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응천 교수(장신대/신약학)
출애굽기 23:14-17, 34:18-24에 보면,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일년에 세 번 절기를 지키며 야훼 하나님께 보이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절기들을 3개 성전순례절기(The Pilgrimage Festivals)라고 부르는데, 무교절( ), 맥추절( ), 그리고 수장절( )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맥추절은 칠칠절( )혹은 오순절( )이라고도 불리는데, "곡식에 낫을 대는 첫날부터 칠주"(신 16:9)되는 날, 추수의 첫 열매를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들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날은 야훼 하나님 앞에 성회( )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허락되지 않으며, 야훼 하나님께 번제와 소제를 드리도록 되어 있다(민 28:26-31).
이와 같이 오순절은 원래 농경문화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절기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농사와의 연관성이 흐려지고, 그 대신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역사와 새로운 연결이 맺어지게 되었다. 주빌리 6:1-21에 보면 이 절기가 하나님과 노아 사이의 계약을 기념하는 절기로 새롭게 해석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대전쟁 이후, 즉 주후 70년 이후에는 이 절기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재해석되는데, 이것은 랍비들이 출애굽기 19:1을 해석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다다른 것이 이집트를 나온 후 50일 되는 날이었다고 생각하게 된 데서 비롯된 것 같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요세푸스는 오순절을 유월절 다음날부터 50일째 되는 날로 계산했는데 이것이 그 이후로 오순절을 계산하는 표준적인 방법이 되었다.
이렇듯 오순절이 시내산 계약과 새로운 연결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종교적인 그리고 민족적인 공동체로 새롭게 태어난 것을 의미한다(출 19:5-6, 벧전 2:10). 다시 말해서 오순절이 이 시내산계약을 기념하는 절기로 재해석 된 것은 오순절이 이제는 단순한 추수감사축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작을 기념하는 뜻깊은 날이 된 것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사도행전2장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 승천 이후 제자들에게 능력이 나타나고 그들이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오순절 날 되어진 일이었고 또 그러한 현상은 바로 성령이 임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누가는 여기서 먼저 이 날의 상황을 묘사적인 언어로 그린 후에 이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본다. 즉, 하늘로부터 나는 강한 바람 같은 소리( )가 먼저 들렸고(2절), 그 후에 불같이 갈라지는 혀들( )의 모습이 보였으며(3절), 그 혀들이 모여 있던 사람들 하나하나 위에 임했을 때, 그들이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했는데, 그것은 성령이 그들에게 말하게 하셨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4절). 이 때 이 광경을 보려고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이들은 각기 다른 언어를 모국어로 말하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들( )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자기들의 모국어로 듣게 되었다(11절). 이것이 바로 누가가 전하는 오순절 사건이다. 이 오순절 사건에서 가장 특색 있는 종교현상은 방언( 4절)인데, 여기서의 방언은 고린도전서 12장-14장에 나오는 방언과 큰 차이를 보인다. 고린도전서의 방언은 우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unintelligibility)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것은 말하는 대상이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다(고전14:2).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은 그 말하는 대상이 사람이며, 또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음(intelligibility)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요 핵심이 되는 현상이다. 그것도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서로 의사소통이 되지 못할 상황, 즉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할 상황이었음이데 불구하고, 사도들이 말할 때 성령께서 역사 하셔서 모여든 사람들이 다 각기 자기들의 모국어로 알아듣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의 일반적인 종교현상으로서의 방언은 대체로 고린도전서의 방언을 가리킨다. 이에 반하여,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은 고린도전서의 방언과 정반대의 현상으로 신약성서 속에서는 물론이요 그 밖에서도 그 유비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사건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행전의 방언은 일반적인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과는 다른, 하나님의 단 일회적이고 특별하신 역사였던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괄목할 만한 것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이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하며 또 그것을 글로 엮어 가는 과정 속에서 보여주는 그의 탁월한 안목이다.
어떤 사건(eventus)나 역사(historia)가 되는 것은 그것이 역사가에 의해 해석되고 의미가 부여됨으로 인해서이다.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바라보고 그 사건이 가지는 역사적인 의미를 탐구하고 정리하는 역사가의 작업이 뒤따르지 않으면, 그 사건은 시간 속에서 한번 발생했다가 영원히 과거 속에 묻혀 버리는 무수한 일상사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야말로 단순히 사건들을 나열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건들 속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찾아내고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의 사관을 통해 하나의 통일성 있는 역사 이야기로 엮어 내는 사람인 것이다.
사도행전 2장의 역사이야기에서 드러나는 한 초대교회 역사가의 모습이 바로 그와 같은 모습이다. 이 본문과 관련하여 누가가 접한 자료는 아마도 이런 내용을 담고 있었던 한 초대교회의 전승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을 때, 갑자기 어떤 신비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하늘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고, 이상한 광경이 보여졌으며, 제자들은 어떤 신비한 힘에 이끌려 담대히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했는데, 그때 주위에서 몰려든 구경꾼들이 언어가 각기 다른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을 다 알아듣고서 놀랐다."
사건 속에서 역사적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사람들은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역사하셔도 그것이 성령의 역사인 줄 모를 수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날 하늘에서 소리( )가 났을 때, "자, 이것이 성령의 역사니라"하는 설명이 들려 온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그 사건이 발생한 날이 유대의 전통적 절기인 오순절이었다는 사실도 사람에 따라서는 그저 우연으로 지나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학자이며 역사가인 누가가 이 전승을 접했을 때, 그는 이 사건 속에서 큰 역사적인 의미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이것이 단순히 신기한 기적이 아니라. 성령의 특별한 역사인 것을 깨달았고, 또 그 일이 오순절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우연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누가는 이 사건을 자기가 쓰는 초대교회 역사책의 앞부분에 놓고, 그 사건의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크게 부각시킨 것이다.
누가는 이 사건을 역사화시키면서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찾아낸다. 첫째로, 누가는 이 모든 일이 성령께서 임하셔서 역사하신 일이었다는 해석적인 선언을 한다(4절). 그리고 그는 이 성령께서 임하신 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약속(1:5,8)이 성취된 것으로 연결시킨다. 사건에 역사적인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둘째로, 누가는 이 사건이 오순절에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는다. 즉 유대교에서 오순절이 시내산 계약을 기념하는 날,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교적인 공동체로서 새롭게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므로,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신 사건이 오순절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자연히 어떤 새로운 공동체의 탄생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날 교회( )라는 공동체가 새롭게 탄생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오순절은 이제 기독교회 역사가 시작되는 출발점이 된 것이다. 사건에 신학적인 의미가 부여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가이며 신학자인 누가가 한 초기 교회의 전승을 그리고 그 전승이 전하는 한 사건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 담긴 깊은 의미를 찾아내고 그것을 창조적으로 해석하여, 또 그것을 자기의 사관에 걸어서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새로운 의미로 승화시킨 진지한 작업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을 우리는 하나님의 영감이라는 고백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은 또한 우리들 편에서 성서 본문의 형성 과정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적 작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