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치문화와 기독교 조 용 훈 (한남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기독교 윤리)

1. 머리말

대선의 계절을 맞아 또다시 우리 사회는 선거열풍에 내몰리고 있다. 매스컴들은 연일 대선후보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도하고 있다. 사람들도 모이기만 하면 대선후보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삼는다. 새로운 대통령에 대한 기대와 체념이 엇갈려 나타나고 있다. 대통령이 바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정치만능주의도 경계해야 하겠지만, 바꿔도 안된다는 식의 정치적 냉소주의에 빠지는 것도 조심해야 하겠다.

'우리 사회에서 제일 신뢰할 수 없는 집단이 정치인'이라는 국민의식조사 결과야말로 우리의 정치현실을 정확히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GNP가 성장하여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정치행태는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21세기 첨단 정보화사회를 살아간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정치의식은 봉건사회 수준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교회도 선거열풍의 무풍지대는 아니다. 정치문제에 대한 목사의 설교가 없을 뿐이지 교인들 사이에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며 정치현실에 무관심하고 있는 사이에 교인들은 일반 매스컴에 의해 조종되고 통제된다. 원하든 원치 않든 대통령은 뽑히게 될 것이고, 결국 우리의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신앙생활마저도 직ㅗ간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때문에 급변하는 오늘의 정치현실 속에서 한 사회의 시민이기도한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삶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요청되는 또 다른 과제라 할 수 있다.

2. 한국의 정치문화의 특징

정치윤리에서 중요한 것은 민주적인 제도와 법의 마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제도와 법을 운용하는 사람과 사회의 삶의 방식에 있다. 그러한 문화적 차이 때문에 역사 속에서 같은 자유민주주의, 같은 사회주의 체제라 하더라도 그것을 수용하여 운용하는 나라마다 각기 다른 형태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정치제도라는 하드웨어 못지 않게 정치 문화적 전통이라는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는 점을 증명한다. 우리 사회의 정치왜곡은 법과 제도가 미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정치문화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의 정치를 왜곡시키는 문화적 요소들은 무엇인지 아래에서 살펴보자.

첫째, 유교적 가부장제다. 가부장적 권위주의는 봉건사회의 해체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의 정치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교적 사회에 있어서 국가란 확대된 가정으로서 파악된다. 가정에서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는 국가에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와 같다. 가정에서 어버이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 요구되듯이 국가에서는 임금에 대한 절대적 충성이 요구되었다. 국가에 대한 저항은 곧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가부장적 권위주의 정치체제 아래에서는 근대 서구의 시민사회에 나타난 것과 같은 주권재민, 법 앞의 평등 같은 민주주의 사상이 출현할 수 없었다. 대통령의 부정부패도 '통치행위'라는 차원에서 승인되고, 독재자도 '국부'로 추앙되는 이상한 우리의 정치현실은 이런 배경에서만 이해 가능하다.

둘째, 반공 이데올로기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전쟁의 경험을 통해 한국인의 내면세계에 깊이 각인 되었다. '반공'을 국시로 삼을 만큼 반공은 남한 국민의 공감대를 쉽게 형성하는 매개체로 기능하고 있다. 그래서 권력 지배자들은 반공을 통치수단으로 자주 이용하였다. 권력자들은 정적이나 일체의 비판세력들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반공 이데올로기는 진보적인 혁신정당이나 노동운동 등 국민의 다양한 이익을 대변할 매개집단을 형성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반공 이데올로기는 군의 정치적 개입을 정당화함으로써 오랜 동안의 군부통치 및 군사문화의 형성을 가능케 했다.

셋째, 혈연, 학연 그리고 지연을 중심한 연고주의다. 유교의 영향 아래에서 가족주의가 중시되었고, 그것은 혈연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였다. 그리고 사회진출 수단으로 교육이 부각되면서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학연 역시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변수가 되고 있다. 이러한 혈연과 학연의 연고주의는 합리적인 인재등용이나 정치후보 선택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정치ㅗ경제적 지배구조의 형성에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지역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지역적 편견과 차별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것이 두드러지게 표출된 것은 지난 1971년 대통령선거였다. 그 이후로 계속해서 지역감정은 대통령선거 및 총선에서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는 이같은 지역감정이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어 이후로 오랫동안 민족의 커다란 상처가 되고 있다. 지역감정은 '감정'이라는 말 자체가 암시하듯이 충동과 흥분의 비이성적인 행동으로서 여러 가지 사회문제의 원인이 된다. 출신지에 따른 편견과 차별은 사회의 통합을 근본적으로 저해하고 있다. 따라서 지역감정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민주화는 물론이고 남북통일도 꿈꿀 수 없을 것이다.

넷째, 건전한 정당정치의 부재다. 본래 국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당정치는 민주주의에서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정당들은 정치 이념적 차이가 분명치 않으며, 정책의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보스들을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정치인들은 정치철학이나 정치이념이 없이 오로지 권력의 장악에만 관심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우리 정치인을 가리켜 권력이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하는 해바라기들과 같다고 한다. 우리의 정치현실에서 '정치'란 권력장악을 위한 수단, 즉 권모술수와 동의어가 되고 말았다.

3. 신앙과 정치의 관계

위에서 살펴본 대로 한국의 정치문화 풍토에서 정치란 대단히 부정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통치자들은 대부분 억압하고 착취하는 지배자들이었으며, 정치란 권력 엘리트들의 권력장악을 위한 권모술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초창기 선교사들 대부분이 신앙과 정치의 완전 분리를 강조하는 근본주의적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어서 정치에 대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는 일반 사회에서보다 훨씬 더 냉소적이 되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는 정치와 무관한 삶을 살 수 없다. 본래 '정치'(politics)란 그리스어 폴리테이아(politeiva)에서 온 말로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공동체의 삶의 형태를 가리킨다. 정치란 이해관계가 얽힌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간의 삶의 방식으로서 인간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러한 신앙과 정치의 상관성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이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면서 동시에 한 국가의 시민이라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까지 그리스도인은 이 두 영역 사이의 긴장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과거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교회와 국가라는 이 두 영역 사이의 관계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세상 왕국을 악마화 하여 배타적으로 파악한 때가 있었으며, 반대로 신앙과 정치를 동일시하며 교회가 세상 왕국 위에 군림한 때도 있었다.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이 두 영역의 분리(Trennung)나 일치(Identifizierung)는 결국 교회의 영적 타락뿐만 아니라 세상 정치의 왜곡을 가져온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윤리의 과제는 어떻게 이 두 영역 사이의 긴장관계를 생산적으로 유지하고,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느냐 하는 데 있다. 그것은 아마도 외적 평화 유지를 위한 세속질서에 대한 제사장적 중보기도와 동시에 정치의 절대화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이 주 내용이 될 것이다.

4. 한국의 정치문화와 기독교의 과제

이러한 전제에 기초하여 한국의 정치현실에서 기독교윤리의 과제를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첫째, 기독교윤리는 상대적인 것, 궁극 이전의 것의 중요성을 심각히 다루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정치는 절대적인 것,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정치는 하나님의 창조질서 중의 하나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 이전까지만 필요한 질서다. 따라서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정치만능주의나 국가권력의 절대화를 경계해야 한다. 모든 것이 정치와 관련되어 있지만 정치가 전부는 아니다. 인간의 구원은 정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온다는 절대적 진리를 잊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정치가 비록 불완전한 것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무정부주의적 태도를 취할 수도 없다. 우리는 외적 평화와 질서를 위해 국가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절대적인 것, 궁극적인 것만을 추구하다보면 자칫 정치적 이상주의에 빠지고 만다. 정치적 이상주의는 쉽게 정치적 행동주의나 정치적 냉소주의에 빠지게 만든다. 이러한 위험성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정치적 이상주의 대신 현실주의적 입장을 취할 것을 요청 받는다. 절대적 선의 추구가 인간 현실에서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면, 우리는 '보다 나은 선' 혹은 '보다 적은 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특정한 후보를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우상화하는 것이나, 선택할 후보가 없다고 기권하는 것이나 다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다. 현실을 인정하고, 그 가운데에서 보다 나은 사람, 보다 나은 정책에 투표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둘째, 법과 제도보다는 문화의 변형에 관심해야 한다. 우리 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 못지 않게 좋은 헌법, 선거제도와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제도들이 민주주의를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좋은 제도와 법도 우리 사회에 들어오면 변질되고 왜곡되었다. 서구민주주의의 정신은 '한국적 민주주의'란 구실 하에 왜곡되었고, 모든 독재자들은 높은 투표율과 지지율을 통해 '합법적'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합법성이 곧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기독교윤리는 제도와 법 문제만이 아니라 그것을 운용하는 문화적 배경에 대해 관심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 구성원과 사회 전체의 삶의 방식이 민주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제도나 법은 언제든지 통치자에 의해 조종되고 왜곡될 것이다.

셋째, 교회의 삶의 방식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교회는 과연 한국의 정치문화를 비판할 자격과 오늘의 정치현실을 변혁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교회의 대(對) 사회적 비판은 교회의 내적 자기비판과 자기갱신이 병행될 때에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한국의 정치 문화적 특징들이 교회 안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아니 그러한 정치 문화적 특징들이 교회를 통해 보다 더 강화되고 신학적으로 정당화됨을 보게 된다. 무엇보다 먼저 교회 내의 가부장적 통치방식을 언급할 수 있다. 목사와 평신도, 담임목사와 부목사나 전도사 사이의 위계적인 질서가 존재하고 있다. 한편 선거가 있을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잘못된 선거풍토, 말하자면 금권선거, 지방색, 불법타락선거에 대해 비판을 한다. 그러나 교단 총회장 투표를 둘러싸고 금권선거나 상대후보비방 등 불법적인 요소들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선거 때마다 정책보다는 지방색, 이념보다는 상대 후보자 헐뜯기에 더 관심하는 풍토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정치문화를 경직화시켰던 반공이데올로기 역시 한국교회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일제 식민지시대에 만주에서, 해방후 북한지역에서 그리고 한국전쟁의 경험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음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같은 경험을 했던 월남 기독교인들이 세운 교회가 남한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교회는 반공의 최일선에 서게 되었다. 그 외에도 혈연, 학연, 지연이라는 연고주의가 교회 안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5. 연말 대선과 그리스도인의 자세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듯이 이번 대통령 선거는 한국의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내적으로 장기적 경제불황과 북한사회의 급격한 변화 그리고 외적으로는 세계무역기구(WTO)체제의 등장으로 인한 국가간 경쟁의 심화는 정치혁신을 요청하고 있다. 새로운 천 년을 맞이하며 또 머지않아 있게 될 통일한국의 틀을 놓아야 하기 때문에 오늘의 정치가의 책임은 막중하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요청되는 윤리적 책임 중의 하나는 선거참여를 통한 정치에의 비판적 영향력 행사다. 국민의 주권은 유권자의 올바른 주권행사에 의해서만 생겨난다. 우리는 정치인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이 올바로 주권을 행사하고 있나를 되물어야 한다. 정치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주체는 정치인들이 아니라 유권자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 정의의 파수꾼으로서 공명선거를 실천하며 또 그 일을 위한 감시자가 되어야겠다.

둘째, 교회를 이용하는 정치인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 필요하다.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교회를 찾아 기웃거리는 정치꾼들이 많다. 기독인 대통령이라고 해서 좋은 후보라고 할 수는 없다. 과거 대선에서 적지 않은 기독인들이 장로 대통령을 뽑으면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과는 기대에 어그러졌다. 김영삼 정부 역시 정경유착, 권위주의적 통치, 자신과 주변인물의 도덕적 청렴성 등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정치 철학과 이념이 없는 인기위주의 정치행태는 시간이 지나면서 개혁의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후보자의 특정 종교 소속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덕적 인격과 정치철학에 있다. 우리는 연말 대선을 통해 교회의 영적 지도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정치인을 뽑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다. 우리는 다만 백성들의 여론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여 외적 평화와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세상' 정치인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