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론

제 1 장. 서 론

1) 연구의 목적

구원론이란 그리스도의 사역을 개인들의 삶에 적용하는 내용을 취급한다. 따라서 구원론은 그것이 인간의 핵심적인 필요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상당히 관심을 끄는 분야인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구원에 있다.

오늘날 교회에는 구원받는 방법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류가 적지 않다. 소박하게 그저 교회생활을 잘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아가 율법주의와 신앙적 선행으로 구원을 추구하기도 한다. 즉 교회안에 펠라기우스주의와 세미펠라기우스주의가 무의식 속에 깊이 잠재해 무거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이다 (비록 지식적으론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러한 상황속에서 본 논문이 의도하는 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하고 그렇다고 구원의 과정에서 인간의 책임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유효하며, 또한 유기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말이 의미하는 바는 임의로 행하는 신자들일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떠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자들이 그들의 구원을 상실토록 허락치 않으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구원의 확신을 갖고,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본 논문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을 고찰할 것이다.

2) 연구의 방법 및 범위

본 논문은 구원의 각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인간의 책임에 관한 것과 이에 따른 적용의 관점에서 검토해 보았다. 그리고 전통적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구원을 다루고, 복음주의와 다른 노선의 구원에 대해서 함께 비교 고찰하였다.

개별적으로 보면 제 1장은 서론으로써 본 연구의 목적과 방법과 범위 등을 약술했다.

제 2장은 구원에 대한 개념을 다루었는데, 구원이라 함은 익히 알고 있지만 막연한 경우가 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구원의 개념을 언급했다.

제 3장은 구원의 순서에 대해서 다루었다.

제 4장은 예정을 다루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제 5장은 유효적 소명을 다루었다. 그 소명은 택자에 한정되며 그 부르심은 유효하다.

제 6장은 중생을 다루었다. 중생은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으로 거듭남을 의미한다.

제 7장은 회개를 다루었다. 회개는 신앙의 본질적 요소인 것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제 8장은 신앙을 다루었다. 신앙은 복음의 핵심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매개물이다.

제 9장은 칭의를 다루었다. 칭의는 하나님 앞에 합법적 신분을 보장 받는 것이다.

제 10장은 성화를 다루었다. 성화는 칭의 이후 거룩하게 변화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제 11장은 영화를 다루었다. 영화는 신자의 영적존재가 죽음이후 완성되는 것을 말한다.

제 12장은 성도의 견인을 다루었다. 견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각 개인이 믿음을 유지하고 최후의 목적까지 보존되는 것을 말한다.

제 13장은 구원의 방식과 범위를 다루었다. 각 노선의 구원의 방식을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이 미치는 범위에 대해서 언급했다.

제 2 장. 구원의 개념

구원이란 용어는 그것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쩌면 너무 명백한 의미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 내에서도 구원이 내포하는 의미에 대해서 폭넓게 서로 다른 견해들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들 중에 더욱 중요한 것들을 연구하기 전에 서로 다른 개념들을 갖게 하는 요소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먼저 현대의 다양한 구원의 개념을 살펴본후 제반 구원의 개념을 검토하고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그 개념을 정의하고자 한다.

1) 해방신학적 관점

제 3세계 신학으로도 불리우는 이 신학의 구원개념은 사회의 기본적인 문제란 권력가들에 의해서 권력없는 계층의 사람들이 억압을 당하고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착취로 부터의 해방이라고 보고있는데, 구원을 우선적으로 죽음후의 개인적인 삶으로서 여길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인 노력이나 필요하다면 혁명을 통해서, 즉 모든 가능한 방법들을 동원해서 이 구원역사를 이루려고 노력할 것이다.

2) 실존신학적 관점

구원이란 우리의 안보를 위한 이기적인 추구들을 포기하고 그대신 하나님만을 신뢰하여 실존속에 있는 인간을 참된 자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는 영혼의 본체에 있어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법정적인 선언을 받는 칭의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이것은 우리의 실존, 우리의 삶 전 관점과 삶의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인 것이다.

3) 세속신학적 관점

세속신학은 과학의 발전으로 세속화 되어가는 과정을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가 창조한 최고의 피조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한 존재가 되도록 교육시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구원이란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그것을 활용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독립하고 성인이 되고 자신을 확신하여 이 세상의 일에 참여하는 그것이 구원의 의미이다.

4) 현대 카톨릭 신학적 관점

공식적인 카톨릭교회 입장은 교회가 유일한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인데, 이 은혜는 교회의 성례를 통해서 전달되므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 그러나 최근 전통적 견해를 달리하여 가시적 교회밖에 있는 이들 그리고 아마도 기독교인이라고 주장을 전혀 하지 않는 이들까지도 은혜의 수혜자들이 될 수 있다는 가

능성을 더욱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5) 복음주의적 관점

구원은 가장 깊은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깨어진 교제를 회복 또는 바로잡는 것, 즉 인간존재의 변혁을 수반하는 회복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본래의 상태와 그후 죄가 세상에 들어옴에 따른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를 회복, 구속, 갱신하는 것을 말한다. 더욱이 구원은 죄인의 구원을 영원전 부터 하나님이 아시는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복들을 죄인에게 전달하는 것과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의 생활로 회복되는 것을 말하며, 인류의 생명과 힘과 행복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 및 인간이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해방신학, 실존신학, 세속신학적 입장은 성경에 그러한 요소가 내포되어 있지만 구원의 본질인 영혼에 대한 구원의 개념이 희박하다. 그리고 현대 카톨릭적 입장은 교회밖의 익명의 그리스도인까지 구원의 대상에 포함시키므로 종교다원주의적인 냄새가 풍기고 있는데 이것은 비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례를 통한 은혜의 전달은 어느정도 그러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같은 구원의 입장은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고, 나타내시고자 하는 본질적 구원의 부차적인 것들이요, 본질적 구원을 예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부차적 구원을 베푸실 때에 그것을 통해 사람들이 본질적인 구원으로 인도되기를 원하셨다. 성경이 말하는 본질적인 구원은 복음주의적 구원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본장에서는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구원에 관한 고찰을 언급하고자 한다.


제 3 장. 구원의 순서에 관한 문제

만약 구원론이 “구원의 교리”로서 이해되어진다면 제일 먼저 다루어야 할 문제는 구원의 축복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함에 있어 어떤 순서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1) 세 가지의 다른 접근 방식들

한 극단의 경우가 구원의 명확한 순서가 추출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존 머레이(John Murray)는 구원적용의 다양한 과정이 어떤 순서에 따라 진행되고 있으며 그 순서는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계획과 그의 지혜 그리고 그의 은혜에 의해 제정되어졌다고 믿을만한 충분하고도 결정적인 이유들이 성경에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롬 8::23). 그러므로 그는 성경적인 구원의 순서는 부르심,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 삼으심, 성화, 견인 그리고 영화라고 이해하고 있다.

구원의 순서에 대한 중간적인 입장은 루이스 벌코프의 입장이다. 성경은 종종 조직신학에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잇는 것보다도 더 넓은 의미들을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구원사역의 다른 국면들이 서로 유기적 관계속에 놓여 있는 다양한 경우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살펴본뒤, 게속해서 루이스 벌코프는 다음과 같은 구원의 순서를 제시하고 있다. 부르심, 중생, 돌이킴, 칭의, 성화, 견인, 그리고 영화.

다른 한 극단의 예가 벌 카우어의 경우다. 그는 구원의 순서란 개념에 대해 매우 불만족스러워 한다. 그는 주목하기를 이 주제에 대한 신학적인 몰입은 종종 구원 자체가 갖는 풍요함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단계들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구원의 순서라는 표현보다는 구원의 길(way of salvation)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를 좋아하므로 구원의 순서를 정하기를 거부한다.

2) 어려운 문제들

구원의 순서를 정하려 할때 다음과 같은 어려움이 있다.

첫째, 우리가 구원의 순서를 설정하는데에 사용하는 용어들이 조직신학에서 사용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경의 저자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 구원의 과정속에 나타난다는 다양한 단계들의 순서역시 항상 똑같지 않다는 점이다.

셋째, 종종 구원의 순서를 정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의 토대로 사용되어지는 로마 8:30에서도 이 구절의 주요목적이 구원의 순서를 정하는데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누릴 안전과 영원한 축복을 수사적으로 설명하는데에 있다.

넷째, 믿음이 구원의 순서에 나타나는 여러 관계중 하나의 단계일 뿐이라고 생각되어져서는 결코 아니된다. 믿음은 신자의 일평생의 삶을 통해 지속되어지며 수행되어져야 한다.

다섯번째, 칭의와 성화는 성도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연속의 과정이 아니라 동시에 나타나는 사건들이다. 고전 1:30에서 가르치고 있듯이 의롭다 하심에 대해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되 거룩하게 하심에 대해서는 그를 영접치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여섯번째, 머레이와 벌코프가 주장하는 구원의 순서는 완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과 소망이 이들의 순서 속에는 언급되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신컨데 사랑과 소망 역시 믿음만큼이나 구원의 과정속에서 나타나는 필수적인 것들이다.

3) 구원의 순서의 필요성

하나님의 은혜를 개개인에게 적용시키는 일잉 단일의 과정으로 생각될 수 있으나, 그것은 택함받은 자들에게 동시에 부여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속적인 단계로 나눠질 수 없는 하나님의 단일 사역에 대해서, 어떠한 연대적인 순서를 정하려는 시도인 구원의 순서란 개념을 내어버려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갖는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함에 있어서, 성령께서는 비록 결코 분리되어질 수는 없으되 각각으로 부터는 구별되어야 하는 다양한 경험들을 알게 하신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비록 그것들이 하나씩 다루어진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결코 분리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연속적인 단계를 갖는다는 구원의 순서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사역, 즉 다양한 국면을 구별해 볼 수 있는 구원의 길에 혹은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국면들이 모두 똑같은 종류의 것들은 아니며, 그러기에 모두가 똑같은 범주에 들어가서는 안된다.

요컨데 구원의 길에 나타나는 다양한 국면들은 뒤의 것이 앞의 것을 대치하는 식의 일련의 연속적인 단계들로 이해되어져서는 안되며, 오히려 구원의 과정속에 나타나는, 다양하면서도 동시적인 국면들 즉 이 모든 국면들이 시작된 후에도 계속적으로 나란히 지속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제 4 장. 예 정

1) 개 요

기독교회의 교리중에서 가장 이해되기 어렵과 문제시되기 쉬운 교리들 중의 하나는 분명히 이 예정의 교리이다.

어떤이들에게 이것은 인간의 이해능력을 초월하는 것에 대해 불필요하게 탐색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그것은 성경의 계시말씀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므로 기독교인들은 그 교리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을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예정이 의미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정의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예정’이란 영생이나 영원한 죽음을 개개인들에게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을 말한다. 그리고 ‘선택’이란 예정에 있어서의 긍정적인 국면인 영생에로의 택하심을 뜻하는 것이다.

2) 역사적 발전

예정에 대해서 많은 논쟁들이 있어왔고 이 교리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들은 일반적으로 문화와 신학적 흐름 내에서의 다른 요소들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고전적인 교리적 체계가 발표되던 시기까지 여러세기를 통하여 온 그 내용들을 개관해 보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이 교리의 기초를 놓은 사람은 어거스틴이다. 그는 아담이 참으로 자유로운 삶을 소유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악을 행하려는 성향을 갖게 되었고 그 죄성은 후손들에게 전달되었다. 그 결과로 악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할 수 있었던 자유는 상실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는 선한것을 택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에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의 인간의 전적 부패와 그 결과로 인한 인간의 전적 무능력에 대한 강조는 의로운 삶에 대한 진정한 노력을 약화시키고 또 하나님을 모욕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여겼다. 그의 주장은 각 개인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악에 대한 성향이 없는 의지를 갖고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도 선을 택하도록 특별한 능력을 행사하시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은혜는 누구에게나 동등하다. 거룩에의 성장은 인간의 공적을 통해서만 이뤄진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예정하심은 각자의 삶의 질을선견하심에만 전적으로 기초한다. 율법은 복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한다. 어거스틴은 이에 반론을 제기하면서 그의 예정론을 발전시킨다.

그는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이단설로 정죄되었다. 어거스틴이 죽은지 1년후 지배적인 견해는 순수한 어거스틴주의가 아니고 반-펠라기우스주의였다(semi-pelagianism). 즉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으로 이뤄진다고 하는 협력교리가 지배적인 견해가 되었다. 이 입장은 529년에 오렌지회의에서 검토되어 정죄받았다. 그후 종교개혁 시대까지 카톨릭신학 내에서의 지배적인 흐름은 펠라기우스주의에로의 흐름이었다. 루터가 두각을 드러냈을 때 이 견해는 그가 반박했던 주요 내용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예정이란 인간이 앞으로 어떻게 행할것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에 기초한 것이라는 옥캄주의에 따랐으나, 어거스틴의 글을 연구하면서 어거스틴의 견해에 대한 모든 반대들은 육신의 지혜인 인간이성에서 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해서 결정적인 논술을 한 이는 칼빈이었다. 오늘까지 예정교리는 참으로 그의 이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또 자유롭게 어떤 이들은 택하시고, 또 다른이들은 유기하셨다고 주장했다. 그의 후계자 베자(Beza)는 하나님께서 어떤이들은 멸망시키기 위하여 창조하셨다고 주장하여 이 주장이 전택설 조만간 칼빈주의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널리 수납되게 되었다. 그후 알미우스는 이중예정 그리고 특히 베자의 전택설에 대해 확신한 바가 없었다.

그의 주장은, 하나님은 모든 이들에게 그들이 믿게 되도록 충분한 은혜를 수여하셨다. 그들 스스로의 결정으로 자유로이 그들은 믿거나 불신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앞으로 믿게 될 것으로 아시고 계신 이들을 예정하신다. 그후 웨슬리는 알미안주의를 일반화시켰다. 그는 알미니우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이 은혜는 이 세상에서 발견되는 모든 인간의 선한 것들의 기초가 된다. 이 선행하는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준다.

3) 예정론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

a. 칼빈주의

칼빈주의의 특징은 5대교리로 요약될 수 있다. 전적부패, 무조건적 예정, 제한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이다. 예정에 관한 교리를 살펴보기 위한 기본구조로써 그 개념들을 사용한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전 인류가 죄로 타락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전적부패의 개념을 강조하여 모든 인간들은 어떠한 제시가 주어져도 반응할 수 없다.

때때로 전적 무능력이라는 말은 인간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이 용어는 죄인은 선을 행할 능력을 잃어버렸으므로 스스로 개종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칼빈주의의 두번째 주요한 개념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개념은 인간의 무능력의 개념과 함께 선택에 대한 칼빈주의적 이해에 있어서 근본적인 요소들이다. 그 선택이란 어떤 몇몇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택이요, 효과적이며 끝까지 그 믿음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며, 영원전 부터 무조건적이며 불변적이다. 대개의 경우에 칼빈주의는 선택이란 자유의지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뵈 트너는 타락한 인류를 부러진 날개를 가진 새에 비유하여 “그 새는 날수 있는 자유는 있으나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고 이를 설명한다.

인간들은 의지의 무능력 때문에 그들이 반응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택하신이들에게 그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서 임하실 때에만 나타나게 된다. 그때에 그들은 그들의 죄악된 본성과 하나님의 사랑, 영광, 위대하심을 분명히 생생하게 보게 되며 틀림없이 그리고 의심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된다.

b. 알미안주의

알미안주의의 진술들이 어느정도는 다양한 형태를 갖고있으나 하나의 논리적인 출발점은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게 되기를 소원하고 계신다는 개념이다. 성경 곳곳에 우주적인 초대를 하는 구절이 나온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바가 아니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 모든 초대에 있어서 진실하시지 못한 것임에 틀림없다.

알미안주의의 두번째 주요한 개념은 모든 사람들은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거나, 구원의 조건들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균등하게 모든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은혜를 모두에게 주셨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구원에로의 초대에 응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었고 ,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특정한 개인들에게 특별하게 적용해야 할 필요는 없게 된다.

셋째의 기본적인 개념은 인간을 구원하기로 선택하시는 일에 있어서의 선지의 역할이다. 알미안의 입장에서 하나님은 얼마를 택하셔서 택정된 이들을 그의 무한한 지식속에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일 것을 미리 내다보았던 이들이다.

마지막으로 알미안들은 예정을 절대적으로 혹은 무조건적으로 이해하는 칼빈주의 견해를 반대한다. 인간이 모든 일에 있어서 예정에 의해서 결정된다면 거룩에로 향한 윤리적 요구는 더 이상 신자의 삶에 적절한 것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c. 칼 바르트(Karl Barth)

바젤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칼빈의 이중예정을 수정보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론적 예정론을 내세웠다. 가히 그의 예정론은 혁명적이었다. 그의 예정론의 핵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고서 예수 그 자신과 공동체인 이스라엘과 교회 그리고 개인의 위치에서 여러 각도로 예정론을 해석해 나간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의 주체이며 객체이다. 즉 하나님과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의 주체가 되어 선택한다. 그리고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선택의 객체가 되어 자신이 선택된다. 또한 영원전에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대신할 저주로 선택되었고,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구원으로 예정되었다. 이러한 예정은 일순간에 이루어지거나, 역사의 한 시점이 아니라 영원전부터 영원까지 이르는 하나의 모든 역사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선택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를 통해서 가능하다. 이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저버린 이스라엘이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가운데서 세워진 교회이며, 그 공동체의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사모하며, 받아들이고 믿는 모든 개인에게 전달된다.

그는 특히 전 신학의 전개를 그리스도 중심적 원리로 진행하였는데, 이 기독론 전개에 있어서 “만인구원론”적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오해 받는다. 그러나 그의 예정론을 만인구원설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자신에게는 심판과 죽음을, 인간에게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예정하셨다. 이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집행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회개와 신앙없는 사람을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으로 오해 되어져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모든 인간의 구원의 선택은 하나님의 결정이요, 약속이며 인간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이다. 이 하나님의 결정을 믿고 이것을 받아들일 때, 그의 죄악의 길에서 하나님의 길로 돌아올 때, 이 가능성은 실현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 그것은 여전히 가능성으로 남게 된다.

4) 합리적 해결을 위하여

앞에서 본 바와같이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기를 진지하게 열망하신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창조때 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백성을 선택하고 택정하였다고 동일한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합리적 해결방법은 두가지 방향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사람들이 진심으로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얻기에 충분한 은혜를 줄 것이다. 그러나 이 은혜는 언제라도 거절될 수 있다. 실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절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의도를 좌절시키게 된다. 이것은 알미니안적 해결방법인데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은 주권적은 아니시며 따라서 성경에서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진리를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

둘째, 성경이 분명히 선택과 유기에 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달된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바라신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들은자들 중 오직 선택된 자들만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를 원하셨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Calvinism) 이 주장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있으나 겔 33:11, 마 23:37, 고후 5:20, 벧후 3:9 등과 같은 성경과 정면으로 충돌된다. 각 견해는 그것이 옹호하고 있는 어떤것이 있는데, 전자는 좀더 온건하고 부드러워져서 실제적인 삶의 요구와 필요들을 고려하는 반면, 후자는 하나님을 정당화하려는 대신에 단순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것을 고려한다. 그들 각자는 진리의 요소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합리적 방향 모두를 배격해야 한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에 나타나고 있는 공통된 주장은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개념이다.

성경은 두가지 모두를 가르치고 있으므로 비록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 이 둘을 조화시킬 수 없다 하더라도 모두 받아들여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을 사람의 논리의 감옥속에 가두어 둘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역설을 유지시켜야 한다. 칼빈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의 신학적 관심을 합리적으로 일관성 있는 체계를 구축하는 일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가르침들에 충실하는 일이어야 한다.


제 5 장. 유효적 소명

1) 개 요

모든 인간들은 죄 때문에 구원의 길을 잃어버린바 되고, 영적으로 장님이며, 믿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복음초청에 대해 응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를 유효적 소명이라 부른다. 그러나 복음초청의 수락여부는 전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반-펠라기우스주의와 알미니안들). 이들의 견해는 인간의 의지의 자연적 능력에 의해서나(반-펠라기우스) 혹은 모든 인간들에게 주어진 충분한 은총때문에(알미니안) 복음초청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복음 초청의 반응에 대해 결정하시지도 않거나 관장하지도 않는다는 주장이다. 복음초청에 대한 결과는 오직 인간의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고 있지 않다.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있었기에(엡 2:4-5)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복음초청에 응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속에서, 성령의 특별한 사역으로 듣는자의 마음을 여시어 믿게 하시지 않는이상, 사람은 결코 복음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소명과 선택사이의 차이를 주목해야 한다. 선택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유효한 소명의 대상자들인 것이다. 소명이란 유효한 것이어야 한다. 즉 부름을 입은 모두는 실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부르심은 거절될 수도,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복음초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살아있는 관계속으로 이끌어온 효력있는 부르심을 뜻한다.

이 유효적 소명은 여러가지 점에 있어서 알미안들이 선행하는 은혜와 유사하다. 그러나 두가지 점에서 그 개념과 다르다. 이것은 택자들에게만 주어지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며, 또한 그것은 수혜자로 하여금 확실히 또 효과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2) 유효적 소명의 목표들

유효적 소명은 어떤 특정한 목표들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이미 부르심이란 개념속에 포함되어 있다. 신약성경을 하나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의 목표들이 무엇인가에 관해 여러 모양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부르심을 입었고(고전 1:9), 영원한 생명으로(딤전 6:12),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로(살전 2:12), 거룩한 삶에로(딤후 1:9), 경건한 고난의 모범이 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그리스도인의 자유와(갈 5:13), 화평을 위하여(골 3:15)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효력있는 부르심은 우리로 하여금 특별한 삶, 즉 지금의 악한 세상과는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분리하도록 하는 다른 종류의 삶을 살도록 촉구한다. 유효적 소명을 입은 자들은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부지런한 참여를 요구한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의 열매들이긴 하지만, 우리의 전적인 책임성을 요구한다. 이 부르심의 주권성과 그 효력성은 결코 인간의 책임성을 둔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책임성의 기반일 뿐아니라 책임성 자체를 확고히 하±瘦沮ö 한다.

3) 반대 의견들에 대한 고찰

유효적 부르심에 대한 몇몇 반대 의견을 살펴보는 것은 도움이 될것이나 반대의견 중 하나는, 이 교회를 복음전도열과 선교열을 오히려 식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단호하게 아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유효적 소명을 받아 구원에 이르게 되지만 누가 그러한자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전도를 위한 우리의 노력은 택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이다. 최종 목표를 작정하신 하나님은 동시에 그 목표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들도 작정하셨다. 선교가 하나님의 수단이라는 사실에 대한 지식을 그 모든 노력들을 위한 강한 동기를 부여하며 그것이 성공적으로 될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두번째 반대 주장은 다음과 같다. 믿지 않은 자들이 이 교리를 도구삼아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를 변명하게 된다는 것이며, 이에대해 성경은 복음의 초청을 거역하는 자는 오직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을뿐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요 5:39-40, 마 23:37, 행 13:46). 복음을 배척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은 효력적으로 부르시지 않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결코 말한적이 없다. 복음의 배척은 항상 인간이 믿기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불신앙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그를 통한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다.

마지막 반대주장은 하나님의 주권성과 인간의 책임성 간의 역설을 무시하는 결과를 빚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답변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론, 특히 타락후의 인간의 자연적 상태에 관한 견해에 의존하게 된다. 우리가 본성상 전적으로 죄가운데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 은혜를 통하여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다시 영적으로 살아나도록 하시기 전까지는 결코 우리가 복음의 초청에 대해 긍정적으로 응답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다면 절실하게 하나님의 효력있는 부르심이 필요한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일단 영적으로 살아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구원의 과정 속에 능동적으로 다시금 참여하게 된다. 이때에 회개와 믿음과 성화와 견인의 과정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의 최초의 순간에서는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먼저 영적으로 살림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홀로 남겨져 있으면 빠져 죽게 되는 죄의 흙탕물에서 부터 기적적인 구출이 우리에게 요청된다. 이러한 구출이 바로 효력있는 부르심속에서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속에 유효하게 된다.

제 6 장. 중 생

1) 개 요

인간은 변화받을 필요가 있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었으며 그래서 새로운 탄생 혹은 영적 새생명이 요구되는 것이다. 중생이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안에 심기워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미에서의 중생이다(요 3:3,5). 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날때를 가리켜 중생이라 한다(약 1:18, 벧전 1:23).

중생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인간은 변화받을 필요가 있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었으며 그래서 새로운 탄생 혹은 영적 새 생명이 요구되는 것이다. 중생하지 못한 이들을 성경에서 장님, 귀머거리, 죽은자들로 표현함은 그들이 영적으로 무감각한 상태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적 진리들을 깨달을 수도 없을 뿐아니라, 그들이 장님된 상태와 죄로 향하는 성향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도 없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성령의 특별하신 사역없이도 타락한 인간이 믿음안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중생이란 개념은 자연인의 본성이 전적으로 부패하였다는 사상과는 다른 관점에서 성령의 특별하신 사역없이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되어지면 중생의 본질에 대한 전혀 다른 이해가 개진될 것이다. 중생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역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2) 중생의 본질

a. 중생은 근본적 변화이다.

중생은 인간속에 새로운 영적 생명의 원리를 심어주어 영혼의 지배적 성향을 변화시켜 주는 것이다. 곧 지성과 의지와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중생이란 단지 행위의 변화, 생활의 개혁, 사상이나 언어, 행동의 혁신만이 아니라 중생시 성령은 이 오는 행위의 근원인 사람의 심령에 작용한다. 원리인 의식 중추 곧 자아, 마음, 영혼이 있음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 그런데 이와같이 인간존재의 중심이며 그의 사고와 의지, 정서 그리고 모든 행동의 중심인 마음을 성령께서 변화시키신다.

b. 중생은 갑작스런 변화이다.

점진적인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다.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에로의 변화라면 어찌 점진적일 수가 있겠는가 ? 언제 중생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으나 순간적임에는 틀림없다. 죽음과 생명 사이에는 중간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c. 중생은 초자연적 변화이다.

중생은 전적으로 초자연적 역사이다. 동시에 이것은 가장 강력하고 가장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놀랍고, 비밀스럽고, 표현될 수 없는 일로서 그 능력에 있어서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창조사역이나 부활보다 결코 뒤떨어지거나 열등하지 않다.

d. 중생은 잠재의식 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중생은 은밀한 것이며 또한 가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역이어서 인간으로서는 직접 이를 지각할 수 없고 다만 나타난 결과로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중생과 회심이 동시에 일어나는 경우에는 그 변화를 직접 의식하게 된다.

e. 성령께서 중생시에 절대적으로 주권적이시다.

그는 꼭 그가 원하시는 바를 행하신다. 인간은 성령의 뜻을 좌절시키거나, 중생을 어떤 방법으로 조정할 수 없다. 중생이 자기 손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중생이 하나님께 의존치 않고 믿음이나 회심에 좌우되며 따라서 거듭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예수를 자기 구주로 받아야 한다는 오류를 보여준다. 만일 신앙이나 회개가 중생보다 앞선다면, 인간의 구원이 성령의 절대적 주권에 속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알미니아니즘으로 될 수 밖에 없다. 성경에 의하면 신앙이 중생에 선행하고 그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신앙에 선행하고 그 원인이 된다. 그래서 존 머레이는 중생과 신앙과를 날카롭게 구분하여 신앙은 중생의 결과라고 했다.

3) 중생의 필요성

a.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요 3:3,5,7, 갈 6:15) 구주 예수의 이러한 말씀은 절대적이며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려면 성령의 중생 역사를 체험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나, 다른 어떤 방법, 기술 조직으로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한다. 사람은 완전히 타락했고 그의 인격 즉 그의 지능과 의지와 정서는 철저히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던 그 옛 모습을 상실했다. 그의 지능과 의지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중생 역사를 체험하여야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 나라를 볼수 있기 때문이다.

b.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이다(히 12:14).

거룩함, 하나님의 법에의 일치는 하나님의 호의를 보증하고 양심의 평화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다. 성경에 의하면 지금 인간은 성향과 행동에 있어서 이렇게 필수 불가결한 거룩함과는 정반대이다. 인간은 허물과 죄로 인해 죽었다고 서술되며,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생명의 회복이 그에게 가장 긴요한 것이다. 급진적 내적변화, 즉 영혼의 성향 전체가 전환되는 변화가 필수적이다.

끝으로 개요에서 언급했듯이 중생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함께 하는 역사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의 사역에 의해 우리는 중생되는 것이다.

제 7 장. 회 개

1) 개 요

신자의 첫 발걸음은 회심이라 불리운다. 그것은 자신의 죄로부터 돌아서는 회개와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믿음의 행위이다.

회심이란 두개의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은 요소들을 갖고 있는 하나의 사건이다. 즉 회개와 신앙이다. 회개란 불신자가 죄로부터 돌아서는 것이요, 신앙이란 그리스도에게로 향하여 나가는 것이다. 그것들은 하나의 동일한 사건의 긍정적인 그리고 부정적인 국면들일 뿐이다. 어떤 의미로 어느 하나의 국면은 다른 국면이 없이는 불완전한 것이다. 각각의 국면은 다른 국면이 통일이 된다. 우리가 죄를 깨닫고 그것에서 부터 돌이키게 될 때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되며 그래서 회개하게 된다. 이제 회심의 부정적인 요소인 회개의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면, 회개란 중생한 사람이 온전한 삶의 변화를 통해서 새로운 사고와 감정의 의지를 동반하면서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을 향하는 의식적인 돌아섬이라 정의를 내릴 수 있다.

2) 회심의 요소

회개는 단일적인 경험이다. 이말이 의미하는 바는 회개는 여러 부분들로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다음과 같은 측면들은 구별될 수 있다.

a. 지적인 요소

참된 회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존엄성을 아는 지식을 포함한다. 회개는 마땅히 우리 자신의 죄와 죄책을 인정하는 일과 우리의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법을 범하였음을 고백하는 인식이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죄를 기꺼이 사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자비하심에 대한 이해를 수반해야 한다.

b. 감정적인 측면

회개에는 감정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즉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에게 지은 죄를 애통하게 된다. 단지 죄의 결과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죄 자체에 대한 가슴저리는 슬픔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 심히 죄송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며, 그분을 서운하게 해드린 일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가장 깊은 슬픔은 십자가 밑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죄에 대한 비탄에 또한 기쁨도 있어야 한다. 기쁨이 상실되면 우리의 회개는 온전한 것이 아니다.

c. 의지적 측면

회개에는 의지적 요소가 있다. 이는 목적의 변화, 죄로부터 내적으로 멀어짐, 용서와 정결을 구하려는 성향을 말한다. 내면적인 변화는 반드시 외형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회개의 열매들을 맺어야 한다. 회개는 변화된 생활속에 표현되어야 한다. 진정한 회개는 전적 헌신이라고 할 수 있다.

3) 여러가지 형태의 회심

성경에 나오는 돌이킴의 형태들을 보면 여러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a. 민족적 회심

민족적 회심들은 도덕적 갱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개인들에게 있어서 어느정도 실제적인 종교적 회심을 수반했지만 민족 전체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의 진정한 회심은 결여하였다.

b. 일시적인 회심

심령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고 따라서 오직 과도적 중요성만을 지닌 개인들의 회심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께서는 이러한 회심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다. 다시 말해서 종종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 같으나 겉모양만 그렇다는 것이다.

c. 진정한 회심

진정한 회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서 나오며, 하나님에게로의 헌신의 삶을 일으킨다(고후 7:10). 이는 중생의 사역에 기초한 변화이며, 하나님의 영에 의해 죄인의 의식생활에서 일어나는 변화요, 이전의 삶의 방향이 현명치 못하고 잘못되었다는 자책을 포함하며, 생의 전 과정을 수정하는 생각과 의견, 욕망과 의지의 변화이다.

d. 반복적 회심

성경은 회심한 사람이 일시적으로 죄의 길에 빠진 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반복적 회심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것을 제 2의 회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정한 돌이킴은 다시 반복될 수 없는 것이지만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경우는 말한다.

4) 회심의 조성자

성경은 회개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역인 동시에 인간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회심의 조성자요, 인간은 회심에 협력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그들로 회개케 하실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신다.

회개의 은사를 사람들에게 주권적으로 부여하시고 그들로 자기에게 돌아오게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회개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에 의해서 가동되고 동기를 부여받을 뿐만아니라 그 의지 자체 역시 능동적이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인간은 그 은혜를 인하여 믿고 회개하도록 촉구되는 것이다.

5) 회개의 지속성

실제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한 순간이나 하루나 한해에 일어나지 않는다. 회개는 평생을 통하여 지속되어야 하고, 임종시에 끝이 나는 것이다. 회개가 평생의 작업이라는 사실은 몇몇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인 생활의 초반부에 있는 처음 회개와 그의 평생토록 계속 되어지는 회개사이에 구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둘째, 평생에 이르는 의미에서 회개가 근본적으로 성화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셋째, 회개는 결코 우리에 의해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회개는 이상이다.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드러내도록 계속해서 노력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생에서는 결코 온전히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회개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들 때문이다.


제 8 장. 신 앙

1) 개 요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믿음은 회개와 함께 돌이킴의 본질적 측면에서 구원의 필수요건이다. 회개가 자신의 죄로부터 돌아서게 되는 회심에서의 부정적인 국면이라고 한다면, 신앙이란 그리스도의 약속들과 사역을 붙잡는 긍정적인 국면인것이다. 신앙이란 복음의 핵심에 위치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매개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하는 신앙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써 전인격 즉 구원에 있어서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섬김에 대한 참된 서약으로그리스도를 받아들임이라고 할 수 있다.

2) 신앙의 요소

신앙의 제 요소들을 언급할 때 우리는 신앙이 전인적 인간의 행위요 부분적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더욱이 신앙은 인간의 정상적인 어떤 특별한 기능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이제 신앙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얻기 위해서는 신앙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a. 지식의 성격

우리가 알지 못한자나 잘못 알고 있는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자는 누구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충분히 알아야 한다. 성경은 지식이 없이는 참된 믿음이 있을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그 지식은 복음의 진리와 우리를 위한 구속사역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러면 복음을 어느정도 알아야 구원을 받는가 ? 이것은 말하기 쉽지 않다. 우리는 구속이 필요한 죄인이며,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죄와 하나님의 진노로 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살아나셨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b. 감정적 동의(assent)

찬동이란 하님의 말씀의 가르침들을 참되다고 확고히 받아들이는 행위를 뜻한다. 그런 찬동은 전 인격 즉 우리의 전 주체가 성경이 가르치는 죄, 그리스도의 구원, 그리고 우리의 생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들을 진리로서 받아들임이 포함되어야 한다.

c. 의지적 신뢰(trust)

믿음은 자신을 보지 아니하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공로들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을 의지하며 그분께서 행하신 것을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신뢰에는 순종이 또한 포함된다는 것을 첨가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순종하는 섬김으로 가야만 하기에 야고보의 말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이런 믿음의 세가지 측면들은 비록 때때로 어느 한면이 다른 면보다 더 중요할지라도 분리될 수 없다.

3) 신앙의 신비

신앙행위에 있어 하나님과 인간 모두가 능동적이다. 인간은 구원의 지식의 수용에 있어서 수용적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응답과 순종에 있어서 성령에 의하여 능동적이게 된다. 칼 바르트는 “신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며(work) 또한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역사(work)이다. 그것은 전적인 노예됨이며 또한 그것은 전적인 해방이다”라고 하였다. 반드시 주장해야 할 것은 인간의 활동은 하나님의 앞선 활동, 곧 무상의 은혜의 행동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으며, 또 그것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신앙은 그 본질에 있어서 받는 것이지만 그것은 실제에 있어서 주는 것이다. 즉 자신을 하나님께 주는 것 혹은 복종하는 것이다. 신앙은 동시에 받는 것이요 주는 것이다. 곧 하나님에게서 그분의 자비를 받고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며 드리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의 칭의에 관련되는 한에서는 빈 그릇이지만, 인간이 소명을 완수하는 것과 관련되어서는 창조적인 노력이다.

신앙의 신비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또 다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역설이 있다. 하나님의 선물로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믿음을 소유하도록 하지 않으시면 우리가 그런 참 믿음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포함한다(행13:48, 요일 5:1, 고전 12:3). 그러나 “믿다”란 단어를 찾아보면, 인간이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써 무엇인가를 해야하기에 주제는 인간이다(요 3:16, 롬 3:28). 비록 복음을 믿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지만 우리의 믿음이란 전혀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다. 구원받는 것은 엡 2:8-9에서 배운것처럼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기에 우리에게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기에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4) 구원의 확신

로마 카톨릭교회는 개인적 확신이 신앙의 본질에 속할 뿐아니라 반성된 행동 혹은 신앙의 열매라는 사실을 부여한다. 그리고 신자에게 특별한 계시에 의해 확신이 주어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자는 절대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이는 반펠라기우스주의와 로마 교회의 신앙고백적 체계의 소산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교회의 불합리하고 유해한 입장을 반대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교회에 대한 항거에 있어서 때때로 확신을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편협하게 강조하기도 했다. 그들은 때때로 구원의 확신 즉 그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긍정적 확신을 결여한 사람은 구원을 소유하지 못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신앙의 신뢰의 요소는 때로, 그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로 인해 용서받았다는 죄인 편에서의 확고한 신뢰로 표현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가 종종 모든 종류의 의심과 불확실성과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려 하지는 않았다.

칼빈은 신자가 때때로 구원의 확신이 부족할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신자란 자신의 불신과 함께 끝없이 갈등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신자는 자신의 구원의 확실성에 안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신자가 그런 완전하거나 이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믿음을 항상 체험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실질적으로 성도들 가운데 이미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하여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기는 커녕 오히려 근심과 불안 가운데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은것은 심리적으로 마음에 의지하여 구원을 확신하려 하거나 자신의 행윙에 바라보며 구원을 추측하거나 그것을 확신의 근거로 삼기에 그런 것이다.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구원을 이루셨고, 그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을 구원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이야말로 확신의 기초가 된다.

“이 확신은 공연히 지어낸 그릇된 소망에 근거한 추측이나 그럴듯한 신념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을 약속한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틀림없는 믿음의 확신이다. 그것은 약속된 은혜의 내적증거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 영과 더불어 증거하시는 성령의 증거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18장 2절)

5) 구원에 대한 현대의 그릇된 개념들

a. 지성주의

오늘날의 상황에서 빠지기 쉬운 함정중의 하나는 지성주의이다. 이것에 의하면 신앙은 주로 지적 동의의 관점에서 정의되며, 신앙의 대상은 인격적인 존재보다는 교리적 공식으로 여겨진다. 계시를 배타적으로 명제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신앙을 합리적 행동으로서 묘사한다.

b. 반 지성주의

또 다른 극단이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신앙은 아무런 인지적 내용도 소유하지 않는다고 즉 신앙은 근본적으로 초합리적이거나 반합리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과정신학자인 위이만(Heary Nalson Wieman) 역시 신앙을 인지로부터 분리시키는 새로운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실존주의, 신비주의, 과정신학의 관점에 대항하여 신앙은 참으로 초합리적인 행동인 동시에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신앙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 세속적 사상의 진리주장이 아니라 신앙 자체의 진리주장에 호소해야만 한다. 신앙은 오직 그 대상, 곧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c. 신-펠라기우스주의

다시금 부활하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항하여 우리는 어거스틴과 개혁가들과 더불어 받을만한 자격없이 받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재 천명해야 한다. 신앙이 은혜와는 상관없는 인간의 의지와 행동이거나 결단이 될 때, 우리는 신앙-도덕주의(faith-moralism)라는 이단에 봉착한다. 참으로 신앙이란 의지의 결단이기는 하나, 이것은 하나님의 무상의 은혜에 의해서 해방된 의지인 것이다. 신앙은 또한 모험이며 순례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 임하여 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은혜의 행위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며, 또한 불가피하게 되는 순례요 모험인 것이다.

d. 종교다원주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명시적 신앙없이도 가능하다는 작금이 널리 유행하는 입장에 대해서 경고해만 할 것이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교제 안에만 구원이 존재한다는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붕괴시켰기 때문이다(행 4:12).

신카톨릭주의에서도 역시 신앙없는 구원이 많은 신학자에게 주도적인 동기가 되어왔다. 한스큉의 사상에 의하면 비기독교적인 종교들은 구원에 이르는 통상적인 길을 상징하는 반면, 기독교는 구원의 특별한 길을 의미한다. 제 2차 바티칸공의회는 “자신의 과오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 혹은 그의 교회를 모르는 것이 아닌, 그러면서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자신의 행동을 통해 애쓰는자들, 이들고 또한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노니”라고 천명했다. 또 수많은 신학자들이 주장하는바 구원의 메시지를 들을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던 사람들은 결코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은 영적으로 잃어버린바 되었으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지식에 이르지 않는 한 멸망을 향하게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 가운데서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기회를 박탈하지 않도록 조처하시리라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리스도와의 의식적인 교제 안에 있지 않은 사람들이며 구원받았다거나 혹은 그들의 구원은 이미 확실하다는 망상에 빠져서는 절대 안된다.

e. 의식적 신앙없는 구원주의

고백적인 정통주의 계열에 있어서까지 의식적 신앙없는 구원의 개념이 매우 상당히 존재하고 있다. 전통주의적, 개혁주의 계열에서 계약공동체 내에서의 출생은 심지어 의식적 신앙과는 별개로 그에게 구원을 확신시킨다고 추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물론 영아와 유아는 그런 신앙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카톨릭과 루터교 계열에서는 세례자체가 인간을 중생시키며, 인간은 심지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없이도 구원된다고 일반적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루터는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활기있고 살아있는 신앙과 분리되어서는 상실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언젠가 은혜의 성례는 “그들이 신앙의 완전한 확신감 안에서 접근하지 않는한 유익이 되기는커녕 모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천명한바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유아세례의 관습은 특히 신약성경의 신앙에 대한 적가운데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세례의 성례를 지나치게 부당한 정통주의를 가지고서 강조하는 통에 우리는 실제로 중생의 교의에 관해서 이단이 될 정도이다. 니고데모에 의해서 제기된 반대와 그것에 대한 답을 잊어버리고서 과도한 정통주의로서 우리가 유아가 세례받음으로써 실제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천명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신앙을 통한 구원이라는 복음적 진리는 참으로 에큐메니칼적이고 참으로 성경적이기를 추구하는 어떤 에큐메니칼적인 교회에도 반영되어야만 한다. 믿는자의 교회라는 신약성경의 이상은 우리가 오늘날 회복시킬 필요가 절실하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제 9 장. 칭 의

1) 개 념

인류는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것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래서 칭의가 관계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칭의는 은혜로우면서도 법적인 하나님의 행위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믿는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의 것으로 양도되고, 그들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며, 그들을 자기의 자녀로 입적시키고, 또한 그들에게 영생을 누릴 권세를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칭의교리를 이해시 많은 고찰들이 열거된다.

첫째, 칭의는 하님의 진노의 실상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범했던 죄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쌓여져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깨닫지 못하고서는 우리가 칭의되어야 할 필요성은 결코 없을 것이다.

둘째, 칭의는 하나님의 선언적 혹은 법적인 행위이지 어떤 과정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은 우리의 착한 행실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하신다.

세째,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서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넷째, 칭의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자리를 바꾸어 우리의 신분과 입장이 되신것과 우리가 받아 마땅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신 것을 포함한다.

다섯째, 칭의는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을 다 가지고 있다. 소극적인 면에서 칭의는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의미한다. 적극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적되는 것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권리를 받게 되는 것을 포함한다.

여섯째, 칭의는 종말론적인 것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의 날 우리에게 선고하실 판결을 현재로 옮겨온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졌기 때문이다(요 5:24).

2) 믿음과 행함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비록 칭의로 인도하는 것은 믿음이지만, 새로이 탄생된 그 새로운 피조물의 본래적 성품은 불가피하게 행함을 낳게 되므로, 칭의란 결국 행함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는 근본적인 같은 요점을 말하고 있다. 즉 칭의받는 신앙은 선행으로 열매맺는 신앙인 것이다. 즉 칭의로 인도하는 믿음의 진실성은 그것으로부터 발생되는 결과속에서 결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선행이 따르지 않는다면 참된 믿음도 칭의도 없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 칭의란 그리스도와 연합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이 주장이 더욱 지지된다. 신자는 단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속으로만 들어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인간들이 있는 새로운 인류의 공동체 속으로 영입된 것이다.

3) 칭의와 성화의 차이점

칭의와 성화는 항상 함께 발생하지만 그것들은 역시 서로 주의깊게 구별되어져야 한다. 칭의에 대한 전통적인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이 범한 잘못중 하나는 칭의와 성화가 구별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칭의가 신자의 신생과 변화를 포함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즉 칭의에 있어서 인간은 공적을 포함시키고 있다.

다음과 같은 칭의와 성화의 차이점들이 인식되어야 한다.

첫째, 칭의는 죄에 대한 책임을 제거하는 반면 성화는 죄로 인한 오염을 제거하여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닮아 자라갈 수 있도록 한다.

둘째, 칭의는 신자의 밖에서 일어나며 성화는 신자의 안에서 일어난다.

셋째, 칭의는 단번에 일어나지만, 성화는 생애에 걸쳐서 계속되는 과정이다.

이런 구별을 하는 것은 칭의는 믿음을 가진 신자들에게 그들의 행위와는 전혀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4) 계속되는 죄의 영향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고 죄인들이 의롭다 함을 얻은 후에도 죄의 결과들은 계속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윗의 경우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짓고 그후 하나님께 징계를 받게 되는 것을 본다. 여기서 죄의 일시적인 결과와 영원한 결과들 사이에 구별을 할 필요가 있다. 어떤이가 칭함을 얻었을 때 죄의 영원한 형벌인 영원한 죽음을 면하지만, 개개인들에게 임하거나 집단적으로 전인류에게 임하는 죄의 일시적인 형벌들은 반드시 제거될 필요는 없다. 즉 우리는 신체적 죽음과 창세기 3장에서 주어진 다른 많은 심판의 내용들을 경험하고 있는데, 많은 이러한 죄의 형벌들은 신체적 성질의 것이든 사회적 성격이든 간에 인과관계속에서 우리의 죄로부터 기인하는 것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일반법칙들이 발생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기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죄란 가볍게 취급되어질 내용의 것은 아니다. 또 우리가 그것을 마음대로 추정해서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한없는 용서이며 이용가능한 것이다.


제 10 장. 성 화

1) 개 요

앞장에서 다룬 내용만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삶이 지향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회복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사역의 최종목표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 갱신의 사역을 시작하셨으므로 그 사역을 계속하시어 완성시키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있는 참여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죄의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의 본성 전체를 새롭게 하시어서 우리가 주님을 즐겁게 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를 성화라고 정의한다. 즉 지식과 의와 거룩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는 것이 인간의 성화이다. 성화가 제시하는 목표는 우리에게 알려진 바를 아는 것이며, 하나님이 거룩하심 같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2) 특 성

첫째, 성화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이신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뤄지는 초자연적 역사요 우리들이 말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둘째, 성화는 성령님의 사역이다. 굳은 결심, 끈질긴 노력, 과학 문명의 발달도 어떤 교육 철학 사상도 성령없이는 불가능하다.

셋째, 성화는 통상적으로 장구한 과정이며 이생에서 결코 완성에 도달할 수 없다 넷째, 신자의 성화는 영혼에 있어서는 사망 바로 그 순간에 혹은 사망 직후에 완성되며, 몸에 있어서는 부활시에 완성된다.

3) 성화의 완료문제

나사렛 교단, 오순절 교단, 알미안들은 신자가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 성화가 완료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죄를 지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아니고 단지 그 사람이 실제로 죄를 짓지 않고 있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은혜의 수단들이 더이상 필요없게 된다거나, 성령님은 더이상 불필요하게 된다거나 이제는 더이상 인간속에 있는 죄의 성향들과의 싸움이나 유혹이 없게 된다거나, 영적 성장을 더 해야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 주장은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 가능한 것이며, 실제로 어떤 신자들은 모든 죄악을 극복하고 잇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대개 완전주의를 반대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크리스챤 중에서 가장 위대했던 자들중의 한 사람인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불완전성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완전성화란 이생에서 경험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τελει라는 단어가 마태복음 5:48에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흠없다거나 결점이 없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온전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완전히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고서도 완전해질 수 있다. 결론Àº 죄로부터의 완전한 자유함과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가 우리가 목표하는 기준이고 또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목표이지만 어느 신자도 이생에서 그러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4) 성화의 조성자

성화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성화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즉 성황의 능력이 전적으로 그의 거룩하심을 의존하는 것이긴 하나 신자들은 그들의 구원에 관한 일들을 위해 노력하여 성장해 갈것을 항상 권고받고 있다. 그래서 죄에 관하여 죽은 인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로서 살아야 하며, 지체들을 하나님께 종으로 드려 성화에 이르러야 하며, 성령을 쫓아 행하여 율법의 요구를 성취시켜야 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분명한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5) 성화와 율법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자가 되고난 후 율법에 따라서 더이상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 는 성경의 말씀은 신자들이 자신의 구원을 위한 노력의 방편으로서 더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는 의미에서 신자들은 참으로 해방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구원의 상급 때문에 감사하는 표현의 방편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칼빈의 율법의 세번째 용도는 신자들이 사모하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날마다 더 철저하게 익혀가며 그것을 납득하며 확신케 하는데 최선의 도구가 된다. 또 율법을 지키는 것은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이요(요 15:10), 성령을 쫓아 행하는 것이다(롬 8:34). 야고보는 율법의 수행을 율법의 노예가 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자유를 가져다 준다고 교훈한다(약 1:25). 요한은 율법이 하나님을 아는것과 관계가 있으며 율법은 사랑의 완성이라고 표현한다(요일 2:3-5; 5:3).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편중의 하나이다.

6) 성화의 사회성

가끔 성화는 단지 성도 개인에게만 관계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심각한 착오이다. 성화는 중요한 사회적 공동체적 측면을 가진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단순히 개체적으로 성화되는 것 뿐만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의 일원으로서 성화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성화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개인에게 관계할 뿐만아니라 사회적인 요구를 포함한다고 가르친다(막 12:31, 레 18:18, 롬 13:10, 갈 5:14). 한국교회는 성화에 관심도 없고 성화에 대한 증거와 열매가 전혀 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은 성화되지 않은 자를 칭의하시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회적 관심없이 성화는 완성되지 않는다. 성화는 우리가 법률, 정치적 행위, 그리고 매개체의 사용을 통하여 전 분야에 정의가 시행되도록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또 성화의 성장은 환경에 대한 관심을 요구하고 세계의 빈곤에 대하여 책임의식을 가지는 것이며, 인류복지의 향상을 위한 사업에도 관계가 있다.

7) 성화의 목적

성화의 목적은 최종적인 목적과 그에 가까운 근사치적 목적이라는 두가지 관점으로부터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성화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 우리가 영광스런 신적 사역에 대하여 고찰함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해 행복이 아니라 단지 위대하신 우리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성화를 포함한 모든 구원의 놀라운 축복을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라는 최종목적으로 주어졌다.

성화의 가장 가까운 목적은 하나님 백성의 완전이다. 이 완전은 하나님 형상의 역사에 있어서 최종 단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가오는 생애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그 본체(성부)의 정확한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완전하게 닮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히 1:2).” 우리 성화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하고 전적인 형상,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는데 있다. 그것은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속에서 가능하다.


제 11 장. 영 화

1) 개 요

구원의 과정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를 영화라고 부른다. 영화란 구원론과 종말론이 겹치게 되는 곳인데 그것은 이 영화란 이생을 넘어서 앞으로 올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영화란 여러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개인적인 종말과 집단적인 종말과 연관된다. 이것은 신자 개개인들의 영적 성질들이 온전해지는 것을 포함하는데 그것은 죽을때에 이뤄진다. 그때에 신자들은 주님앞으로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또한 모든 신자들의 육신이 온전해지는 것도 포함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모든이들이 부활하면서 이뤄진다.

2) 성도의 영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재림시에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모든 참 신자들도 또한 영광스럽게 되는 것을 깨닫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신자의 영화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 그것은 신자가 온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정당화되게 되는것을 말한다. 중생시에 주어졌던 칭의가 앞으로 더 분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미래의 심판을 고려해보면 그 심판은 칭의받은 신자의 신분을 최종적으로 선언해 주시는 행위가 될 것이다.

영화안에서 또한 도덕적이고 영적인 역사가 있게 된다. 우리의 도덕적, 영적 완성은 시험되는 일을 제거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성취되는데 그것은 바로 죄와 악한 것 그리고 시험들의 근원이 미래에 확정적으로 극복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오게 될 영화는 또한 지식의 충만함을 가져다 주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아마도 영혼이 영화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몸의 영화라는 것도 있다. 그것은 신자가 부활하는 것과 관련하여 발생한다. 우리의 몸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유사한 양식의 상태로 변화될 것을 가리킨다.

끝으로 우리는 신자들의 영화와 전 피조물의 새롭게 되는것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피조물은 현재 허무한데 굴복하는 상태에 있다(롬 8:18-25). 그러나 바울은 말하기를 “피조물들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될 것이라 한다.


제 12 장. 성도의 견인

1) 개 요

신자들은 때때로 자신의 구원을 상실할까봐 두려워하며 불안해한다. 그러나 참된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은 믿음을 전적으로 또는 마침내 잃어버릴 수 없다. 우리의 믿음이 끝까지 안전하게 유지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견인은 성도들에게 참된 위로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견인이란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되므로 이생에서의 모든 시련들과 시험들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죽음에 이르기가지 주님께 신실한 자로 남아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타락할 수 없다고 언급된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며, 중생한 사람들이며,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된 사람들임을 주의해야 한다. 계속해서 신앙고백하는 성도들은 은혜의 자리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 없다. 참 신자들은 그들의 구원을 잃을 수 없으며 구원받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할 수도 없다. 이런까닭에 이 견인 교리는 구원받은 다수의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도 관계가 없다고 가르치는 일반적인 의견을 거절한다. 이 진술이 결론하는 바 신자들은 영원히 구원받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의 구원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2) 견인 교리에 대한 반대론

a. 견인 교리는 나태와 방종으로 인도한다.

반대의견은 성도의 견인이 하나님에 의해서 보장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삶의 길에 부주의하게 되고 죄에 대항하여 투쟁하기를 중지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세속적이며, 미온하게 되기 쉽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릇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보호 받는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이 교리는 우리가 우리편에서의 지속적인 경계와 열심, 기도없이 지내도록 방임한다는 사상을 전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자에게 거룩함으로의 견인을 확신시키는 교리가 어떻게 죄의 동기가 될 수 있겠는가 ? 성화를 위한 능동적인 노력이 성공하리라는 확신은 보다 더 성화를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데 있어서 최고의 자극이 될 것이다.

b. 자유의지와 모순이 된다.

견인의 교리가 인간의 자유와 모순된다는 주장이 있다. 대개 자유의지는 잘못된 선택을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구성된다는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거룩함의 방향으로의 자기 결정이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방향으로 의식적으로 움직일때보다 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그러한 자유를 누린다. 하나님께서는 선택의 가능성을 제거함으로써 견인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성경에 담겨진 경고들과 같이 모든 가능한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시어 우리가 그분에게 계속 신실한 삶으로 살아가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시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믿음안에서 견인해 낼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므로 성도가 보존되는 것이다.

c. 견인 교리는 성경과 상충된다.

성경에 보면 믿음을 지속하라는 권면이 나온다(마 10:22, 요 8:31, 요 15:5, 고전 16:13). 그리고 배교에 대한 경고가 내포되어 있고(히 2:1), 실제로 변절한 사람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그래서 이러한 증거들은 참 신자의 견인교리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들은 견인교리에 대한 오해를 반대하면서 우리에게 경고한다. 그들은 견인 교리에 있어서 우리의 책임의 부분에 강조를 두고 있다. 그리고 사도들은 역시 우리에게 인내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어떤 방편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주지시킨다. 이 성구들 속에는 훈계, 경고,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과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배교에 대한 경고는 타락할 가능성은 있지만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 신자들은 타락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을 이들에 대해서 서신서는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교자라는 사실은 하나의 논리적인 가능성을 띠고 있으나, 실제로는 신자에게 발생하는 현상은 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믿음을 저버리고 믿음에서 떨어질 수는 있겠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게 타락하지 못하도록 보호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호하시되 신자들이 타락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만드심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확고히 하심으로써이다. 할수는 있으나, 하려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논리는 비 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다. 신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포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포기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변절자와 실제적으로 참 신자로 인정된 사람들이 변절하는 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중생한 자요, 참 신앙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 즉 어떤이가 신자인 것을 주관적으로 확신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그 신자의 삶속에서 일하고 계신 증거들을 성령님께서 보여주심으로 갖게 된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이의 헌신이 진실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다 주는 곳에서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 신자를 그 관계속에서 계속할 ¼ö 있도록 하신다는 즉 어느것도 그 신자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성경의 내용에 대한 확신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고귀한 믿음을 유지케 하는 것은 깨뜨려질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언약이다.


제 13 장. 구원의 방식과 범위

1) 구원의 방식에 대한 견해들

구원에 관한 두가지의 중요한 주제들이 더 남아있다. 첫번째의 주제는 무슨방식으로 구원이 유효하게 취득되는 것인가이고 두번째의 내용은 구원의 범위에 대한 것이다.

구원이 어떠한 방식으로 얻어지게 되느냐 하는 문제는 구원의 성격에 대한 그 사람의 이해에 좌우된다. 그러나 구원의 성격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같은 이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 구원의 방식에 대해 다른 견해들이 주장되고 있다.

a. 해방신학의 견해

해방신학은 구원을 모든 이들의 해방으로 본다는 점이다. 구원이란 모든이들의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인종간의 평등을 누리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방향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단지 교회나 종교적 행위만으로서 뿐아니라 여러가지 수단들을 통하여 성취된다. 사실상 구원은 주로 정치적 운동의 수단으로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는 혁명과 폭력을 통해서 이루어져 간다. 이들의 구원방식에는 몇가지 문제점들이 있다.

첫째, 정치. 경제. 사회의 해방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성경에서 보다 근본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영적운명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영적운명의 결정보다는 부차적인 것들이다.

둘째, 억압되고 결핍된 이들에 의한 폭력사용을 정당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많은 부분과 대치가 된다(마 5:39, 눅 6:29). 해방신학은 무력사용에 대한 정당한 논리를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

b. 성례주의자들의 견해

구원 방식에 대한 두번째의 주요한 견해는 교회의 성례들을 통하여 구원이 전달되며 받아들여지게 된다는 것이다.

성례와 같은 행위들은 죄인을 칭의하는데 필수적인 것들이요, 실제로 은혜를 전달해주고 유효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다른말로 하면 그것들은 효력이 발생하는 표식들이다. 성례자체가 은혜를 수여하게 하는 유효한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실제적으로 성례에 의해서 효력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구원을 가져다 주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얻고자 하면 우리는 성례들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구원 방식에도 몇가지 문제점들이 있다.

첫째, 성경에서 그러한 성례의 객관적 유효성을 분명하게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그리고 제사장 직임이 유일하고 독특한 역할을 갖고 있다는 사상도 성경에서 분명하게 표현되는 내용이 아니다.

둘째, 성례가 그 자체로부터 효력을 나타나게 된다면, 구원하는 믿음은 다소 수동적인 것으로 만들게 된다.

c. 복음주의적 견해

복음주의의 견해는 이미 성례주의 견해와 해방신학의 견해들을 평가하면서 설명이 되었다. 복음주의 견해에 있어서는 구원의 문제를 취급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을 구원의 방편으로 든다. 그러나 성경이 곳곳에서 구원에 있어서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행위는 구원에 이르는 것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일이다. 선한 행위들이란 구원으로부터 발생되는 것으로 여겨야 하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행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비록 행함이 구원을 받게 하는 수단이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지는 않지만 참 믿음이란 그것이 만들어 내는 행함에 의해서 입증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행함을 보일수 없는 믿음이란 참 믿음이 될 수 없다. 반대로 믿음과 그리스도와의 바른 관계로 부터 이뤄지지 않은 행함도 심판의 날에 아무런 의도 갖게 되지 않을 것이다.

2) 구원의 범위

이제 누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자. 모든이들이 구원받게 될 것인지 아니면 제한적으로 구원받게 되는 것인지 살펴보기도 한다.

만인 구원설의 견해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는 대상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라는 견해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속죄 역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이 주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의 속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실제로 성경에 만인구원설을 내포하는 말씀들이 있다(롬 11:32, 고전 15:22). 그러나 이에 반대되는 말씀들이 더 많다(히 6:4-6, 마 25:46). 이들은 악인이 멸망하게 된다는 구절들은 하나의 실제적인 상황이라기 보다는 가설적인 표현으로 이해한다. 다른말로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거부한다고 했을 때 발생될 수 있는 가능성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신약성경 안에 조화되지 않은 전통들이 있음을 수락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 하나의 대안은 만인 구원설적 성구들을 제한 구원주의의 성구들과 조화될 수 있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비는 모든 인류에게 제시되었다. 그러나 오직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만이 구원을 경험하고 그 은택을 입게 된다. 이처럼 구원이란 우주적으로 제공되는 것이지만 만인 구원설적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성경의 증언들을 가장 충실하게 설명해 주는 설명이다. 이것은 복음전도의 노력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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