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서론

1. 문제의 제기

21세기를 2년 앞둔 현재의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위기상황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교회성장이 둔화되고 있으며, 교회가 교회구실을 못하고 있다"라는 비판의 소리도 높아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세기를 맞이했을 때 교회가 어떠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입장이다. 이러한 때 교회는 빠르게 변해 가는 세상을 향하여,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하여 보편적 진리를 거부하고 인간의 감성과 불확실성에 보다 많은 점수를 주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결코 타협할 수 없으며 그래서는 안되는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선포하며,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할 것인가?"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이러한 위기상황과 혼란을 극복하는 길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통해 갖게 되는 교회론과 이 교회론을 바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교회의 고유 사역을 인식하고 이에 따른 교회의 사역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가 이러한 일들을 수행하는데 있어 교회를 이끌어 가는 목회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종으로서 성서를 중심으로 교회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며, 회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살아가도록 인도하여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글에서는 먼저 교회의 본질을 알아본 후, 그 본질적 측면에서 있어야 할 교회의 사역들과 이것을 이끌어나갈 목회자의 비전에 대해 목회신학적인 관점에서 논의할 것이다.

2. 연구의 방법과 범위

본 논문은 교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어원적인 고찰 및 성서에 나타난 교회의 의미를 살펴볼것이며, 또한 20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바르트(K.Barth)와 몰트만(Jürgen Moltmann)이 말하는 교회이해를 살펴볼 것이다. 그런 후 교회의 특성들을 알아보고, 그 특성을 가지고 행해야 할 사역들이 어떤 것인가 알아보고, 이것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목회자가 가져야 할 비전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Ⅱ.본론

1. 교회본질에 대한 어원적 고찰과 성서에 나타난 의미

1) 어원적 고찰

오늘날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용어는 그리스어 ՅՊՊՋՇՓՉՁ의 번역이다. 바울은 교회공동체를 부를때 ՅՊՊՋՇՓՉՁ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 동사 ՊՁՋՅՙ(부르다)와 전치사 ՅՊ의 복합동사인 ՅՊՊՁՋՅՙ(소집하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으로부터 불러내다"라는 어원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ՅՊՊՋՇՓՉՁ는 "불려나온 사람들"이고 이 불려나온 사람들의 모임이며 백성들의 集會이다. 이 단어는 기독교가 처음으로 사용한 단어가 아니라 이미 헬라세계와 70인역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이다. ՅՊՊՋՇՓՉՁ가 처음에는 구별의 개념을 가진 단어였지만 후대에서는 그러한 구별의 개념이 사라지게 되었고, 이 ՅՊՊՋՇՓՉՁ는 회중또는 부름을 받은 회중이란 뜻이었는데 후대로 가면서 단순한 회중이나 집회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2)성서에 나타난 교회의 의미

①구약성서에 나타난 교회의 이해

70인역에 ՅՊՊՋՇՓՉՁ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ࠌࠄࠗ인데, 그 동의어인 ࠄࠃࠒ의 구약성서에서의 의미를 고찰함으로써 구약에 나타난 교회의 의미를 알아보고자 한다.

구약에서 "카할"이란 말의 본뜻은 '부른다'라는 말에서 만들어진 말로서 '의논하기 위하여 소집된 공동체'라는 뜻이다. E. D. Radmacher는 이 단어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는데, 잘못된 증언에 의해(창49:6), 전쟁이나 침략에 의해(민22:4), 귀환하는 포로들의 무리에 의해(렘31:8), 예루살렘에 있는 회복된 공동체(스10:12),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여 모인 무리들로 구성된 조직체로서 회중을 의미한다고 한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전달해 준 하나님의 율법을 듣기 위하여 모인 그 모임이 곧 "카할"이다.

"에다"는 ࠄࠃࠉ(지정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했고,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회중 - 약속이나 일치되는 행동을 함으로써 모여진 무리를 의미한다. 이 단어는 사람들, 의인들, 악인들, 동물들 또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는 다양한 용례를 가진 단어이다. 그러므로 "에다"의 의미는 "카할"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 두 동의어의 분명한 차이점은 70인역에서 "에다"가 결코 ՅՊՊՋՇՓՉՁ로 번역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②신약에 나타난 교회의 이해

신약성서에서 교회를 나타내는 단어는 ՅՊՊՋՇՓՉՁ와 ՓՕՍՁՃՙՃՇ이다. "에클레시아"는 앞에서 살펴보았고, "쉬나고게"는 '오다' 또는 '함께모이다'라는 뜻을 가진다. '쉬나고게'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회합또는 공적 예배를 위하여 모인 건물을 지칭했다.

2. 교회에 대한 20세기 신학자들의 이해

1) 칼 바르트(K.Barth)

ⓐ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의 역사적 실존 양식을 가리킨다. 즉, 교회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지금 여기에, 다른 사람들 한 가운데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의, 행동과 계시, 하나님의 의지와 행동, 말씀에 의해 규정된 집단이다.

이 공동체의 독특성은 오로지 하나님이 이 공동체의 하나님으로서 행동하시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행위는 이 백성을 향한 그분의 은총의 권능과 자유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이 백성은 오직, 감사와 회개 기도와 찬양 속에서만 이러한 구별과 우연성을 향유할 수 있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역사는 계약사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강조한다.

계약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기본관계를 나타내는 구약적 용어이다. 계약은 이스라엘 종교의 일종의 공동 분모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계약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선택의 대상이요, 창조에 내적 근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계약은 구약의 구원의 근원이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이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계약이 주 예수가 그의 교회를 얻기 위하여, 자신을 죽음에까지 내어 주었다고 말한다.

ⓑ 그리스도를 통해 "부름받은 자들의 공동체"

바르트는 교회의 기초를 하나님의 계약 의지의 성취인 하나님에 의해 객관적으로 이루어진 화해 안에 설정하고, 교회가 전 인류의 칭의, 성화 및 소명의 선행적 묘사로서의 주관적으로 형성된다고 설명하였다. 바르트의 기본 전제는 부름 받음에 있다. 교회는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공동체 안으로의 부름 받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유유상종하는 인간들의 자연적 군집 욕구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그들을 부르시고, 자신과 결합시키는 사실로 인해서만 생겨났다. 이러한 개인들을 부르시고, 서로 결속시킨 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는 그들을 특별한 백성이 되도록 불러 모으셨다. 모두가 공동으로 떠맡은 상호 책임 속에서 특별한 백성의 지체들로서 형제애의 공간인 교회안에서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증언의 봉사직을 부여받았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객관적으로 일어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의 주관적 묘사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름받은 자들의 공동체"로 일으켜 세우셨다.

ⓒ 성도들의 교제로서의 교회

화해론 안에 나타난 바르트의 교회론에는 공동체의 세움이 논의되고 있다. 여기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성화의 역사와 생동시키는 성령의 역사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 교회는 "성도들의 교제"

(Communio Sanctorum)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도들의 교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역사에 의해 회집되고, 생동된 인간들의 활동안에서 일어난다. 바로 이처럼 성령의 역사에 의해 모여든 인간들, 그와 상응하는 일을 행하도록 사명을 받은 인간들이 곧 성도이다. 물론, 바르트는 이런 교제가 죄인들의 교제이며, 이들은 여전히 아담에게 속한 자임을 간과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인간들의 범죄, 타락 및 비참에 가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이들은 성도들의 공동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사랑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성도들의 교제"를 전통에 따라 두가지로 이해하였다. 하나는 "성도들" 환언하면,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된 인간들의 친교이고, 또 다른 하나는 "거룩한 것들" 거룩한 관계들, 거룩한 은사들, 거룩한 임무들, 거룩한 직분들, 거룩한 역할들 안의 교제이다.

이러한 친교는 공동체를 세우는 사건으로서 죄인들이 그들의 행동과 본성 안에서 이러한 "거룩한 것들"을 받아드리고 확증하는 사건들이다.

2)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 속에 참여하는 공동체

몰트만의 교회의 사명과 의미, 실존과 기능은 세계를 포함하는 하나님 역사의 포괄적인 영역 안에서 해명된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역사의 포괄적인 영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만일 우리가 그 속에서 교회가 이해되어야 할 전제 관련을 여기서 '세상에 관계하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먼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의 생동성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움직여진 하나님의 생동성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교회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속에 있는 교회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교회론을 정립하고자 한다. 즉 몰트만의 교회론은 세계에 관계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의 운동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의 포괄적인 생의 연관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몰트만은 거듭 말한다. "참된 교회는 십자가 아래의 교회다."

ⓑ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공동체

1) 성령의 역사속에 있는 공동체

몰트만에 의하면, 신약성서의 평화는 모든 사물이 가져올 종말론적인 질서로서, 이는 결국 하나님의 구원으로서 종말론적으로 가져올 새창조의 질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생활과 행동은 이 세상의 알력속에서도 하나님의 평화에 호흡하며 살며 그를 기대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의 능력들의 충만함 가운데 "성령이 스스로를" 나타내는 장소이며, 교회에 주어진 은사는 종말시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봉사하는 능력과 가능성이 될 뿐만 아니라 교회는 이 은사를 가지고 세상을 위해 새롭게 봉사하는 공동체 인 것이다.

2) 공동체에 위탁된 임무

몰트만은 공동체에 위탁된 임무에 대해 고찰한다. 먼저, 몰트만은 공동체의 임무는 전체 공동체의 소명에서 출발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공동 봉사를 전제해야 하는 특성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몰트만은 공동체에 위탁된 임무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는 자들을 하나님 나라로 부르는 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될 때라야만 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자유의 역사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의 필연적이고 본질적인 특수한 임무를 선포, 친교, 봉사로서 규정하며, 교회의 모든 임무들의 구체적 형태는 그 기능을 고려할 뿐 아니라, 항상 전 공동체의 사명에 뿌리를 두고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존재해야 한다고 한다.

결국, 몰트만은 공동체 안에 위탁된 임무들은 성령의 능력안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공동 봉사를 함으로서 일치성과 연속성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3) 친교로서의 교회의 형태

몰트만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과제가 '친교'라고 본다. 교회는 형제들의 공동체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이것은 단순한 집단이 아니라 성례전에 참여하여 복음 선포의 목적을 가지므로 삶 전체 타인과의 관계, 타인에 대한 우리의 표현, 그리고 모든 공동체 행동을 포함하는 공동체이다. 따라서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친교와 우정을 강조한다.

"교회 대중의 친교와 우정이 그 밑바닥에 있지 아니하면 말씀과 성례전, 신앙 고백과 모든 제도속에 있는 친교란 그 생명력을 잃고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어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들 주체성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를 "형제들의 공동체"라고 정의한다.

이 형제 공동체는 새로운 친교 형태를 가지는데 그 삶의 양식이 지배나 굴종이 없고 소유의 탐욕, 사유재산의 주장이 없어지고(행2:44-46, 마20:26) 사회, 문화, 인종적, 성적인 구별과 특권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공동체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몰트만이 성령의 능력안에 있는 교회는 성령의 종말론적인 은사로서, 성령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메시야적 삶을 살며,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봉사와 친교를 가진 위임된 메시야적 공동체, 회중인 것이다.

3.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교회는 교인들이 모이는 단순한 건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의 총체이다. 내 교회가 아니라 우리 주님의 교회이다. 주의 교회(His Church)는 울타리 경계선이 유동적이고 모이기도 하고 보내기도 하는 것이 그 사명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선교의 명령을 위탁받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모습이 어떠한가 살펴보고자 한다.

1)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누가 교회인가?' 라는 질문의 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일 것이다.(벧전2:9-10) 이것은 앞서 어원적 의미에서 살펴본 대로 불러냄을 받은 이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들의 意見을 모아 이루어진 집합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시고 택하여 부르신 언약의 백성임을 성경전체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교회는 육으로 태어난 사람의 모임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름 받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난 자들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43:21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선포할 자들'임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언약에 그 기원을 두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역사, 목적, 그리고 시대적인 사명과 미래를 가진다. 역사를 잃어버린 교회는 자기중심적이 되고 배타적으로 될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시간(시대)과 공간(지역사회)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2)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무엇이 교회냐?'는 질문에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이다'라고 답할 수 있다. 교회의 기능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설명할 수 있다.

몸은 공동적인 생명체로서 상호의존 내지 협력하는 통일성을 지닌 운명체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머리되시는 주 예수그리스도에 연결된 모든 그리스도인 지체로서 구성된 살아 움직이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세상에 나타나기 위해서 첫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결된 성도들이어야 한다. 요 15장 포도나무 비유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성도들은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들이라 했다. 이것이 생명적이요 유기적인 관계인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떤 지체도 다른 지체보다 자신이 더 중요하다고 느껴서는 안되며 또 천시해서도 안된다. 사도 바울도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라.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고 말씀했으며, 계속해서 5절에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고 했다.

셋째, 그리스도인인 지체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

"형제들아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10)고 말씀하신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더 책임있는 직책이나 위치에 있다손 치더라도 그 누구도 더 중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언제나 겸손해야 하며 종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체간에 서로 존중하고 서로 도우며 유기적인 관계로 교통해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되게 하셨으니 하나되는 일에 방해되는 일들은 과감하게 제거해야 한다. 지체의 관계란 서로 잘 알고 서로 아끼고 섬길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런 섬김과 아낌을 통해 몸의 생명은 유지되는 것이다.

은사와 직무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몸의 지체처럼 사역을 감당함으로써 이 세상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한다. 즉, 이 땅에 세워진 교회는 이 땅에 나타난 예수가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3)교회는 성령의 사역체이다.

교회의 본질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말하고, 교회의 기능을 그리스도의 몸이라 말한다면, 교회의 역동성은 성령과의 교제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교제하며 사역하는 총체이다. 그러면 교회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가?

교회의 우선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禮拜(엡 3:10)이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성도간의 교제를 나누게 된다. 체험 있는 예배와 마음을 주고받는 성도간의 코이노니아가 중요하다. 교회의 목적은 생동감 있는 예배와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성령으로 하나되어 땅끝까지 전도하고(행1:8) 선교하는 것이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교통하는 교제로써 하나님과 성도들은 연합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사명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성령충만함을 받아 '너희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행1:8)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4. 교회의 사명과 목회자의 비젼

1)예배

우리는 흔히 교회를 예배당이라고 표현할 때가 있다. 그만큼 교회와 예배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공동체인데 그 부름의 목적은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구원의 은혜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배의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목회자는 예배 공동체의 목사로서 자신을 인식하고 비젼을 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은 하나님이며, 그 내면적 실제에 맞먹는 어떤 외적인 질서가 필요하기에 시간의 질서를 통하여 예배를 드리도록 교회를 인도한다. 또한 예배는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교회라는 장소에 모이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시킨다. 요 4 :24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신다. 우리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먼저 예배를 드리는 태도와 예배시간을 엄수하는 것 같은 기본적인 사항들을 잘 점검해야 하며,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고 시정할 수 있도록 권면해야 할 것이다. 예배형식과 예배음악, 조명과 같은 시설 등은 교회의 특성과 여건에 따라 신중히 검토하면서 가장 은혜롭고 편한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

2)교육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살아있는 증거다. 살아 움직이며 성장하는 교회를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선포 그리고 그 말씀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오직 성령의 조명과 역사하심으로만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보내기 전에 훈련시키셨다. 그는 제자들의 임무를 규정하고 방법의 윤곽을 잡아주셨다. 그는 지도교사처럼 제자들이 자신의 사역운영방법을 직접 보도록 하였다.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과 권능으로 보냄을 받았고 그들의 사역을 통해 예수의 목적을 완수했다. 가르치는 장로로서 목사는 교육에 대한 비젼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공동체는 가르치는 공동체이며, 가르침은 선포와 예배와 성만찬과 목회를 통하여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기독교 교육의 구심점 상실은 심각한 목회적 지도력의 결핍에서 기인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목회적 교사의 모델로서 예수님을 설정하고, 우리는 부단히 노력해야 하며, 가정과 교회가 연계되어 교육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도록 목회자가 일선에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교회학교에 대한 책임을 진다. 그러므로 교회학교는 목회적 지도 아래서 전교회의 지원을 받아야만 한다. 기독교 교육은 연령과 계층과 여건 문제 때문에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가르치는 장로인 목사는 모든 교육적 노력에 결실을 맺게 해야 한다. 그 임무의 범위에는 가족의 현장에서 기독교적인 학습의 원천을 제공하며, 예배하는 공동체에 설교를 하며, 광범위한 지역 교회의 교육과정과 교회학교 교육프로그램, 교리문답 교육을 하여 세례서약을 충실히 지키도록 하는 이 모든 일을 관장하는 것이 포함된다.

3)봉사와 구제

교회의 섬김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한 모습인 것이다. 주님을 향한 열정이 그로 하여금 섬기는 삶을 영위하게 할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일이나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형제를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최후심판때 주께서 자신의 오른쪽에 선 사람들에게 '내가 주릴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5-36;막9:37)고 선포하셨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그런 일이 없었다고 송구스러워할때 왕은 말하기를 '내 형제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것이라'(마25:40)고 답하신다. 주님을 섬기는 일은 바로 우리 이웃을 섬기는 일이다. 교회의 섬김의 자세는 성도들의 삶 전체를 통한 것이기 때문에 특정시간, 특정상황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일하는 그 현장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할것이다.

가난한 자를 위한 섬김과 봉사에 대한 비젼을 목회자는 가져야 한다. 목회는 사회윤리에 속하는 이슈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추구하고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자를 실제로 돌보는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할것이다.

먼저 가난한 자에 대한 목회적 공감을 가져야한다. 그래서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인내를 가지고 가난한 자들의 음성을 공감적으로 듣는 것이 목회에 필수적이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일에 대한 초기의 문서들로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터툴리안, 키프리안, 어거스틴의 저술들과 사도헌장이 있다. 칼빈은 자원 전달과정에서 가난한 자에게 상처를 주지 말고 그들의 형편을 개선하는 것이 되도록 배려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가까운 이웃을 향한 관심을 가진다. 우리가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선행을 베풀어야하지만 이웃이 섬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특별한 지역적 인접성을 통해서이다. 신약에서는 박애가 가정에서 출발하거나 가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 공동체의 성원들과 다른 공동체들과 비기독교인들과 그리고 전세계에 이르기까지 외적으로 확장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애가 시작되는 특별한 장소는 언제나 어떤 특수한 지역, 즉 인접한 곳이다.

목사는 부자에게 청지기라는 사실을 깨우칠 책임을 지닌다. 왜냐하면 땅은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레25:23)이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은 더 많은 책임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사는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서로를 도울 수 있고, 빈곤을 수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Ⅲ.결론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적인 의지와 계획아래 부르신 사람들의 공동체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나가는 귀중한 임무를 맡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영인 성령의 능력안에서 모든 사역들이 역동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이런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성령의 능력안에서 모든일이 일어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인식후에 교회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경배하는 예배와 부름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도록 말씀안에서 훈련을 시켜야 하며, 하나님이 교회를 부르신 것처럼 아직 부름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교회로 인도해야 할 것이며, 이 땅위에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로서 우리 주위의 모든이들을 돌아보고 그들의 육체적,정서적,지식적 필요를 채워주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사명인 예배와 교육, 봉사와 구제를 사역하는데 있어 목회자의 비젼은 중요하다. 만약 목회자가 잘못된 비젼을 가지고 있다면 잘못된 방향으로 이런 사역들이 흘러가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될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21세기를 바라보면서 성서적인 비젼을 가지며, 성령 안에서 모든 사역이 이루어지도록 항상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꿇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할 것이다. 기도하고 난후에는 교회의 공동체원들을 일일이 돌아보며, 그들이 하나님의 부름받은 백성으로 살도록 인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