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서에서의 국가 장 흥 길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신약학)

1. 들어가는 말

오늘날의 교회가 신약 성서와 연속선상에 머물러 있고자 한다면 국가와 권력, 소유와 빈부, 여자와 남자와 같은 굵직한 사회 윤리적인 주제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현실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이나 교회의 입장뿐만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적인 신학적인 원리를 찾기 위해 신약 성서의 윤리적인 진술을 연구·조사하고 재 고려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특히 방향설정 위기와 행동 불확실성의 시대에 규범 위기와 규범 찾기에 직면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신약 성서를 현실로 중개하는 것은 시급하게 요구되는 과제이다. 신약 성서의 메시지를 현실로 옮길 때 그것이 단순하게 '성서주의적'으로 중개되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신약 성서의 윤리적인 지침과 권면을 깊이 사려함이 없이 현실에서 제기되는 구체적인 사회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결의적인 대답으로 여기거나 신약 성서의 윤리적인 구절이나 단락을 어떤 입장이나 주장을 변호하는 인증구(dicta probantia)로 사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약 성서 자체가 다양한 신앙 공동체의 상황 속에서 기록되었고 역사 안에서 수집되었을 뿐 아니라 신약의 시대와 오늘날의 현실 사이에는 무려 이천 년이란 시간적인 차이와 그와 함께 상황적인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약 성서의 윤리적인 진술을 현실로 중개하여 적용할 때 내용 비판적인 방향설정이 절대적으로 요청이 되며 해석학적인 질문과 신학적 해명이 불가피하다. 이런 점에서 신약 성서에서 어떤 진술이 시공을 초월한 절대적 규범으로 오늘날에도 아직 유효하며, 특정한 상황 속에 주어진 신약의 권면과 지침이 오늘날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며 어떤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윤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신약학자들의 중심 질문이 되었다.

이러한 기본적인 시계(視界) 안에서 이제 본 기고물의 주제인 "신약 성서에서의 국가"로 눈을 돌려보자.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국가를 어떻게 이해했으며 그 권력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가?

2. 신약 주요 증인들의 국가 이해

2.1. 예 수

예수 당시 유대인들의 국가와 권력에 대한 태도는 외딴 광야 생활을 하던 에세네파의 금욕주의에서부터 사두개파의 정치세력과의 결탁 그리고 젤롯당의 신정(神政)정치의 이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 준다. 하지만 예수에게서는 이러한 당시 유대인의 정치관과는 다른 국가에 대한 입장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가 은자(隱者)의 수도생활을 영위하지 않았으며 로마나 유대의 권력자들과 손잡지 않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또 그는 로마제국을 향해 대항한 젤롯적인 혁명가도 아니었다. 원수를 사랑하고(마 5: 44) 다른 편 뺨을 돌려 대라(마 5:39)는 예수의 권면은 이런 젤롯주의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세금질문 기사'(막 12:13-17) 가운데 진술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17절)는 예수의 말씀에서 분명하게 인식된다. 하지만 흔히 말해지는 것처럼, 이 구절이 '땅의 나라'(civitas terrena)와 '하늘의 나라'(civitas coelestis)의 두 왕국을 인정하는 인증구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 오류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세금'에 관한 질문(14절)에 대한 답변이었고 여기서 동등한 두 권세의 공존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선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젤롯적인 반역에 대한 부정이 국가나 권력에 대한 비판 없는 원칙적인 긍정이나 무조건적인 복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눅 13:32; 22:25 참조). 예수는 무엇보다도 수난과 죽음으로 자신이 로마제국과의 투쟁 속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요 18-19장 참조).

이러한 예수의 정치적인 입장은 자신과 함께 시작되는 그의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 선포의 빛 안에서만 해명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에게 있어서는 자신에 의해 선호되는 하나님 나라가 곧 "행동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세상을 경멸하거나 금욕주의적인 엄격주의를 주장하지 않았지만(마 11:19), 이 세상의 모든 구조와 제도가 그에게 있어서는 "잠정적인 것"(Provisorium)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의 정치적인 프로그램으로 선포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벌써 시작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순수하게 정치적인 나라가 아니라 종말론적인 우주적인 나라이다. 물론 이 말이 하나님 나라의 정치성을 배제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성향과 행위로 축소될 수 없지만 분명하게 이들을 포함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를 단지 전할 뿐 아니라 자신을 통해 가지고 이 세상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하게 세상으로부터의 격리를 목표로 하는 전적으로 영적이거나 완전히 피안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의 한 가운데 현재적인 경험으로 중재된다(마 12:28과 병행절 참조).

전체적으로 본다면, 예수의 국가에 대한 입장이나 태도는 그와 함께 도래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사신(使信)에 한정되어 있다.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시계(視界)에서 순수한 세상 부정이나 전적인 세상 긍정은 예수의 경우 인식되지 않는다.

2.2. 바 울

예수의 이런 정치적인 입장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원시기독교의 본문은 아마 로마서 13장일 것이다. 이 본문은 오랫동안 국가 권력에 대한 교회의 무비판적인 절대 복종의 의미로 또는 어떤 국가론으로 오용되었다. 그러나 이 단락은 로마서의 수신자인, 로마 제국의 수도 한 가운데 사는 기독교 공동체가 처해 있는 정황과 서신 전체의 맥락 안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의 교리 부분(1-1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고 복음 안에 선포된 하나님의 의와 '불의한 자의 인의'(iustificatio impii)를 서술한 다음, 권면 부분(12:1-15:13)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고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교회와 세상에 대한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 본문은 '일반 권면'(12-13장)의 한 단락이다.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지상의 권세(1절)는 종교적인 질서 조직이 아니지만(2절) "하나님의 사자"(4절)요 "하나님의 일꾼"(6절)이기 때문에 존중하고 복종해야 한다. 이때 '복종'이 무조건적인 절대 복종이나 무비판적인 노예 근성과 혼동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에 의하면 기독교적인 순종은 국가의 강요나 권세에 대한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자유와 양심의 통찰로부터 일어나기 때문이다(5절). 또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의 '고생 목록'(Peristasenkatalog)에서 시사되는 것처럼, 로마 제국의 정치적 법정과의 투쟁도 알고 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복종은 노예적인 예속과 다르다. 이런 기독교적인 순종의 관점 아래에서 그리스도인도 세상적인 의무를 이행하며 세금을 내야 한다(7절).

위에서 살펴본 바 이 단락에서 국가, 그 자체의 본질이나 의미가 서술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기독교인의 올바른 태도에 대한 '권면'의 테두리 안에서 단지 간접적으로 국가의 과제와 기능이 언급될 뿐이다. '일반 권면'의 문맥에서 볼 때 본문은 그 앞뒤에 놓여 있는 사랑을 주제로 진술된 단락(12:9f., 14-21; 13:8-10)과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국가 관원들과의 관계는 사랑의 주제와 함께 권면의 틀 안에서 고려되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모든 것을 사랑 아래 두고 있으며(고전 13장; 16:14 참조) 이 사랑이 세속적인 세상 구조 안에서도 실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로마서 전체의 거시적인 구조 속에서 본다면 본문은 믿는 자에게 주어진 인의(認義)가 선물로서 '법정적 인의'(iustificatio forensis)를 넘어선, 과제와 관련된 '효과적 인의(iustificatio effectiva)라는 점에서 일상 생활 안에서 하나님의 의 실천과 관련되어 있다.

요약하면, 바울은 롬 13:1-7의 단락에서 원칙적인, 체계적인 국가이론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었으나 여전히 세상 가운데 살고 있는 기독인 실존의 국가에 대한 자세를 권고의 형식으로 권면하고 있을 뿐이다.

2.3. 그 외의 신약 성서의 증인들

주제와 관련된 신약 성서 후기 문헌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상 벧전 2:13-17과 계 13장의 두 주요 본문만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베드로전서의 본문으로 눈을 돌리면 이 단락에서도 저자는 바울처럼 어떤 '국가론'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긴 권면(2:11-4:11)의 틀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국가에 대한 태도를 다루고 있다. 본문은 국가, 결혼, 가정과 같은 다양한 세상의 제도 안에서 지켜져야 할, 신약 성서 밖에서도 알려져 있는, 기독교인들의 태도나 지위에 대해 권면하는 소위 "가정교훈"(Haustafel)의 한 부분이다. 비기독교인의 주목을 받으며 지나가는 임시적인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나그네와 행인"(11절)같은 기독인들에게 권면이 주어진다. 기독인도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순복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권위가 주로부터 났거나 국가 자체의 본질에서 났기 때문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13절) 순종해야 한다. 이러한 복종의 근거와 방식은 바울의 경우처럼 자유이다(16절). 그러기 때문에 이 단락을 기독교의 '세속화'나 '시민화'라는 표제어 아래에 두어서는 안될 것이다. 세상에서의 모든 기독교적인 삶과 행동은 주 안에서 사는 자유자로서, "흩어져 사는 종말론적인 출애굽 공동체"로서 살고 행하는 것이며 국가와 권력에 대해서도 기독인은 이런 자유자로서 복종하고 공경한다.

위에서 다룬 본문과 달리 요한계시록 13장은 주후 1세기말 교회와 로마 제국의 충돌을 보여 준다. 이 충돌의 배후에는 자신을 '주와 신'(dominus ac deus)으로 받들어 섬길 것을 요구하는 도미시안의 황제 숭배요구가 있다. 황제와 그의 국가를 절대화하고 신격화하는 권력은 바다에서 올라오는 "용"(2절)으로서 지상에 나타난 사탄 권세의 체현이다. 땅에서 올라오는 두 번째 짐승은 첫 번째 짐승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12절)로 해석되는데 이는 아마 황제 숭배를 집행하는 지방 제사장 직분일 것이다. 이런 가이사 화상 숭배에 직면한 그리스도인의 국가에 대한 태도는 순종 대신 불순종일 수밖에 없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경제적인 규제(17절)뿐 아니라 순교(10절)에까지 이르는 박해가 뒤따르나 이런 상황에서도 묵시가는 혁명이나 '거룩한 전쟁'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비폭력적인 저항을 호소한다. 박해에 대해 성도들에게 요구된 것은 "인내와 믿음"(10절)이다. 그들은 생명책에 녹명됨을 앎으로써 종교와 정치를 통합한 로마 제국의 완고한 권력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다(8절).

다루어진 두 신약성서의 후기 본문도 변화된 상황에 따른 '권면'이라는 관점에서만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3. 맺는 말

국가와 관련된 어떤 신약 성서 본문을 보더라도 이상적인 국가이론의 체계를 찾을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이 국가에 대해 가져야 하는 규범적인 태도를 묘사하는 통일성 있는 진술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것은 신약 성서가 원시 기독교 윤리의 편람이 아니라 다양한 시대, 다양한 상황, 다양한 의도 속에서 기록된 문서들의 집성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공통적으로,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열린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렸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창조된 이 세상에 아직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변증법적인 세상과의 관계성 안에서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국가의 본질이나 의미에 대한 이상적인 국가론이 아니라 지나가는 임시적인 세상을 끝까지 이길 수 있는 권면이었다. 조사된 본문에서 밝혀졌듯이 국가는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의 과제 때문에 인정되며, 또 국가 그 자체가 사탄적인 권세이거나 신적인 권세가 아니며, 국가에 대한 교회의 입장 역시도 원칙적인 불충성이나 절대적인 충성이 아니다. 그래서 국가에 대한 기독인의 입장은 어떤 "비평적인 충성"의 성격을 지닌다. 이것이 바로 기독인의 국가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묻는 질문과 관련하여 신약 성서를 현실로 중개할 때 옮겨져야 할 신학적인 원리이다.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을 비(非) 정치적인 게토(Ghetto)나 현실 도피적인 내세종교로 인도하지 않으며 또한 절대화 내지는 신격화된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으로도 이끌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