련된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는 하나님 왕국의 진정의 역사이다. 창세기의 역사에서 왕국건설의 실현(예비적 성취)이 가나안 땅이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제사와 아울러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표현한다).
10절에 극심한 기근으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다. 애굽은 삼각주로서 나일강의 범람으로 아주 비옥한 땅이다. 하나님이 지시하지 않는데 애굽에 내려갔던 일은 죄로서 더 큰 죄를 짓게 된다고 종래 해석해 왔다. 아내를 이용하여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며 애굽 왕에게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한 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시했는지 않했는지 기록이 안나왔지만 지시했을 수도 있고, 기근 때문에 내려갔을 수 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성경의 모든 사건을 도덕화하는 것을 moralize한다고 한다. 선악으로 모든 사건을 구분하려 하는 것이다. 이 사건을 moralize할 수 있다. 그 근거가 있다. 그러나 기근으로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간 것은 탐욕 때문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단순하게 moralize할 수 없다. 저자가 그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저자의 기록의 목적, 그리고 저자의 관심이 아브라함이 선한가 악한가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셨다. 즉 그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약속받은 자와 사라를 보호하셨다에 point가 있다.
하나님이 사라를 보호하심에 주된 관심이 있었다(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룰 즉 아브라함의 후손을 낳을 사라를 보호하셨다). 즉 하나님이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이루심이다. 물론 아브라함의 행위가 책망받을 만한 것이었다는 것은 바로의 책망을 통해서 볼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도덕적 차원의 문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아브라함과 함께 사라도 약속을 받은 자(bearer of promise)이다. 그들을 바로로부터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 : 약속 자체에 대해 신실하심을 보여주신다.
13장 애굽에서 귀환한 것이 먼저 기록된다. 아브라함의 윤리적 경건의 상태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하나님이 지키시고 부를 소유하여 돌아오게 하셨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것인가?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바로 앞에 수치를 당한 것, 애매한 사람이 고통을 당한 것 등이 나오는 것을 보아서 성경이 그런 의도가 아닌 것을 보여준다.
애굽에서 돌아온 후 부유해진다. 땅이 협소하여 롯과 아브라함이 함께 거할 수 없게 된다. 지금 아브라함과 롯이 살고 있는 땅은 목축하는 곳으로 물이 굉장히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땅이 협소하였다는 말은 땅이 좁다는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고 샘과 초지가 목축업에 필요한데 이런 것이 부족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요단 들은 물이 넉넉하고 애굽처럼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이라고 말한다. 11절까지는 롯의 잘못을 볼 수 없다. 12절에 롯이 장막을 옮겨 소돔에까지 이르른다. 그런데 소돔은 악하여 큰 죄인의 성이다. 사람들이 악함에도 불구하고 그 죄의 성에까지 이르며 성이 악함에도 불구하고 그 성이 있는 지역을 택한 것은 롯의 동기가 선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땅의 악함의 접촉에도 불구하고 탐욕적으로 그 땅을 선택했다면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떠날 때의 그 동기도 외적 영광, 인간적인 동기로 떠난 것은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롯의 신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불순한 요소와 피상적인데가 그의 신앙에 있지 않았나 보여진다.
어떤 동기와 상황에서 되었든 간에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 결별의 의미가 무엇인가?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아브라함과 롯이 분리한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축복하신다. 여기서 떠난 후라고 못박은 것이 중요하다. 그 뒤에 그 의미가 나온다. 떠난 후 하나님이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하신다. 이것은 12장에서 하신 약속을 확인시키심이다. 그 약속이 롯과 헤어진 후에 확인되었다는 것은 롯이 그 축복의 약속에서 제외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 족장사에 있어서 주된 관심은 누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 땅을 상속할 것인가? 이다. 그 땅의 상속은 그 나라의 상속이요, 그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 롯의 사건을 통해서 역사적 흐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이 땅까지 왔으나 그러나 롯은 이 땅의 약속에서 떨어져 나갔다. 롯이 이 약속에서 떨어져 나간 것의 의미는 족장사에서 밝혀진다. 그러면 무엇이 이 땅을 소유하게,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 이어 16절에는 땅의 약속뿐 아니라 셀 수 없을 만큼 후손을 주겠다하심. 너를 통해 큰 민족, 큰 나라를 이루겠다는 약속이 다른 형태를 취한 것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믿음을 가진 자, 믿음의 족속의 조상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위의 약속을 전제로하여 이 약속을 의식하여 한 말이다.
종횡으로 행하여 보라는 말은 이 땅을 네 발로 밟으면서 이 땅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땅인 것을 체험해보라는 말이다. 비록 네가 지금은 나그네로 다니지만 먼 미래에 하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것을 믿음으로 확인하며 살라는 의미이다.
14장의 등장 인물은 ① 시날(메소포다미아의 바벨론 = 이라크)왕 아므라벨(ࠌࠓ࠘ࠍࠀ;아므라펠 㬝 Hammurabi), 보수주의 입장에서는 아브라함이 Hammurabi와 같은 시대로 추정하며 동일인물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ࠌ(라메드;'鱁'발음이 남)자가 빠져서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시날왕은 강력한 나라의 왕이다. ② 엘라살왕 아리옥 = 이 사람은 정확치가 않다. ③ 엘람왕 그돌라오멜 = 페르시아(이란 동쪽)의 큰 세력으로 추측, ④ 고임(ࠉࠅࠂ(고이)의 복수, 민족의 복수로서 고유명사인지 소국가의 연합체인지 확실하지 않다)왕 디달(헷족속 = 지금의 터어키로서 애굽과 세력을 다투던 큰 세력이다. 애굽과 형제의 조약을 맺음). 이상의 왕과 요단 서편의 5개의 소왕국(소돔왕, 고모라왕, 아드마왕, 스보임왕 등)과의 싸움이 일어난다.
거대한 제국들 더구나 연합제국들이 이 작은 성들을 왜 쳐들어 왔겠는가? 더구나 아브라함이 318인으로 구해온 것이 가능한가? 동화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12년 동안 속국으로 지배를 받다가 13년에 이 다섯 왕들이 배반한다. 속국이 배반하자 연합하여 쳐들어 온 것이다. 성경을 볼 때 아마 다섯 왕만 배반한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전 지역에 해당하는 상당히 광범위한 지역이 연합하여 함께 배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반란의 범위가 상당히 컸기 때문에 제국이 연합하여 침략했다는 것이 가능하다.
14:13에서 아브라함이 단, 호바까지 가서 롯과 재물을 찾아온다. 침공한 열강 대제국들이 아브라함의 318인에게 패퇴한다. 열강에 대한 아브라함의 승리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집안은 너로 인하여 큰 자손을 이루겠다는 약속의 집안이다. 그러므로 당시 아브라함의 집안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미래 역사의 전개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⑴ 아브라함의 왕국에 대한 태도와 행위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태도와 같다. 아브라함에 대한 대적은 하나님에 대한 대적이다. 아브라함에 대항하는 나라는 다 심판과 멸망으로 끝난다.
⑵ 하나님이 이미 창 12:1-3에 약속하신 나라가 이루어지기 시작함을 나타내며,
⑶ 하나님의 나라가 매우 강성한 것을 표현해 준다. 즉 세상 세력이 그 앞에서 전혀 무력함을 보여주신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아무도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창세로부터 시작된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아야 한다. 인류의 유일한 소망인 하나님의 나라의 약속을 지닌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도착했고 하나님은 가나안이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땅이라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이 땅이 하나님을 섬기는 땅이 될 것을 체험하게 된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 결별하는 것은 심각한 의미를 가지며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이 땅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어질 것라는 의미를 갖는다.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이제는 자연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의 성취가 그의 삶 속에서 서서히 이미 진행된 상태였기 때문에 항시 아브라함과 그 가족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려 318명을 데리고 가서 4대 강대국 연합국을 물리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강할 것과 어떤 다른 나라도 하나님 나라를 대적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즉 창 12:1-3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이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하리라'(ࠎࠚ ࠌࠅࠃࠂ; 가돌 샴, 4대 강대국이 아브라함에게 무릎을 꿇는다). * Hammurabi법전 Second colum 6절에 함무라비가 주변의 모든 세력을 무찌르므로 바벨론의 이름을 존귀케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가간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한다는 의미가 나라와 나라의 싸움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17절에 아브라함을 맞이하는 사람이 2명이다. 이 둘의 태도가 매우 대조적이다. 살렘왕 멜기세덱 : ①살렘(예루살렘)의 왕, ②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Priestly-King, 신정일치시대의 제사장 겸 왕인 인물, ③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히 7:3).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신비스러운 인물이다.
* 멜기세덱에 대한 견해
1.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는 표현은 바로 특별한 사람이다라는 견해, 그래서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이는 신비스럽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가? 아니다.
2. 구약의 제사장은 다 혈통을 따라 제사장이 되었다. 멜기세덱은 혈통에 따라 된 제사장이 아니다.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 아비, 어미가 없는 인물이 아니라 레위족속, 즉 레위 혈통이 아니라 다른 혈통인데도 불구하고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이다. 왕직과 제사장직을 겸한 인물(제사장적 왕)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런 분이므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한 것이다.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에게 나아온다. 아브라함에게 정치적으로 구출해준 것에 대한 감사로 영접하러 나온 것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으나 여기서는 예루살렘의 왕으로 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직분으로 아브라함에게 나왔다. 당시 제사장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축복을 선언, 전달하는 자였다. 그래서 멜기세덱은 직분에 걸맞게 아브라함에게 나아와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선언한다. 이러한 축복은 아브라함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복 받은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선언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대적을 아브라함에게 붙이신 사건 즉 아브라함의 승리를 하나님 허락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았고, 이로 인해 아브라함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본 것이다. 즉 창 12:1-3의 약속의 성취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아브라함의 위치는 하나님께 복 받은자요, 만민에게 복받게 할 근원인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바친다. 승리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며 이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승리, 영광, 명예, 이 사건을 통해 그가 획득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의미로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의 제사장, 하나님의 축복의 대리자로 멜기세덱을 인정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으나 멜기세덱에게 바친 것이다.
21절의 소돔왕의 태도 : 전혀 멜기세덱과 상반된 태도이다. 냉냉하고 사무적이었다. 진정한 감사의 마음이 아니라 상업적인 동기로 왔다. 구출해 준 것에 대한 상대방의 공로를 최소한 답례로 최대의 이익을 보려는 상업적인 동기로 나왔다. 소돔왕의 동기가 선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물건은 가지고 사람은 돌려달라' 아브라함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승리, 축복에 대해 감사하지 않고 냉냉한 소돔왕으로부터 아브라함은 어떤 물건도 받기를 거절한다.
아브라함은 왜 물건 받기를 거절하였는가? 아브라함은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대변하는 자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인간적인 것으로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이므로,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일깨움을 받아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자가 마치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손으로 이루어주었다고 착각할까봐서 단호히 도움을 거부하고 있다.
내가 너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기 원치 않는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와 함께 간 사람들에 대해서는 보상해주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 나라의 입장을 분명히 밝힌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도움으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와 같이 간 사람은 세상 방법에 따라 세상의 가치 만큼 보상해 주라고 한다. 소돔왕은 불쌍한 자이다. 만민 속에 찾아온 하나님의 나라를 그러한 태도로 대하는 것은 자신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축복을 차버리는 태도이다. 아브라함을 대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나뉘어진다. 예로서 멜기세덱과 소돔왕을 들 수 있다. 이 둘의 상반된 태도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15장은 세계 열강에 대한 승리를 염두에 두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신다. 세계 열강과의 싸움 속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방패요, 상급이 되심을 확신해 주신다. 2절에 아브라함은 다른 태도 보인다. 나는 자식없이 죽어갑니다. 'ࠉ࠘ࠉ࠘ࠒ ࠋࠌࠅࠄ'(홀렉 아리리)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잘은 모르나 85세 이전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85세 때에 하갈을 취하기 때문이다. 85세가 되어서도 소식이 없자 하나님께 질문 or 항변한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는 늙은이로서의 한탄하는 것인가?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국에 그가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그가 하나님께 무엇을 주시려나이까?하는 것은 하나님 약속의 땅에 대한 상속자의 관심이다. 나의 상속자 엘리에셀이 나의 후계가 될까요? 묻는 것에서 볼 수 있게 된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볼 때는 하나님 나라의 대변자요,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받은 자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 자녀가 없는 것을 한탄함이라기 보다는 나에게 자녀가 없으므로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온 인류에게 복을 줄 하나님의 나라를 이을 자가 되겠는가 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염려로 묻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자녀가 없으므로 엘리에셀을 통해서라도 이 나라를 이어가시겠는가?라고 묻는다. 하나님 나라 건설의 막중한 사명의 안타까움이 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하나님은 아니다. 분명히 네 몸에서 날 자(ࠋࠉࠒࠍࠍ;밈메에카㬌 친자식)가, 네 몸에서 난 친자식이라야 네 후손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을 데리고 나가 하늘을 보고 별을 보여주시며 이 뭇 별처럼 후손을 많게 하시리라 말씀하신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자 그가 믿었다. 이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여기서 의로 여기셨다는 것은 후손을 뭇 별처럼 많아지게 하겠다는 단순히 그 사실을 믿은 것이 아니라 나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 던져 넣겠다는 보다 깊은 의미이다. 믿음이란 자기 부정이다. 단순히 어떤 사실을 믿는다는 의미보다 그분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고 그분 안에 나의 모든 것을 던져 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신자의 기본자세를 한 마디로 믿음이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믿음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믿음은 가볍고 값싼 것이 아니다. 믿음은 내 생명, 내 생애를 그의 손에 맡기고 그의 뜻대로 살기로 하는 것이다.
'나는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이때 내가 무엇으로 이 땅을, 하나님 나라를 상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지 확실한 표적을 아브라함이 요구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징표를 구한다. 아브라함이 깊은 잠이 들었는데 어두움이 임하고 심히 두려워한다. 엄위하시고, 크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임재하심을 보여준다. 이 하나님의 영광 앞에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보여준다. 즉 출애굽 사건을 이미 예견하고 계신다. 아브라함이 죽어 평안히 조상에게 돌아갈 것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의 Project는 아브라함 당대에 단기간에 걸쳐 이루어질 일이 아니요, 장기간에 걸쳐, 여러 세대 몇 백년에 걸쳐 진행될 장기적 계획이다. 4 Generation에 걸쳐 애굽에서 돌아올 것이다. 400년 동안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그 후에 돌아와 하나님 왕국이 건설될 것이다.
당시 근동지방은 매우 타락한 곳이었다. 왜 이렇게 극악하고 타락한 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 하는가? 이런 극심한 타락한 곳에서 악을 제거하고 여기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쪼개진 짐승 사이로 불이 지나간다(하나님 현현의 상징). 이것은 covenant (making ceremory)이다. 횃불이 지나갔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나가심이다. 당시 언약의식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신 앞에서 고기를 쪼개고 고기 사이를 지나간다. '만약 이 언약을 지키지 않을찐대 네가 이 쪼개진 짐승처럼 될 것이다'는 것이다. 이것은 즉 내가 나의 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내가 이 고기처럼 쪼개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심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처럼 극적, 감동적으로 나타낸 곳은 없다. 하나님 스스로 저주를 짊어지심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확약하신 후 하나님 나라의 지경과 경계를 말씀하신다. 흔들거리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 굳게 하신다. 하나님 왕국건설의 구체적 계획의 진행을 말씀하신다.
16장에는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초조하여 하갈을 첩으로 준다(여종의 자식을 통해 대를 이음). 하갈이 잉태하자 사라를 멸시한다. 당시 여주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면 그 여종으로 하여금 자녀를 낳게 한다. 아이를 낳아도 여주인과 종의 주종관계는 엄격히 지켜진다. 사라가 하갈을 학대하고, 하갈은 도망간다. 7절에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난다. 여주인에게 복종하라. 하나님께서 사라와 하갈의 주종관계를 확정시키신다. 이 사실은 이 두 사람에게서 태어날 두 자녀의 관계도 확정됨을 의미한다. 이 두 자녀의 관계는 종과 자유자의 관계이다(갈 4:21-31). 그가 모든 형제의 맞은 편(동방)에 살리라. 이것은 서로 적대적 관계를 가지게 될 것을 암시한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
17장에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친자식일뿐 아니라 사라의 몸에서 태어난 자라야 상속자라고 말씀하신다. 이삭을 이스마엘이 희롱하자 사라가 이스마엘을 쫓아내려 할 때 아브라함은 불쾌히 생각한다(당시 풍습으로는 쫓아낼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을 들으라 하신다. 즉 상속자는 이삭이며, 이스마엘은 상속자에게서 제외된다.
{야곱과 에서}
같은 아버지, 어머니, 형, 아우도 없는 쌍둥이인데 이미 태중에서 상속자가 결정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데에는 육적인 조건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아브라함의 자녀 이삭에 있어서도 '약속을 따라 난 자'이기에 된 것이다. 내년 이맘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에 따라 난 자,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이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 외에는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방법이 없다. 이것을 가장 잘 극명하게 표현해 주는 것이 야곱과 에서이다. 그들이 어떤 선이나 악을 행하기 전에, 즉 육적인 것이나 윤리적인 어떤 행한 것이 조건이 되지 못함을 보이면서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으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결정된다. ② 갈 4:29에서 이삭은 성령을 따라 태어난 자요, 이스마엘은 육적으로 육신을 따라 태어난 자라고 한다. 이삭은 영적으로 성령을 따라 태어난 자이기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이다(요 3:5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17장은 15, 16장의 문제를 종결짓는다. 15장에서 후계자, 상속자 문제를 아브라함이 염려하면서 누가 아브라함의 약속의 상속자가 될 것인가를 걱정하고, 엘리에셀인가를 묻자,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날 자라고 말한다. 16장에서 사라가 하갈을 통해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를 희망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에서 날 자라고 말하신다. 즉 이스마엘은 진정한 약속의 상속자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7장은 할례와 관련하여 상속자의 문제를 종결하신다. 100세에 아들을 낳을 것을 알리기 위해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ࠅࠉࠌࠀ ࠘ࠍࠀࠉࠅ ࠎ࠘ࠁࠀ [ࠃࠉ]ࠑࠫࠌࠀ ࠄࠅࠄࠉ ࠀ࠘ࠉࠅ ࠎࠉࠏࠚ ࠒࠚࠛࠅ ࠄࠏࠚ ࠎࠉࠒࠚࠛࠫࠐࠁ ࠎ࠘ࠁࠀ ࠉࠄࠉࠅ 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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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와예히 아브람 벤-티슈임 샤나 웨테샤 샤님 와예라 아도나이 엘-아브람 와요메르 엘라우 아니-엘 샤다이 히트할렉 레파나이 웨흐예 타밈)
(17:2 웨엣테나 베리티 베니 우베네카 웨아르베 오트카 비므오드 메오드)
여기서 1절의 ࠋࠌࠄࠛࠄ(히트할렉)는 ՐՅՑՉՐՁՔՅՙ(페리파테오)로서 walk, 살아간다, 삶을 의미한다. 그리고 2절에 언약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언약이라는 말은 의식을 뜻하는데 이는 할례이다. 17장에 하나님께서 또 언약을 세우신다 : 할례의 언약. 할례의 의미는 ࠛࠉ࠘ࠁ ࠛࠅࠀ(오트 베리트)로서 11절 언약의 sign이다. 그 언약의 내용은 내 앞에서 온전할지니라(1절). 15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손(상속자)을 주실 것이며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이 땅을 유업으로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이 땅을 준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준다는 의미이다. 이 언약의 징표는 바로 15장의 약속의 내용의 징표이다. 즉 하나님 나라, 이 땅에 대한 것과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또한 저주를 받은 세상에서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는 이 할례 받은 자들에 의해서 세워질 것이며, 이 할례 받은 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것의 징표가 될 것이다. 언약의 핵심적 본질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이다. 할례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너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은혜로운 약속의 표시이나, 1절에 보면 다른 내용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 살아야 할 모습으로 살라고 한다. 15장은 무조건적 언약(은혜), 하나님 편의 언약이라면 17장은 은혜를 받은 자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아브라함 편의 언약인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는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 백성의 반응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온전할 것이다.
언약의 이러한 이중적 면에 대해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고, 은혜를 받은 자가 해야할 것의 이 이중적인 면이 언약에 항상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시내산 언약도 출애굽 사건을 전제로 한다. 즉 출애굽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이에 대한 하나님 백성의 응답으로 시내산 언약을 주신 것이다. 따라서 시내산 언약이나 아브라함의 언약이나 본질적으로 같다.
할례와 더불어 또 다른 의미가 덧붙여진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름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름은 그 사람됨, 본질을 의미하므로 이름을 바꾸는 것은 그가 가진 의미의 변화 즉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말한다. 할례는 신약에서 세례와 비교되는데 세례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생명의 탄생, 즉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할례 역시 새로운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새로운 신분을 의미한다. 15-17절은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고 사라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웃는다. 이는 아브라함이 연약해서 흔들리기도 하고 시험을 받기도 하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믿음의 정도보다 믿음의 질(quality)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므로 아브라함이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할례의 의미는 은혜받은 자로서의 당연한 삶을 담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2장은 그 의미를 밝혀주고 있다. 바로 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할례는 영에 할지니'(성례=새마음), ՃՑՁՌՌՁ(그람마; 의문) ↔ ՐՍՅՕՌՁ(프뉴마; 성령).
+- 15장 - 하나님 편의 Commitment(언약) → 쪼갠 고기
+- 17장 - 아브라함 편의 Commitment(언약) → 할례
* 할례는 언약의 표징 : 이것은 생식기 절단의 뜻을 가진다. 언약을 파기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당시 이방에서 행해지던 관습이라고 보고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성경의 내용과 당시 이방관습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이 있다.
약속의 자녀는 사라의 몸에서 난 자이다. 사라 = 열국의 어미, 로마서 9장과 갈라디아서에서는 이삭이 약속과 성령을 따라 출생했다고 기록한다(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자). 결국 이스마엘은 약속을 따라 난 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난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난 것이다. 야곱도 에서를 젖히고 약속의 상속자가 된다.
이스마엘에 관해서도 네 기도를 들었고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주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겠다하심. 그러나 사라가 낳을 이삭과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하신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의 상속자로 이삭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상속자라 했을 때 이 언약의 상속자, 즉 하나님이 이삭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겠다는 특별한 의미의 상속자이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나 이삭은 특별한 의미의 언약의 상속자라는 말이다.
{이삭의 출생의 의미}
갈 4:21-31,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논하면서,
구약 - 육적인 차원 -+
신약 - 영적인 차원 -+ 의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이것은 구약에서 영적인 구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며 그러나 육적 질서 속에서 주어진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이삭과 이스마엘의 신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갈 4:28에서 이삭을 따라 난 자는 약속의 자녀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라고 말한다.
+- 이스마엘 - 육적으로 태어난 자
+- 이 삭 - 성령을 따라 태어난 자
너희도 이삭을 따라 태어난 약속의 자녀, 즉 이삭의 출생과 관련된 원리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는 의미이다.
요 3:1절 이하에는 이삭이 태어난 경위, 출생의 원리를 신약의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큰 관련이 있는 것으로 말한다. 성령의 중생 사역에 관해 '바람이 임의로 불매...' 즉, 성령님의 주권적 역사라는 것이다. 그 바람의 소리를 듣는 것은 중생을 아는 것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거룩한 감동을 감지하는가?
하나님 나라는 출생부터 성령으로 시작하고 성령으로 인도 받으며, 성령으로 썩을 것까지 영화롭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성령을 모르고 성령으로 인도를 받는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는가? 영적 현상이 일어난다고 해서 다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없다. 영을 다 믿지 말라(요일 4장). 방언 등의 역사가 있는 것도 사실이나 거의 대부분 요즈음의 영적 역사들은 거짓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이것도 모르는가? 이 말은 니고데모에게만 적용되는가? 나 자신에게도 적용해 봐야 한다.
17장에서 언약의 의미 즉 하나님의 백성됨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히신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을 할례로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이 나라의 진정한 상속자가 내년 이맘 때에 태어날 것을 예고하는 데 그는 '약속을 따라 난 자'이다. 약속의 내용은 무엇인가? '내년 이맘 때 아들을 낳으리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정하심에 의해서 태어날 자요, 자연적 출생이 불가능할 때 이루어진 출생이요,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출생이다. 이것을 신약에서 '성령으로 난 자'라고 설명한다. 약속의 자녀의 출생 예고와 이삭의 출생 사이에 일어난 일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사건이다.
아브라함과 관련해서 아들이 태어날 것을 17장에서 말한다면 18장에서는 사라와 관련해서 아들이 태어날 것을 말씀하신다. 10-15절에는 여호와께서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경수도 끊어지고(자연적 출생의 불가능을 사라가 말함), 하나님께는 이런 일이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없다(이삭의 이적적 출생을 예고). 인간적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삭이 태어날 것이다.
창 18:16-20:18의 내용은 이삭의 출생의 context에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이삭 출생의 의미를 밝히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세상의 축복을 위한 대언자(=intercessor)로서 이삭에 의한 하나님 나라는 세계 전체를 위한 나라라는 것을 암시한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된 세상의 표본으로서 이를 심판하시려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셨다는 것이 소돔과 고모라 사건의 의미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너무 심해서 하나님이 내려가셨다. 즉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셨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약속의 자녀를 예고한 후 세상의 심판을 묘사하는 사건이 나타나는 것은 약속의 자녀의 탄생 의미를 밝혀주는 것이다. 이는 창 11장 이하와 창 12:1-3의 내용의 비교대조의 그 구조가 그대로 나타난다. 즉 창 11장의 세상의 극악한 타락과 그것을 배경으로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는 것을 12장에 묘사해 주는 구조로 창 18:16-20:18의 내용이 이삭의 출생 사건의 context 속에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아브라함을 부르신 의미와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이 유익하다.
알다 = 선택의 의미이다. 이 선택의 의미는 의와 공의를 지켜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하기 위해서이다. 의와 공의 =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이루는 것과 같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시는 방법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것은 이 나라로 하여금 세상 나라가 복을 얻고, 의와 공의를 행함으로 이와같은 일을 이루시겠다. 악한 세상 가운데 의와 공의를 행하는 나라로서 이 세상에 복을 전달하는 일을 이루겠다. 사회 정의 정도가 아니라 더욱 근본적인 차원에서 의와 정의이다. 이는 우리의 선한 행실, 윤리적으로 깨끗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전달한다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된다. 하나님 앞에서 또는 전세계에 대해서 세상에 하나님 축복을 전달하는 매개자로서 이와같은 위치를 가진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기대(요구)하신 것이 무엇인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중보자의 역할, 이것은 아브라함이 롯을 위해 기도하는 혈족주의자로 보는 자유주의와는 다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다스리시는데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 의인을 위하여 진노의 심판을 늦추어 달라는 간절한 기도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기도를 기억하신 것은 혈족에 대한 아브라함의 기도가 아니라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실 수 없다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기도를 기억하셨다는 말이다.
20장은 새로운일이 벌어진다. 4절에 의로운 자도 멸하시려 하십니까?에서 여기서 의로운 자는 이 일에 있어서 불순한 동기가 아니고 잘못됨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 때 일은 애굽에 내려간 일과 유사점도 있고, 틀린 점도 있다. 이 블레셋에서의 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다윗에 가서도 블레셋은 멸망받지 않고 계속 싸움을 했으며 이삭 때에는 블레셋과 약속을 맺는데 이것은 블레셋이 약속의 땅과 계속 관련을 갖는다. 여기에 언급되는 사건들이 후일에 이스라엘 역사와 깊은 관련을 갖게되는 사건들을 예시하는 것들이다.
21장에서 이삭이 태어난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관계는 불편해지고 이스마엘을 쫓아내라는 사라의 말은 당시 관습에서 온당치 못한 일이어서 아브라함이 망설이며 근심하나 하나님이 사라의 말을 들으라 하셨다. 사라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진 의미는 아브라함의 상속은 육적인 상속이라기보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의 상속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혈연적인 무엇이 개입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이 쫓겨난다. 인간적, 육적, 혈연적인 것이 여기 상속에는 전혀 개입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이루어짐을 밝히는 것이다.
22장은 그 일 후에 하나님께 아브라함이 시험을 받았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것'으로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곳이다. 이는 윤리적 살인행위가 종교적 경건의 극치로 보는 것으로 이것이 어떻게 조화가 가능한가? 키에르 케고르의 [Fear and trambling]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여기에는 하나의 단절이 있다. 이 단절을 신앙과 인식에까지 적용하고 있다. 유대인 랍비들도 이 문제를 고민하였다. 22장의 시험은 아브라함의 생애를 마감하는 대단원이라 할 수 있다. 성경 진술이 23, 24, 25장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죽음, 이삭과 리브가의 이야기로서 세대교체를 보여주는 것을 보면 이 시험은 아브라함의 생애의 절정 or 대단원, 아브라함의 생애를 마감하는 대단원이라 할 수 있다. 22장의 이 사건의 성격을 나타내주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ࠄࠑࠏ(나사) 㬝 시험이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에 있어 하나의 시험이었다. 이 시험의 구체적 형태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다. 22:2의 번제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에서 번제의 의미를 정확히, 분명히 나타낸 곳은 없다. 문맥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는 구절은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22장 번제에 빛을 던져주는 말씀이 창 22:12절이다. 하나님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셨을 때 하나님이 진정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ࠋࠃࠉࠇࠉ(예히데카) = ՌՏՍՏՃՅՍՇՒ(모노게네스; 요한일서에서 독생자)
네가 사랑하는,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을 취하여 번제로 드리라. 이것은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 목숨과 같은(보다 귀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라. 가장 사랑하는 그것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않고 바쳐라. 이것은 철저하고도 온전한 헌신을 하나님께서는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 남겨놓은 부분이 없이 전체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바치라는 의미이다. 번제 = 전체를 몽땅 태워버림.
신약의 부자 청년에게 너의 가장 중요한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부자 청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재물이었다. 세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인데 삭개오는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할 줄 알았다.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나?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어떤 존재였는가? '네가 사랑하는 아들'. 아브라함이 육정적인 애정으로 이삭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이삭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서의 이삭이다. 앞으로 건설하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갈 사람이다. 육정적 애정과 집착의 대상으로서의 이삭의 포기가 아니었다. 믿음과 소망의 유일한 토대로서의 이삭이었다. 따라서 이삭의 포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전체를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전체의 삶을 바쳐서 지켜왔던 믿음과 소망에 대한 포기였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네게 이 땅을 주고 네 자손으로 큰 백성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믿는 삶이었다. 이러한 요구는 자신의 삶 전체를 바치게 했던 믿음과 소망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하나님 약속의 포기였다. 이 시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부정하고 불신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믿음, 소망, 경건의 삶 전체가 결부된 그리고 신앙적 차원의 흐름 속에서 볼 때 아브라함에게 가장 크고 심각한 시험이었다.
이것에 대한 근거로 히 11장을 들 수 있다. 약속을 받은 자인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명령이 주어진다. 이삭을 통해 네 후손이 번성하리라. 이삭을 통해 약속이 성취되리라는(이루어져 갈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명령이었다. 다 주어놓고 다 무효화시키는 하나님이라는 의심쪽으로 갔다면 하나님의 불신실하심의 근거가 되는 명령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아브라함의 반응은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를 준비하고 모리아산으로 간다. 번제의 장작을 준비하고 이삭을 죽이려 한다. 아브라함은 범인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만 주어진 아브라함의 독특한 위치를 생각하여 독특하게 주어진 시험으로 본다. 이삭 대신 양을 죽임으로 하나님께서는 인신제사를 원치 않으심을 보여주신다. 오히려 인신제사 드리는 것을 원치 않으심을 반대로 보여주신다. 성경은 인신제사를 가증한 죄악으로 여긴다.
히브리서, 야고보서에서도 이 사건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혹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로 죽이려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오해했다고 말한다. 번제는 전체를 드리는 것임을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험의 의도는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아브라함이 몰랐다고 말한다. 번제의 진정한 의미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제사가 아니라 좀더 높은 차원의 의미였는데 그것을 아브라함이 몰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좀 단순한 생각이라고 본다. 22장을 자세히 보면 아브라함이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산에 올라갔던 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니었다고 본다. 아브라함이 어떤 믿음의 자세로 올라가서 칼을 잡고 죽이려 했을까? 이에 대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이삭과 아브라함의 대화이다.
ࠄ࠙ࠄ ࠅࠌ ࠄࠀ࠘ࠉ ࠎࠉࠄࠌࠀ(엘로힘 이르에 로 하세)에서 열쇠는 ࠄࠀ࠘(라아)의 inpf. 이다.
God will see for him sheep
= God will take care of it
= 하나님께서 그 일을 처리하실 것이다. 준비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조처가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도 살리실 수 있는 능력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었다고 히브리서에 있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일부이지 아브라함의 믿음의 전체를 표현하는 내용은 아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은 더욱 포괄적이고 넓은 것일 것이다. 이 구절은 이제까지 성경해석자를 당황케한 구절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살려내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겠지만 단순히 이 믿음만으로 아들을 죽이려고 칼을 잡았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욱 포괄적이고 넓은 내용이 아니었을까?
하나님께서 마련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에 그대로 응답하셔서 이삭을 죽이지 말라 하시고 수양을 마련하셨다. 성경 기자도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수양을 마련하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ࠄࠀ࠘ࠉ(이르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수양을 보았다.
이는 ࠄࠀ࠘ࠉ와 같은 맥락에서 대비시킬 수 있다.
아브라함이 이 장소를 여호와 이레 = 여호와께서 보신다(살피신다).
= 하나님이 준비하신다. 마련하셨다.
즉 수양을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으로 본다.
14절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 모리아산 = 시온산
여호와의 산에서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임재하셔서) 마련하시리라.
* 여호와께서 임재하셔서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산의 의미.
모리아산이 +- 성전이 세워질 곳
↓ | 양들이 대대로 희생되기 위해 키워지는 곳
↓ +-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죽게 될 곳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려 돌아가신 사건까지 연결되고 있다.
16절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케 하신 양을 마련하시고 양이 대신 죽은 의미는 무엇인가? 아브라함이 자기 독자도 아끼지 않고, 하나도 남김없이 전체를 바치는 아브라함의 헌신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친아들을 인간의 죄를 위해 희생케 하실 것을 예표하는 것과 연결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독자라도 아낌없이 바친 사건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피흘려 죽게하심을 유발시켰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칼을 손에 잡음으로 이삭을 드린 것이요, 그의 믿음의 헌신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야고보서에서 아브라함의 행위에 의해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한다. 야고보서는 믿음의 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진정한 의미를 말하려는 것이다. 믿음은 죽은 믿음도 있다. 산 믿음도 있다. 믿음은 생명이므로 생명의 열매인 행위가 반드시 따른다. 아브라함의 헌신은 믿음을 증명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처럼 남김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간 처럼 하나님 말에 숨기운 것도 없이, 자신의 전부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으므로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바친다는 믿음의 헌신을 보여준 것이다.
ࠉࠏࠍࠍ ࠋࠃࠉࠄࠉ ࠛࠊࠚࠄ㬈= spare) ࠀࠌ(로 하사크타 예히데카 밈메니)
자신의 것으로 남겨둔 것(움켜쥔 것) 없이 하나님께 전부를 바쳤다. 창세기 22장은 할례 언약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행한 경건한 헌신의 삶의 절정이요, 헌신의 믿음을 증명해 보이는 사건이다. 이 시험 후에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의 경건을 확인한 삶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살피시리라는 믿음이다. 이삭 대신 양을 마련하신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내 아들 내 기뻐하는 아들' :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아브라함의 독자=이삭, 하나님의 독생자=예수 그리스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은 철저한 자기 헌신이요, 자기 부정의 의미라면 자신의 모든 것 전체를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바친 것이다. 이삭은 나를 위해 남겨질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바쳐야할 존재이다. 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바쳐져야 할 존재 대신 양이 바쳐졌다는 것의 의미는 이삭이 바쳐졌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진정한 상속자, 하나님 나라의 헌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삭이 하나님 나라 상속자의 완전한 실체가 아니라 완전한 상속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한다. 이삭이 아니라 완전한 상속자가 따로 있다. 기다려야 함을 말한다.
번제 속에 번제가 속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한 이삭이 그 속죄를 이룰 수 없었다. 이삭 대신 양을 잡게 하신 것은 이삭이 속죄에 있어서 NO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온전한 속죄를 위한 번제에 있어서는 양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YES가 된다. 즉 인신제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심과 통한다. 이삭 자신은 죄인으로 죽어야 할 자라면 양이 대신 죽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는 것이다. 후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표적인(암시적인) 사건으로 봤을 때 너무나 풍부한 의미를 갖는다.
믿음은 곧 헌신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공로(merit)가 아니다. 믿음은 자기 부정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이다. 자기를 부정하고 모든 가능성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이다. 자기의 모든 의와 가능성을 부인하며 자신의 생명의 가능성을 하나님께로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은 공짜로, 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그에게 던지는 것으로 내가 그의 것이 되어 그의 것을 누리는 것이다. 믿음 자체가 헌신을 포함한다. 믿음 자체가 헌신을 내포하고 있다. 믿음의 성격이 행동으로, 헌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경건도 하나의 믿음이요, 헌신이다. 공로가 아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마련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헌신 한 것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 족장사에 나타나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고찰
족장시대 계시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특징적인 형태는 '여호와의 사자', 또는 '하나님의 사자'를 통한 계시이다. 창세기 16:7, 22:11,15, 24:7,40, 31:11, 48:16(창 32:24ff과 관련하여 호세아 12:4 또한 참조하라) 등에 그 언급이 있다.
이 모든 경우에 특수성은, 한편으로는 사자가 스스로 여호와와는 구별(distinguish)된 것으로 말하여 여호와를 3인칭으로 언급하나, 또 한편으로는 같은 문맥에서 하나님을 1인칭을 사용해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현상에 대해서 여러 설명들이 주어졌다. 설명하자면, 두 비판적인 견해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㬷㭌㭍(말락)이란 말을 추상명사인 사명(embassy or mission)으로 번역하여 여호와께서 비인격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보내셨다(Jehovah despatched from Himself after an impersonal fashion) 라고 하자고 제의한다. 이런 개념은 시내(Sinai)에 거하시는 여호와께서는 인격적으로 그곳을 떠날 수 없으시고, 다만 그의 백성이 가나안으로 가는 여행로와 그 거룩한 땅에서 사는 동안 동행하기를 원하시어, 그가 인격적인 임재(personal presence)로서 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 자신으로부터 일종의 힘(influence)을 보내실 수 있다는 고대적인 신앙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그 개념은 적어도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랜 것이다.
둘째 견해로서는, 사자의 형성을 하나님을 높이는 후기 유대사상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원래의 옛 이야기들이 하나님께 연관시키고 있듯이, 지상의 피조물과 하나님께서 그렇게 깊고 밀접하게 연관되고, 교제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맞지 않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들은 이런 반이신론적인 관점에서 다시 쓰여졌는데, 이런 종류의 모든 특징과 행동들은 천사계층의 중재에 의해 수행되고 나타나는 것으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자는 아주 후기의 기원을 가지고 있는데, 여호와에 대한 이신론적인 사고의 형성만큼이나 늦은 것이다.
이 두 이론 모두 같은 근거에서 반박될 수 있다. 그것은, 만일 이런 현상이 시내로부터의 부동성을 견지하기 위해서나, 피조물과의 교섭의 부적절성에 의한 것이었다면, 작가나 편수자들은 그 반대현상이 나타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틀리지 않게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인즉, 사자에 의한 고상한 형태의 계시와 함께 이전에 사라졌어야 할 신현들이 계속해서 기사들 가운데 발견되고 있다. 그런 인물의 형성을 한 교정의 성격을 지닌 것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그 외에도 둘째 이론에서는 '여호와의 그 사자'(the Angel of Jehovah) 대신에 '여호와의 사자들'(an Angel of Jehovah)이란 말을 기대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고유명사 앞에서 선행하는 명사는 한정적이기 마련이라는, 환언하면 비록 그런 의도를 가졌다 할지라도, '여호와의 사자'는 부정관사를 붙어 쓸 수 없다는 반론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다. 히브리말에는 '여호와의 사자(들)'이란 관용어귀가 있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사자(Angel)와 여호와 사이에 전치사 㭌(라메드)를 삽입하는 것이다 - 여호와에의 사자(an Angel to Jehovah). 그러나 만일 문제가 하나님과의 피조물의 거리를 유지하는데 있었다면 그 때에는 그 사자가 여호와처럼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소기의 목적을 흐리게 하는 것이 되겠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두 견해 중에서 하나는 하나님과 사자의 차이를, 또 다른 하나는 그 동일성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이냐 하는 데에 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해석은 하나 뿐이다. 즉, 이 두 표상 뒤에는 신성의 참 계시가 있다는 것이다(Behind the twofold representation there lies a real manifoldness in the inner life of the Deity). 만일 이 보내신 사자가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Himself partaker of Godhead)이라면,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도, 동시에 하나님으로서도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며, 그 두 경우 모두가 참인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삼위일체라 부르는 것 중에 많은 것이 비실재적이며 환상적인 것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것으로부터 이런 계시방식의 정확한 목적이 삼위일체의 진리를 계시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실재적인 것은 그것 없이 일어날 수 없으나, 여기서는 일단 다른 진리를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랬다가 오랜 후에 이 간접적인 방법으로 이 사자로서의 신현(Angel theophanies)이 삼위일체를 계실하게 될 수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처음 나타났을 때는 이를 알 수 없음은, 그 당시의 최고의 목적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식에 하나님의 단일성을 확고히 해주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일찍 삼위신을 계시하는 것은 다신론에의 유혹이 될 가능성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오랫 동안 메시야의 신성과 성령의 인격성은 다소간 뒷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즉 삼위일체의 계시가 아니었다면, 이 새로운 계시양식의 도입 목적은 무엇인가? 그 목적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고, 또 하나는 아주 새로운 것이다. 전자로서는 '성례전적인 것'(the sacramental)을, 후자로서는 '영적인 목적'(the spiritualizing intent)을 뜻한다. '성례전적인 목적'이란, 하나님께서 가장 그의 의도가 잘 드러나는 방법으로, 그들과 함께 하심을 확신케 하기 위해 당신의 백성에게 가까이 하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이 성례전적인 의도는 처음부터의 모든 신현에도 있었던 것이다. 즉, 이런 의도의 신현이 여호와의 사자의 출현을 통해서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출현이 없었다면 또 하나의 원칙, 즉 신성의 영적 성질의 원칙을 모호하게 하는 옛 방식 속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니시고, 먹고 마실 때, 육체적인 방법(bodily fashion)으로 말씀하시고 들으시며,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마치 하나님의 본성의 당연한 귀결인양 생각하기가 쉬운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것은 당신의 본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고, 다만 당신 편에서 스스로 성례전적으로 낮추신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육체적인 방법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하나님의 영적 성질이 그 배후에 있음 또한 필연적인 것이다. 이것이 사자가 하나님으로서 말하는 것 배후의 것을 전달하는데서 성취된다. 즉, 그 사자는 연약성과 제한을 지닌 사람을 만나시는 하나님의 오든 낮추심을 체현한 분이며, 동시에 그런 물질적인 방식으로 뵈옵거나 받을 수 없는, 그 사자가 3인칭으로 언급하는 바로 그 하나님의 또 다른 분(aspect)으로서 계시는 분이신 것이다. 하나님과 당신의 사자 사이의 이 업무분담에서 이 신현의 불가결한 핵심이 살아난다. 이 영적인 의도는 저 성례전적인 것을 돕는 것이다. 이 사자는 참 신이심에 분명한 것이, 만일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확신하게 되는 성례전적인 기능을 담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만남의 필요는 하나님의 본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 그것도 주로 죄된 본성이 이를 필요로 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성육신에서 이 기본적 뜻의 최고의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성육신은 하나님 편에서의 본래적인 필요의 결과가 아니다. 이에 반하는 것은 그것이 많은 이의 지지를 받는다 해도 범신론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구속을 필요로 하는 우리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포함한 전체 성육신은 하나의 큰 구속의 성례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의 성질(인성, 인간성을 말함)을 위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영성(spirituality, 신성이라해도 좋음)을 신자들에게 말하기 위한 특별한 배려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원칙은 요한복음 1:18절에서 그 고전적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사자출현의 전체 사실이 처음부터 구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구속의 중요한 일의 수행이 그에게 부여되어야 함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언약이 체결된 직후에 드디어 그가 등장한다(창 16:7). 델리취는 이를 잘 파악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사자) 출현들의 목표와 궁극 목적은 그 시작에서 판단될 수 있다" 모세 시대에 그 언약의 수행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자에게 맡겨져 있음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는 특별히 이 언약과 밀접히 관련된 자들의 삶과 사역을 보호하신다. 야곱은 말하기를(창 48:15f)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라고 하였다. 또한 말라기 3:1절의 "언약의 사자"를 참고하라. 그 성질로서 뿐만 아니라 그 기능에 있어서도 여호와의 사자는 일반 천사들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그 사자는 잠시 동안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가는, 다시 나타날 때까지는 다시 형체를 갖지 않는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서 나타난다. 사자가 구약시대에는 계속해서 그런 동일한 출현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출현되는 곳에서의 형태의 다양성(variableness)과는 모순되는 생각이다. 이것은 물론 항상 하나님이신 신성의 둘째 위가 형태를 띠고 나타나신 성육신의 선취일 수 있다(요 1:14). 그러나 영원 전부터 이 위는 자신에게 적합한 육체적인 형태를 가지고 계셨다는 생각은 더 큰 오류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성과 맞지 않고, 사자를 통한 계시가 원래 의도한 바를 봉쇄하는 오해를 일으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주 제기되는 질문으로서 이 사자는 피조되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는 위(the Person)와 출현 모습을 명확히 구분함으로 충분히 대답할 수 있다. 만일 위에서 시사한대로 사자 개념이 신성 자체의 차이를 지시할 수 있다면, 즉 그 사자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예상형(또는 선취형, prefiguration)이라면, 그 계시에 나타난 위(Person)는 분명히 피조된 분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반면, 사자란 말로서, 이 위(Preson)가 취하신 표현 형태를 지시하는 것이라면, 사자는 피조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즉, 그리스도의 신적 위(Divine Person)는 피조될 수 없는 것이다. 신성과 피조성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인성에 관한 한, 예수는 피조된 것이다. 그와 사자 사이의 차이점이 있다면, 구약엔 피조된 형태가 단명하지만 성육신의 경우엔 영원하다는 것 뿐이다.
모세시대에 있어서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첫 언급은 출애굽기 3:2절에서, 그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났을 때이다. 그와 하나님이 동일시 됨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떨기나무 불꽃 중에서 불러내셨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다음으로는 출 14:19절에서 그가 이스라엘 진 앞서 행하다가 구름기둥과 함께 뒤쪽으로 옮겼다는 기록에서 그에의 언급을 볼 수 있다. 23:20,21절에서는 그에 대한 공식적인 약속이 주어진다. 그는 이스라엘과 동행하게 될 것이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이 구절의 전체 구조는 바록 본문에 사자(an angel)라고만 되어 있어도 단지 일반적인 천사로만 생각할 수 없게 한다. 70인경의 '내 사자'라는 독법에서 원래 히브리말이 이 형태(접미사와 함께)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사자의 기능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포괄적인 것임을 이 구절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이다. 또 그에 대하여 죄를 짓는다는 말로부터 그가 하나님과 동일시 됨을 배울 수 있다. 반면 출애굽기 32:34절에서는 '내 사자'(my angel), 출애굽기 33:2절에서는 '한 사자'(one angel)란 언급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상황이 이를 요청하는 것이다. 즉, 사자를 보냄은 여호와 당신께서 백성과 함께 가실 것이란 원래의 약속의 철회로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 33:3-5).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를 보냄은 여호와 자신이 동행하심과 다르지 않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원래의 약속대로 함께 하시리라는 다른 제안은 모세의 간곡한 청원이 있고서야 나타나기 때문이다 - "내가 친히 가리니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출 33:14).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의 역사에서도 나타난다(민 22장). 여기서 그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발락의 도모를 좌절시키시는 것이다. 이는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하는 그의 일반적 사역을 나타내는 구체적인 예이다(민 20:16 참조).
22:20-24장은 리브가의 이야기를 다룬다. 리브가에게 많은 양의 지면을 할애한다. 이 본문에서 중요한 말은 브두엘이 리브가를 낳았다는 것이다. 23장에 들어오면 사라의 죽음이 나온다. 여기서는 여자 상속자 문제의 세대교체를 중요하게 보여준다. 사라의 죽음은 리브가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사라의 후계자는 리브가이다. 창 12-22장까지는 남자 쪽의 후계자 문제를 다룬다면 창 22:20-24장까지는 여자 쪽의 후계자 문제를 다룬다. 리브가에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녀의 차이가 천국에서는 전혀 없다. 창조 질서 속에 존재하는 동안에는 그 원칙을 순종해야 하나 원칙적으로는 남녀의 차별이 없다.
이삭은 남자 쪽 즉 아브라함의 후손일뿐 아니라 여자 쪽 즉 사라의 후손이어야 했다. 사라도 특별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다. 사라의 죽음과 리브가의 등장은 영적인 계보를 매우 중시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모계를 통한 신앙의 순수성의 강조가 부계 쪽 만큼 중시되고 있다.
23장 사라의 죽음은 리브가 시대의 등장을 예고한다. 사라의 죽음과 함께 약속의 땅에서 장지를 마련한다. 장지 구입의 과정에서 아브라함에게 헷족속이 말한다.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세상 속에서의 아브라함의 삶의 quality를 보여준다. 즉 아브라함은 복음의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외인의 선한 증거, 하나님 나라 밖의 사람의 증거를 통해 아브라함의 경건한 삶과 아브라함의 헌신과 믿음이 참됨을 증거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방인 가운데 살면서도 그들에게 덕과 은혜를 끼친 아브라함의 경건한 삶은 중요한 것이다. 장지 구입의 세세한 사항이 기록된 것은 이 땅은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못박기 위해 세세한 과정을 다 묘사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돈을 다 지불하고 장지를 구입한 것은 장지에 대한 끈질긴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 아브라함이 장지에 대해 끈질긴 관심을 가졌을까? 이 장지 마련은 단순히 무덤 마련이 아니고 약속의 땅에 마련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야곱도, 요셉도 이 땅에 묻히기를 원했다. 장지에 대한 애착은 바로 이 장지가 약속의 땅에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 약속의 땅에 묻히기를 원했나? 이곳이 내 삶이 뿌리박은 터전이요, 나는 이곳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그네로 방랑했는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묻힌다는 소망이요, 하나님 나라의 약속은 죽음과 더불어 해소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고 죽음 후에도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만이 아니라 언젠가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담는 것이다.
24장에는 아브라함이 종에게 이삭의 아내 구하기를 명한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인 며느리 얻기를 거부한다. 이 사실은 아브라함의 진정한 의도는 가나안에의 동화를 거부한 것이다.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이 몸담고 살던 땅이고 그 삶의 터전이요, 가나안인은 접촉하며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아브라함의 운명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멸망받기로 결정된 사람들이었다. 즉 가나안인과 결혼을 거부한 것은 함께 사는 사람들이었으나 그들과 혈연을 맺음으로 그들을 집안에 끌어 들이는 것으로 그들의 타락한 종교와 생활에 오염될 것을 염려하였다. 결혼을 하는 것은 육체적 결합만이 아니요, 정신적, 내적 교류를 의미하고 성경에서는 가장 깊고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관계라고 말한다. 그래서 '한 몸'이 된다고 말했다.
가나안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 선언 아래 저주와 멸망의 백성이다. 아직 죄악이 관영치 않았기 때문에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창 18장)는 심판 받는 것의 예표이다. 비록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했지만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과 판단을 아브라함이 소홀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세상 사람들에게 축복을 전할 사람의 위치와 사명, 멸망해가는 사람들에 대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지만 아브라함이 그 세상 속에 뛰어들어 산 것은 아니다. 그들과 한 통속이 된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의 사명과 위치는 분명히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가나안인 며느리 얻기를 거부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상호배반적,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지나 그렇지 않다. 세상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소유해야할 자세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소유하고 세상에 전달해야할 존재이나 분명히 망해가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이 며느리 얻기 위해 동족에게 가라고 했다. 왜 동족에게 가라고 했나? 아브라함은 혈족주의자인가? 이유가 종교적으로 그들이 가나안인 보다는 덜 타락했기 때문이거나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더 우월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동족에게서 며느리를 취함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결단을 하게 함으로서 신앙의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리브가가 본토, 아비, 친척의 집을 버리고 약속의 땅, 약속의 가정(Abraham's house)에 속하도록 지금 막 결단하여 떠나라 했을 때 리브가가 흔쾌히 떠난다. 만일 그 여자가 나오기 원치 않으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절대로 본토, 친척 땅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한다. 즉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불요불굴의 신앙과 헌신을 뜻한다. 아브라함이 여호와께서 순적히 하실 것임으로 가라고 말한다.
cf) 환도뼈 : 인간의 생식기관을 둘러싸고 있는 부분, 인간의 vitality,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 풍속, 습관들이 민족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르므로 성경 속에 있는 사건들과 함부로 연관시켜서는 안된다. 성경이 말하는 확실한 윤곽과 테두리를 잡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게 좋다.
아브라함이 후계자, 아내 선택을 여호와께 맡겼다는 것은 여자 상속자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약속 정하심과 하나님의 선택에 맡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며느리의 선택의 모든 진행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것이다. 종이 그 지역에 도착하자 마자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과정을 간섭하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택이 리브가의 자원하는 심정, 하나님께 헌신하고자 하는 신앙고백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자원하는 심정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경우와 똑같은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신다. 리브가도 아브라함과 똑같은 결단에 직면한 것이다. 리브가 자신이 본토,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는 신앙의 결단을 요구받았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그리스도가 세우시는 교회 안에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다. 남자에게만 신앙의 결단을 요구하고, 여자는 부수적으로 남자를 따라가는 것 아니다. 남녀 모두에게 신앙의 결단이 요구된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한 몸 되는 것, 한 권속이 되는 것은 신앙의 동질성이다. 물론 이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의 선택이 있으나 인간 편에서의 이 신앙의 동질성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 리브가를 사라의 장막에 모셔들인다. 이것은 사라의 후계자로 리브가를 맞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25장은 아브라함의 세대를 마감한다. 즉 아브라함의 죽음이 나온다.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나 모든 유산은 이삭에게 준다. 아브라함의 진정한 상속자는 이삭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처의 자녀를 이삭에게서 즉, 약속의 땅(가나안)에서 멀리 떠나게 한다. 이것은 이삭의 상속권을 강조한 것으로 그들을 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서 떠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상속은 단지 재산 상속이 아니요, 가나안 땅의 상속이다. 그리고 상속의 핵심은 아브라함의 축복이다.
ࠐࠉࠍࠒࠫࠌࠀ ࠔࠑࠀࠉࠅ(=gatter; 와예아굜 엘-세데) 이 말은 그의 백성에게로 들어갔다(모아졌다).
그가 열조와 함께 잠들었다는 표현이 열왕기에 있고,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다는 표현은 이삭, 야곱, 요셉, 모세와 아론에게까지 나타나고 있다. 창 17장에 보면 '할례받지 아니한 자마다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했고, 창 17장은 할례의 언약을 의미하는데 그 백성은 바로 언약의 공동체이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언약이고 그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백성에게로 들어갔다는 것은 의미가 더 깊다. ①죽음이 끝이 아니다. ②죽음 후의 일을 말한다. 죽음을 가리켜 그 언약 공동체 백성에게로 들어간다고 했다. 이는 죽음 후의 일이며 죽음 후에도 끊쳐지지 않고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죽음 후의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히브서에서 '하늘의 도성'이라 했다.
25:17에서 이스마엘도 그랬다 한다. 이스마엘은 약속의 상속을 상실하고 쫓겨난 자였으나 이 기록을 보면 이스마엘이 개인적으로는 구원 받았다는 것을 말한다. 이스마엘도 할례받게 했다. 즉 이스마엘도 이 언약에 속한 자라는 의미이다. 즉 상속자의 의미에서 상속은 개인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것과는 다른 독특한 의미이다. 아브라함 → 이삭 → 야곱의 선택으로 이어지는 line은 이스라엘의 선택으로 이어지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선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선택 즉, 상속자로서의 선택이 구원의 차원으로 동일시 하면, 롯이라든가 아브라함 집의 할례받은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상속의 의미는 개인의 구원의 차원도 있으나 이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족장사를 통한 상속자의 의미는 특수하다.
25:12에 보면 약속에서 떨어져 나간 이들을 먼저 언급한 후에 약속의 자녀를 언급한다. 19절은 이삭의 후예를 언급한다. 이삭의 역사가 시작되자 말자 후계자 문제가 또 언급된다. 아브라함의 후계자 이삭의 출생의 특성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주권적인 정하심에 따라 난 출생이다.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라 후계자가 정해진 사건이 야곱, 에서의 사건에서는 더욱 극명히 나타난다.
이삭과 더불어 이스마엘이 상속자의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종의 자녀요, 이복형제, 외적 자격으로는 이삭과 차이 많았다. 그러나 야곱, 에서에 와서는 문제가 더 분명해진다. 한 어머니의 아들로 동복이요, 쌍둥이였다. 그리고 태어난 후 결정한다면 외적으로 상속자를 정할 수 있겠다 하겠으나 이미 뱃속에 있을 때 정해진다. 누가 더 상속자가 될만한가를 정할 수 있는 외적 조건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신다. '선악을 알기 전에' 즉, 후계자의 선택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 따른 것이다. 이삭에서보다 야곱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더욱 극명히 나타난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극명히 드러난 야곱의 선택에서 또한 인간의 자발적인 참여의 요소도 현저히 나타난다. 야곱의 경우는 이삭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선택을 극명히 보여줌과 동시에 또한 야곱 스스로의 원함과 노력을 수반함도 야곱의 경우에서 더욱 뚜렷이 보여진다. 25:31절에서 야곱은 상속권 얻기를 소원했고, 열망했고, 자원하여 노력함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동시에 인간이 스스로 원하고 자원하여 열심과 노력으로 이를 얻으려는 것이 같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 실제로 행해지려 할 때 인간의 자유와 책임과 형식이 무시되지 않고 인간의 책임과 행동, 자원함이 함께 나타난다. 신앙의 책임과 불순종의 유기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유기로 말할 때 동시에 로마서에서 이야기 한다.
야곱이 당사자이다. 그 자신이 하나님의 약속의 계획 속에 invalve되었음을 확인해 준다. 기근이 들었을 때 내려가지 말고 머물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소망하고 이 약속의 소망에 흔들리지 말고 서있으라 하신다.
26장 이삭이 기근들어 그랄로 내려간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간 사건과 비교하고 있다. 성경은 이 사건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야곱은 요셉이 청할 때 아들을 보고 싶으나 애굽에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 하신다. 한 편 애굽에 내려가는 것을 부정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후에 내려가라 하심으로(아직 때가 안되었기는 하나) 알 수 있으나 그러나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타당하다.
27장에서 야곱의 교활함이 나온다. 이러한 교활함은 25:31절에서 야곱은 상속권 얻기를 소원했고, 열망했고, 자원하여 노력함에서 볼 수 있다. 아버지를 속여서라도 상속권을 얻으려 한다. 아마도 리브가가 상속권을 야곱이 받을 것이라고 계속 말해주었을지도 모른다. 야곱이 상속권을 얻으려 한 동기 자체는 나무랄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를 속여서라도 상속을 얻으려 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을 때 그것을 인간 편에서 이루어보려는 노력을 정당한 노력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불효로 봐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야곱과 에서의 축복의 내용
야곱은 형제를 다스리는 자 -+ 로 축복의 핵심은 상속이었으나 그 내용은 매우
다른 형제는 야곱을 섬기는 자 -+ earthly한 축복이었다.
그러나 28:4절을 보면 상속문제는 아브라함의 축복으로서 이 왕국이 만민의 축복을 위한 것으로 이 왕국은 earthly kingdom이 아니고 따라서 이삭의 축복 내용, 부요한 축복은 상징적인 것이다. 야곱이 이삭의 축복을 받을 때 그 내용은 종과 주인의 관계를 말하는데 이는 상속의 의미에서 중요하다.
28장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곳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고 한다. 성전 = 지상과 하늘의 통로, 만남의 의미이다. 이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을 재확인해 주신다. 땅에서부터 하늘로 탑을 쌓아 올라가는 것 = 바벨탑적 성향이나 하늘에서부터 땅을 향해 세워있는 것 = 사다리.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게 내려온 것만 의미가 있다. 성전 휘장이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가실 때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다.
30장은 여러 복잡한 경로를 통해 야곱이 두 아내, 두 여종을 통해 이스라엘의 12지파는 야곱의 12아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을 보여준다. 족장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택의 역사는 끝난다. 즉 선택이 확정된다. 야곱이 원하는 것은 인간적인 재주를 부려서라도 소유하고 마는 것을 보여주는 생활이 바로 밧담 아람의 생활이었다.
야곱이 아내들에게 가나안 땅으로 갈 것을 묻는다. 이 역시 리브가에게 묻는 신앙적 결단과 같다. 신앙의 동질성을 하나님께서 철저히 요구하심이 나타난다. 이어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온다. 에서가 두려워 인간적 실수로 대비한다.
32장은 야곱이 천사와 다투는데 무엇을 위한 투쟁인가? 즉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한 투쟁이다. 하나님의 약속한 땅에 들어 가는데 에서에게서의 두려움과 그 밖의 인도, 보호, 약속의 땅에서의 축복을 구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형과 아버지를 속일뿐 아니라 하나님과도 싸우겠다는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집요한 열심이다. 여기서 보면 야곱은 자기의 힘으로 싸웠다. 환도뼈 =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의 능력, 생식력.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적인 노력과 열심으로, 능력으로 얻을 수 없음을 가르쳐 주심이다. 야곱이 다리를 절었다. 이는 하나님 앞의 패배이다. 낮아진 자의 모습이다. 자연인 야곱의 패배는 신앙인 야곱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계속해서 36장까지는 야곱의 선택이 그의 생애에서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될 열두 아들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언급한다. 자기의 힘으로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려는 야곱의 모습이 철저히 부숴져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한다. 하나님께 은혜를 철저히 구한 자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칭호를 얻는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는 하나님과 싸워서 인간의 힘이 승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께 패배함으로 하나님께서 승리하신 자라는 뜻이다.
이상에서 볼 때 족장사의 총관심사는 "누가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는 상속자가 될 것인가?"이다. 아브라함과 함께 동일한 약속을 함께 받은 자. 족장사에 있어 그리고 이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 왕국의 상속자가 될 성격이 많이 나타난다.
아브라함 → 부르심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한 자.
이 삭 →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따라 난 자(약속, 성령을 따라 난 자, 자연적 출생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이스마엘은 제외되어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그두라의 자식들도 가나안 밖으로 떨어져 나간다. *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과 동일 =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야 곱 →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됨(창 25:23). 상속자로 정해진 때는 태중에 있을 때부터 이다. 태어나기 전에 이미 선택이 되어졌다. 그들이 선악을 알기 전에 먼저 선택하고 부르셔서, 믿게하셔서 하나님 왕국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이므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난다.
이러한 선택의 역사는 야곱에게 와서 종결된다. 야곱 = 이스라엘, 그에게 있어 12 아들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다. 야곱이 선택된 것은 그 이름 이스라엘이 선택된 것이다. 하나님 왕국의 상속자는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37장 2절에는 야곱의 약전이 나온다. ࠁࠗࠒࠉ ࠛࠅࠃࠌࠅࠛ ࠄࠌࠀ(엘레 톨르도트 이야콥)
= 역사라는 의미(계보, 세계)
약전은 야곱의 생애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단순하지 않다. 이제까지 야곱의 이야기를 다하고 나서 마치 이제부터가 야곱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야곱의 약전은 이러하니라'고 표현하고 있다.
* 창 25:19 ࠗࠇࠕࠉ ࠛࠅࠃࠌࠅࠛ ࠄࠌࠀ(엘레 톨르도트 이츠큺) 이삭의 이야기가 18, 19, 22, 23, 24장에 이미 중요한 생애에 대해 다 나왔는데 25장에 와서 이삭의 약전을 말한다. 그리고 35장에서 이삭의 죽음과 아브라함의 죽음을 언급하고 37장에 와서는 에서와 이스마엘을 언급하며, 37장에 와서 야곱의 약전과 이삭의 약전을 기록한다. 우리는 족장사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아브라함 싸이클과 이삭 싸이클, 야곱 싸이클로 나눌 수 있다. 아버지가 죽기까지는 아들의 역사가 아버지의 역사에 다 속하고 아버지가 죽는 것으로 그 세대가 다 마감된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아들의 이야기가 다 아버지의 이름 하에 기록되는 것이다.
37장에 넘어오는 이제서야 야곱의 아버지가 죽고 그의 시대가 되어 그가 상속자가 되고, 그가 지배자가 되며, 그의 시대가 된다. 진정한 의미의 야곱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표현하므로 '야곱의 약전은 이러하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야곱의 약전을 말하고 요셉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후의 일이 요셉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나오나 창세기 기자는 어디까지나 이 부분을 야곱의 역사로 취급한다. 그리고 창세기는 야곱의 죽음으로 끝난다.
* 요셉(창 37장에서 시작됨) : 야곱의 약전으로 시작된다. 아비가 살아 있을 때의 자식들의 역사는 아비의 약전에 속한다. 야곱의 역사는 하나님 왕국의 상속자로서의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실제로는 요셉 한 개인의 역사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개인의 성공에서 나타난 의미는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이다. 요셉의 역사를 시작하면서 야곱의 역사로 표현했다는 것은 요셉의 역사를 어떤 시각으로 봐야할 것인가를 말해준다. 야곱의 역사는 이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대칭된다. 따라서 요셉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야곱의 역사는 야곱과 야곱의 아들들의 역사이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라 했으나 한 개인의 역사로 진행해 나가고 특히 요셉의 꿈도 요셉 개인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즉 앞으로 요셉이 그의 형제들 가운데 어떤 위치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매우 개인적인 것인 것 같다. 하여튼 한 개인의 경건과 영달에 관한 것처럼 보이므로 요셉 개인의 역사를 하나님께 경건, 순종할 때 그것이 개인의 영달로 끝맺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요셉의 개인적인 성공은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우선은 요셉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그것이 꿈으로 계시,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셔서 그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는 것이 개인의 역사 이상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36장까지의 역사는 누가 유업으로 이어받을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다가 이제는 누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으로 이어받을 것인가에 대해서 '이스라엘'로 일단락이 된다. 따라서 요셉의 역사는 개인의 역사가 아니고 이 하나님의 왕국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계획과 도우심과 인도로 성취된 역사이다. 요셉 개인의 역사의 목적은 한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하나님 왕국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역사이다.
그 역사의 의미는 요셉이 후에 형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로 하여금 당신들을 위하여, 남은 자를 위하여 하나님의 큰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당신들을 큰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서 당신들 먼저 보내셨다'고 요셉이 말한다. '당신들이 보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45:6). 요셉의 역사는 요셉 개인의 순종과 영달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상속자로 결정된 이스라엘을 보존하고, 하나님의 왕국을 보존하고, 하나님의 왕국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큰 목적이 요셉의 역사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요셉의 이야기나 구약의 성경을 moralize할 때는 이 진정한 큰 목적을 잃어버리게 된다. 요셉은 자신의 생의 참된 의미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을 먼저 애굽에 보냈다고 본다. 구속사적 관점이 드러낸 중요한 시각이다. 성경의 역사를 개인의 역사로 보지 않고 이스라엘의 역사로 본다. 물론 이 성경 역사에서 개인의 삶의 교훈적 의미도 발견 할 수 있으나 그러나 항상 그 개인의 삶의 진정한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요셉의 삶의 의미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데 진정한 의미가 있었다. 요셉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남은 자를 보내어 구원시킴). 야곱 가정의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이 달린 구원이다. 즉 하나님 왕국의 존폐와 관련된 구원이다. 요셉을 통해 애굽과 이방 족속이 이익을 받는다. 요셉은 자기의 역사를 하나님 왕국의 유업을 받기로 결정된 이스라엘의 역사로 보고 있다. 요셉이 야곱에게 내려오라고 한다. 브엘세바 = 약속의 땅의 가장 변방지역이다. 여기를 떠나면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이다.
46장 브엘세바에서 야곱이 떠나기를 주저했고 하나님께 희생을 드린다. 야곱은 버지의 말씀 즉 이 약속의 땅을 떠나지 말 것을 기억하고 아들의 청이 있다 하더라고 주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야곱의 온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간다. 하나님께서 브엘세바에서 나타나셔서 약속하신다. 46:3-4 애굽에 내려가는 것은 아브라함의 약속이며 그 약속의 일부분임을 말한다. 애굽 이주와 관련된 하나님의 계획과 왕국건설을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확인되며 실현되어 진다. 요셉을 통해 애굽에 내려감은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왕국실현의 역사였다. 이스라엘 민족을 비옥한 애굽 땅에서 큰 민족으로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요셉 사건은 하나님의 왕국 백성으로 선택된 야곱 가족이 어떻게 애굽으로 갔는가를 보여주며 큰 민족이 될 것을 보여준다(큰 구원을 위해 준비된 역사). 애굽 이주 사건은 단순히 한 가문이 기근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로 장차 애굽에서 큰 나라를 이루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인 것이다(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실현). 이 족장사가 출애굽의 배경이 된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인도하신 역사,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쓰임받은 역사.
우리는 성경의 개인 역사를 단순한 의미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 왕국건설의 참여자로서와 쓰임받는 자의 역사임을 보아야 한다. 각 부분의 역사가 또 다른 부분을 위한 연결의 채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개인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보아야 한다. ①왕국의 실현에 참여하는 구속사의 일부분, ②왕국의 실현에 쓰임받는 생애와 역사이다. ③구속역사의 준비하는 역사이다. 개인의 역사는 그 다음 단계의 구속역사를 연결하는 채널이다.
요셉은 족장사와 출애굽 사건을 연결하는 역사(종적)요, 또 자기 자신과 열방을 연결(구원)하는 역사(횡적)이다. 이는 우리에게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그의 뜻 실현을 위해 전개되는 역사라는 시각을 가지지 않고는 이런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축복의 전달자로서 이스라엘의 의미는 종적으로는 다음 세대의 구원역사의 연결이고 횡적으로 이웃에게 하나님의 축복 전달자이다.
창세기는 야곱의 죽음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대한 축복으로 끝난다. 하나님 왕국 상속자에 대한 축복이다. 이것은 창세기의 관심이 이스라엘임을 말해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미래의 막연한 사건이 아니라 더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언급(창 49:29-33, 50:25-26)이 또한 있다. 즉 야곱과 요셉이 자신의 시신을 이 땅에 묻지 말고 약속의 땅에 묻으라고 말했다. 요셉이 약속의 땅을 대망하는 메시지를 50:24에 전한다. 즉 이스라엘은 분명히 출애굽을 내다봤다(창세기 자체의 시각). 하나님이 그의 뜻을 여기서 다 이루신 후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을 출애굽하실 것을 내다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