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섬김의 지도자­예수 그리스도

이 경 재 (장로회 부산신학교 교수/신약학)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매스컴에 분주히 등장하는 사회 지도자들을 눈여겨보고 있는 시점에 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제각기 "내가 국가를 이끌 지도자로서 적격자"라는 논리로 국민을 설득한다. 이즈음에 우리 기독인들은 국가가 필요로 하고 국민 대중이 원하는 지도력이 무엇인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지도력의 본질이 어떠해야 하는지, 어떤 인격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지, 혹은 지도자의 구체적인 인격을 검토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성서 안에 가장 대표적인 지도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주로 복음서 안에서 살펴봄으로, 논고에서는 기독교적인 올바른 지도자 상을 추슬러 보고자 한다.

2. 예수님에게 "지도자"라는 호칭이 가능한가?

2.1. 신약성서에서 "지도자"(a leader) 혹은 "지도하다"(to lead) 해당하는 어휘들을 대략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명사형으로 "지도자"는 a*rchgoV", h&gouvmeno", o&dhvgo", e*pivskopo", e*pivtropo", e*pistavth", prwtostavth", paidagwnov", kaqhghthv", 혹은 e*piskophv 등이며, 동사형으로 "지도하다"는 h&neomai, o&dhnevw, poimaivnw 등이다. 논의에 앞서, 구체적으로 위의 어휘들에 대한 용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1) 아르케고스(a*rchgoV")­이 말은 칠십인 역에서 통상 백성들의 정치적 혹은 군사적 지도자를 의미했다. 신약성서에서는 4 사용되는데, 3:15 "생명의 주"(a*rchnoV" th'" zwh'"), 5:31 "임금과 구주"(a*rchnoVn kaiV swth'ra), 2:10 "구원의 주", 12:2 "믿음의 주" 등이다. 이는 초기교회가 말을 변증적 설교의 맥락에서 죽음에서 부활하여 보좌에 오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도록 사용했음을 알게 한다.

2) 헤구메노스(h&gouvmeno")­ 말은 신약성서에서 8 사용된다( 2:6, 22:26, 7:10, 14:12, 15:22, 13:7, 17, 24). 말을 마태는 2:6에서 미가 5:1, 3 왕하 5:2 결합해 종말론적 왕으로서 백성의 선한 지도자로 이해하며, 행전과 히브리서에서도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책임을 맡은 목회자들이나 신앙의 모범자들로 이해한다. 특히, 10:43-44("누가 자인가") 자료로 하여, 누가는 22:26에서 "지도자"는 "섬기는 자"이어야 함을 말한다( 22:26, 27b, 10:43, 45 참조).

3) 호데고스(o&dhvgo")­이 말은 칠십인 역에 거의 나오지 않지만, 신약에서는 "지도자"나 "안내자"로 사용한다. 1:16에서 예수님을 대적자들에게 안내한 가룟유다에게 적용하며, 마태 23(16, 24, 참조. 15:14)에서는 소경 인도자인 바리새인을 가리킨다. 특히 16:13 "인도하다"(o&dhnevw) 말을 통해 14:26 "보혜사 성령"(paravklhto") 관련하여, 지상의 예수 자신도 인도자로 제자들을 가르치며 지도했음을 말한다.

4) 에피스코포스(e*pivskopo")­이 말은 성서 밖의 헬라어와 유대교에서는 하나님, 감독자인 인간, 견유학파 사람, 혹은 어떤 직책의 이름으로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5회만이 사용된다. 벧전 2:25에는 '그리스도' 자신을 그렇게 불렀고, 나머지 구절에서는 대체로 초기교회 내의 '지도자'를 가리킨다( 20:28, 1:1, 딤전 3:2, 1:7). 아마도 말은 교회의 발전 과정 속에서 "장로"와 같이 책임있는 자를 가리키다가, 목회서신의 교회에 와서는 구별된 직책으로 말해졌을 것이다.

5) 에피스타테스(e*pistavth")­이 말은 세속 헬라어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지도자'를 주로 가리켰다. 그러나 신약성서에는 누가복음에서만 호격(e*pistavta)으로 7 사용된다( 5:5, 8:24, 45, 9:33, 49, 17:13). 복음서 기자 누가는 다른 복음서의 "랍비"(r&abbiv), "교사"(didavskale), "주님"(kuvrie) 대신하여 말을 편집 삽입어로 사용한다. 누가는 제자 공동체를 지도한 지상의 예수님을 회상하며, 역시 지금도 그가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a true leader)임을 말한다.

6) 카데게테스(kaqhghthv")­이 말은 신약성서에서 23:10에서만 2 사용되었다. 물론 말이 "교사"나 "()안내자" 등을 가리키지만, 마태 23장의 맥락에서 마태는 예수님만이 제자들에게 "유일한 지도자"일 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님은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니 그리스도니라"로 말한다.

2.2. 우리는 이미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을 "지도자"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살펴보았다. 막스 베버(M. Weber) 지도자론에 따르면, 지도력(leadership)이란 지도자와 추종자들 모두가 가치들, 동기들, 희망들을 구체화 시키기 위해 어떤 추상적인 목표들을 향해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과정으로 정의된다. 그런데 초기교회는 바로 자신들의 교회적 지도력을 예수 그리스도에서 찾으려 했으며 지상의 예수님을 지도자로 이해하며 따라야 모범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더구나 이런 이해의 뿌리는 지상의 예수님에서 출발해야 함이 사회학적으로 타당하다. 결국 예수님의 지도력은 자신의 기독론적 혹은 종말론적 이해의 지평과 더불어 초기교회의 신앙 고백적 선포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나아가 그것은 일반적인 카리스마적 지도자라는 개념의 테두리를 넘어서 '구원자'라는 신적 인간의 성격을 띄게 되는 것이다.

2.3. 초기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주님으로서만 아니라, 참된 지도자로 이해했으며, 교회 공동체인 자신들은 그를 따르는 선택된 무리 혹은 제자들로 이해했음을 있다. 특히 누가의 이해는 분명하다. 누가는 제자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을 "e*pistavta" 부르도록 하며, 22:24-33에서는 그런 예수님의 지도자적 모습이 제자들과의 관계로 더욱 구체화되어 드러난다. , 유월절 만찬(14-23) 이어서, 제자들은 누가 크냐? 다툰다(24-30).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지도자는 섬기는 자"(26) 말하면서, 바로 자신이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고 말한다(27). 이런 맥락에서 누가는 예수님을 제자들의 지도자(o& h&gouvmeno", '두목') 이해한다. 더불어, 편집구인 28-33절에서 누가는 맥락을 확대시킨다. , 예수님이 제자들의 모범으로 수난의 길을 갔듯이, 지금 제자 공동체들도 종말론적인 심판과 " 나라"를 소망하며 그들 자신도 다른 "형제들"을 지도해야 함을 말한다. 결국 누가는 교회의 지도력이 주님의 말씀에 있었고 지상의 예수님이 교회 지도자의 원형(proto-type)이었음을 회고하며, 동시에 누가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행전의 베드로와 바울처럼 역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해는 16:13에서도 동일하다.

2.4. 이러한 검토로, 우리는 이미 초기 교회로부터 지상의 예수님은 교회 공동체를 이끌고 안내하며 지도하는 제자들의 지도자로 이해했음을 보게 된다. 물론 예수님에 대한 기독론적인 몇몇 호칭들과는 달리, 예수님이 지상 활동에서 위의 호칭들이 분에게 직접 사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을 경험한 초기 교회에 얼마간 시간이 경과한 이후에, 교회 안에 지도력의 대두라는 교회의 자리에서 지도자였던 지상의 예수님을 자연스레 회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이해는 실제로 예수님 자신이 이미 언급한 호칭들로 자신을 말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 진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의 "지도자"였다. 12명의 제자들이, 혹은 다른 이들이 그를 누구로 이해하고 불렀던지 간에, 그는 새로운 목표와 이상을 제시하며, 그의 추종자들을 모으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앞서 나가며 자신의 지도력을 생명으로 바친 지도자였다( 10:11-18 참조. 8:27 이하).

3. 신약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지도자론

만약 초기교회가 지상의 예수님을 회고하면서 그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이해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예수님 자신은 자기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23:8-12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락의 전승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랍비"나 "지도자"로 불려지는 것을 허락치 않았다( 23:8,10). 23:8-11 따르면, "랍비", "아비"(일종의 스승), "지도자" 등으로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호칭은 그리스도처럼 '섬기는 자'에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는 오직 - 그리스도 - 만이 그런 호칭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마태는 "랍비"(r&abbiv)­"아비"(pathvr)­"지도자"(kaqhghthv")­"그리스도"(Cristov")­"섬기는 자"(diavkono")라는 도식을 통해, 섬김의 지도자인 그리스도를 마태 교회의 모범으로 회상시키고 있는 것이다(참조. 23:8-9). 그러면, 이런 호칭의 사용이 전적으로 초기교회로만 돌려져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3.1. 지도자로서의 권위

사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지도력의 바탕을 예루살렘 성전과 제의 율법에 두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에세네파나 제롯당은 그러한 기존의 세력이 이끄는 지도력에 반대하거나 대항했던 자들이었지만, 사두개파나 바리새파를 포함한 그들 모두는 자신들의 지도력이 이스라엘 대중에 보다 영향력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했나? 예수님은 영향력있는 지도자였나? 그렇지 못했다. 사실 그의 지도력은 결과적으로 대중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공관복음서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 고난의 길을 걸어간 예수님의 인격으로­즉, 그의 말씀과 행위로­예수님의 지도력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복음서에 나오는 성전청결 사건( 11:15-19) 그에 따른 권위에 관한 논쟁 이야기( 11:27-33) 이를 보여준다. 수난의 맥락에서 이런 예수님의 도발 행위는 메시아적 상징을 선지자적 행위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모든 이들을 위한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스스로 촉발시키며 새로운 성전(공동체) 회복을 뜻하는 종말론적 상징행위를 행한다. 이로 보건대, 예수님은 자신의 지도력을 의식적으로 십자가의 죽음과 연관시키고 있으며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한 "자기 중심적" 중재자로 자신을 이해하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권위였다(참조. 1:27, 2:10, 28, 4:41, 11:18, 27-33).

3.2. 삶의 자리

3.2.1. 예수님의 삶의 자리는 모든 이들을 이끄는 현장을 의미한다. 물론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당시에 팔레스틴 지역에는 많은 회당이 있었고 여기서 많은 대중들은 율법을 만나고 안식일 예배에 참석할 있었을 것이다(참조. 4:20).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요한의 연대기를 고려해 , 복음서도 예수님의 활동의 자리를 우선은 예루살렘 성전과 여러 회당으로 정했다고 생각할 있다. 이는 기존의 제도와 전통의 틀에 바탕하여 자신의 입지를 마련해 가는 예수님의 모습인 것이다. 더구나 예수님의 체포와 수난이 예루살렘 안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그의 지도력의 경로는 얼마간 일반 지도자와 다를 바가 없다. 14:49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러 자들에게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고 말한다. 이는 그의 지도력이 성전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지도력의 우선성이 사회적 적법성을 유지코자 하는데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3.2.2. 그러나 우리는 한번 예수님이 머리 곳도 없이 이리저리 떠돌았던 유랑자적인 카리스마이기도 했음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9:58, 8:20). 사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인 사제들, 랍비들, 서기관들은 정해진 장소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지도했던 반면에, 예수님은 제한된 대중이나 닫혀진 공간이 아니라 열려진 공간에서 모든 이들을 찾아나서며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당시 있던 에세네파의 쿰란처럼 금욕적 은둔생활을 강요하거나, 제롯당처럼 어떤 정치적, 군사적 혁명운동을 부추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때를 분별하며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자기 인격 안에서 화해와 섬김의 복음으로 선포했던 것이다( 1:15, 4:18-19).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당시 유대교에 의해 소외된 자들­세리, 죄인, 간음한 여자, 각색 병든 , 소경, 문둥병자, 여자들, 가난한 자들, 귀신들린 등­을 찾아 다니며 그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 그들을 하나님 나라에 초대하기도 했다( 2:15-17 참조).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의 삶의 자리는 마을 마을을 유랑하며 닫힌 사회적, 종교적 공간을 의도적으로 깨트리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우는 운동에 있었다.

3.3. 지도자론

예수님은 자신을 추종하는 많은 무리들 중에서 그의 말과 행위를 모범으로 삼고 배우려는 자들을 자신의 제자로 삼으셨다( 3:13-19). 그러나 제자들을 부름이 오직 예수 자신의 주도권에 의해 이루어진다. 배타적으로 그들에게 당시의 다른 지도자와 어떤 관계도 허락지 않았다( 23:8-10). 이는 예수님의 지도자 의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사실 그는 하나님 나라, 율법의 해석, 일상생활 규범,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활동규칙 등에 대해 자신의 말과 행위를 통해 철저히 가르치려 했으며 역시 자신의 제자들을 다시 세상에 파송하면서 사명을 주고 행동 지침을 주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려 했다( 6:6-13, 10:1, 5-15, 9:1-6, 10:1 이하). 유대교의 지도력이 율법에 대한 결의론적 해석에 치중한 유대교의 자의적이고 편파적인 해석에 기반을 둔데 반하여, 그의 지도력은 보다 인간 중심적인 법의 정신과 그의 종말론적 지평에 의해 이끌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시의 지도 세력들과 갈등을 야기시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3.1. 지도력의 동기들

예수님은 천편일률적으로 상대방을 고려치 않고 자기만을 중심으로 해서 말하거나 행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항상 상대방의 처해진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말했다. 자신의 생각에만 몰입하는 황당무개한 지도자가 아니라, 너와 나의 만남으로 이뤄진 공통된 상황의 일치점을 중심 주제로 하여 사건을 판단하고 해석하며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면 그런 예수님의 지도력은 전적으로 천부적이었나? 그렇지만은 않다. 복음서는 그의 여러 가지 경험을 말한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결정적 경험으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받은 수세사건을 들고 있다( 1:9-11 병행구절). 예수님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고 '너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를 듣는다. 이런 영적 체험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경험한 그런 소명에 따른 환상 이야기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예수님의 확실한 자기 소명의식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 예수님에게 어떤 자의식(自意識) 비로소 확정되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지도력의 중요 동기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1) 먼저는,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 자"라는 자의식(自意識)이다( 1:38 병행, 10:45 병행, 5: 17, 15:24, 10:34-35, 12:49). 이는 "나는 …이다"(e*gwv ei*mi) 예수님의 독특한 말투에서도 잘드러난다. 그런데 이런 자기 정체성이 신적인 필연성에 의해 정해진 삶의 자리에서 일시적으로 체득되었다기 보다는, 점진적이며 다양한 삶의 경험에 의해 연속적으로 획득된 것이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 세례요한과의 만남, 수세사건, 마귀와의 시험사화, 각계각층과의 만남과 인간관계, 제자 파송, 율법에 대한 논쟁, 죄용서의 선포 등등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송된 자라는 지도자 의식을 체득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파송된 자로서의 다양한 삶의 여정을 경험하며 고난의 길을 스스로 밟아 나가는 지도자였다.

2) 둘째는, 그의 "() 선지자" 의식이다( 13:33, 23:31 이하, 37-39 병행, 6:4 병행구절).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을 소유했다고 주장했다( 3:28 이하, 12:28, 61:1 참조). 이는 그의 선지자적 권위와 연관한다. 역시 백성들도, 제자들도, 심지어 바리새인도 그를 선지자로 이해한다. 그는 61:1 영의 약속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며, "끊어진 영"에 대한 공유로 종말론적 회복을 제자들에게 기대했다. 종말론적 하나님의 영은 아버지­아들­따르는 자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도록 하며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아들"의 자격을 부여한다. 이런 창조적 관계를 드러내는 말이 부름말 "아바"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율법적 권위가 아닌, 가족적 사랑으로 이해하도록 했다. 이것은 그의 종말론적 지평과 더불어 기존의 제도권에 대한 도전으로 비쳐지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연히 새로운 이단적 지도자로 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참조. 1:22, 27, 2:10, 11:27-33).

3) 셋째는, 그의 메시아적 "인자" 의식이다. 수세사건( 1:11) 시험사화( 1:12-13) 통해 이미 세례요한에 의해 예고된 인자-메시아로서 예수님은 자신을 새롭게 인식한다(참조. 1:7 병행). 이런 "최초의 결단"을 통해 그는 점진적으로 메시아적 인자의 길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엄격한 "아들됨의 순종"(A. Schlatter)으로 걸어가도록 하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종적인 결단"에 이른다. 이처럼 예수님은 홀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아들과 인자-메시아로 나아갔고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 예수님 자신은 "가난한 자"에 대한 극진한 헌신(cf. 61:1-2), 사랑의 섬김( 19:10, 10:42-45, 13:2-17), 또한 자신의 대속적 고난을 통해, 새롭게 자신을 이스라엘과 일치시키려 한다.

3.3.2. 지도 방법론

우리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지도자로서 예수님의 자의식과 그것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런 예수님이 어떻게 다른 이들을 지도하려 했고 지도했는지를 알기 위해, 여기서 어떤 체계적인 방법론을 추출 해내기 보다는 일괄적으로 예수님의 특징적 활동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살펴보려 한다.

1)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적이지만 비유적이어서 성격상 제한된 자들에게만 이해될 있는 영역이었다(참조. 4:11-12). 그는 이스라엘의 모든 자를 자신의 자리에 초대했지만, 세리, 죄인, 가난한 , 등과 같은 하층민들이 초대에 응할 뿐이었다(참조. 14:7-14, 4:18 이하, 11:5, 참조. 2:17b), 그의 초대에 응한 자들은 속옷조차도 빼앗기며, 이리저리 끌려 다녀야만 하는 형편에 놓여 있었다( 5:40-41). 한편, 지도층 인사들은 율법과 제사는 원하면서 이웃에 대한 자비는 원치 않았다( 12:7, 참조. 2:23 이하). 화려한 궁전과 쌓이는 재물에 정신이 팔려 그것들을 의인의 축복과 평안으로 오해했다. 이런 사회적 갈등이 결국 자신들의 자멸임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가난한 자들의 종교적, 경제적 "빈곤의 악순환"이 당연한 현실이었다. , 갈릴리 나사렛 출신 예수님이 이스라엘 사회에 등장했던 것이다.

2) 예수님은 자신의 인격을 통해 사회적 현실이 역전되기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약속했다. 약속은 이스라엘을 향한 새로운 비존이며 새로운 지도력이었다. 약속은 물질의 만족을 넘어서서 "하나님 자녀로서의 확신"을 체험케 하는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그런 새로운 확신의 자리는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되며 행동으로 옮겨지는 현장이기도 했다. 현장은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하나의 비젼(the vision) 통해 서로가 만나는 삶의 자리였다. 예수님은 랍비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율법에 대한 문자의 해석과 행위적 모범이라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모든 이들에게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혹은 새로운 신율의 나라를 경험하도록 무리들을 초대하고 지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밖에 있던 자들은 예수님이 새로운 왕국을 꿈꾸며 자신의 지도력을 땅에 확장시켜 나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심지어 가까이 있던 제자들도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 10:11, 26:31b 참조) 보기 보다는, 군단이나 되는 천사를 부릴 있는 그런 지도자( 26:53) 생각했을 뿐이었다.

3)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의 지도자였다. 이는 남을 자유케 하는 고난의 섬김을 뜻한다. 예수님은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을아내며( 1:32-34, 21-28, 3:1-6, 5:1-43), 세리나 죄인들과 식탁교제를 의도적으로 한다( 2:15-17, 9:10-13). 그런 일들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베푸는 용서의 샬롬에 그들을 동참하게 함으로, 상처난 자리를 싸매고 병치유의 자리에 들게 한다. 이렇게 사회 속에 함께 나눔의 자리를 공유하는 것이 하나님 자녀가 누려야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친히 그것을 몸으로써 보여 주었다. ,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로서 메시아적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있을 용서와 화해를 초대의 현장에서 종말론적으로 경험케 한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과 행위 앞에는 의인과 죄인, 정결과 부정, 부자와 빈자라는 이분법적 차별이 없어진다. 그는 율법의 행위 규범으로 인간을 파악하지 않고 믿음의 법인 섬김과 사랑으로 모두를 파악했던 것이다.

4) 나아가 예수님의 섬김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10:45에서 그는 예루살렘에서 맞이 수난을 앞두고 대속적 죽음을 각오한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지도자나, 선지자, 혹은 모범자로 이해하고 부르는 것을 거부케 한다. 예수님의 섬김은 일반적 범주를 넘어서 오히려 고난 당하는 자들과 현장을 자신의 인격에 일치시키며 새롭게 자유와 생명을 해산하는 창조적 행위였다. 이를 우리는 최후의 만찬에서 알게 된다. 그는 유월절을 앞두고 자신의 사명과 제자들의 책임을 가르쳤다. 그는 단순히 떡과 잔을 통해 자신의 제자 공동체가 '하나'이어야 함을 가르치며 죄용서 받은 기쁨의 ' 계약 공동체'가 그의 인격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이해시켰다. 역시 부활후에 초기교회는 이런 것들을 기억하며 새롭게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3.4. 결론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지도자론은 "십자가의 길" 자체였다. 그는 지도자로서 성경을 풀어 주기도 하고, 비유 말씀을 통해 제자들의 상상력을 키워주며, 종말론적 신앙의 능력을 보여주고, 자신의 말씀 앞에 제자들을 결단하도록 이끌며, 눈물을 흘리는 자와 함께 흘리며, 기쁨에 넘치는 자와 함께 기뻐하며, 그렇다고 유대교의 지도자들처럼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온유와 겸손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며, 사랑과 화해의 정신으로 남을 자기처럼 여기며, 하나님과 인간의 중재자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섬김과 화해의 지도자로 자신을 내던졌던 고난의 종이었다. 그리하여 의인보다는 죄인을 찾아 다니며, 일등보다는 꼴찌를 사랑하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 나라의 새질서는 무엇인지를 깨닫게 했다. 뿐인가? 예수님은 타락한 성전 예배를 반대하며 성전을 청결케 하며, 율법의 원래적 정신에 어긋난 비인간적 독소 조항을 철저히 비판하며, 또한 그것들을 자신의 안위에 이용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훼파하려 했으며, 개혁하지 못하는 안일한 기존의 체제를 향해 메시아적 선지자로서 저주를 선포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결국에는 하나님을 알고 신뢰한다는 자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을 모욕했다는 죄명으로, 기존의 체제를 비판하고, 민중 봉기를 획책하여 반란을 도모했다는 국역 죄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 가셨던 것이다. 어느 누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결단"을 통해 스스로 고난의 길을 자초하며 하나님 나라의 모범을 보이신 하나님 아들이었다.

4. 마치는 말

이미 살펴보았듯이, 초기교회는 자신들의 지도력을 예수 그리스도에서 찾으려 했다.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지상의 예수님을 회상하므로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의 원형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런 이해가 초기교회의 것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물론 예수님의 지상 활동에서 "지도자"라는 호칭이 직접적으로 불려지지는 않았지만, 초기교회의 이런 이해의 바탕은 지상의 예수로부터 나왔다는 데에 거부해야 하등의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