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론 노트
#이레네우스(IRENAEUS)-이단에 반하여(Adversus Hereses) - 창조자는 구속주다. 창조 세계는 선하다. 예수의 신성, 인성은 분명, 헬라적 유대주의(지혜문서)따름. 성령, 성자를 하나님의 세계 창조를 위한 후손이다. 피조물의 존재는 성부로 부터, 재생은 성자로 부터, 이 하나님의 자녀로 되는 것은 성령으로 부터.
image(형상) - 최초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갖고 있다. 여기에 성령의 은사가 주어졌
을때 하나님과 같은 모양으로 되는것이다. 그러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은사)가 상실 되
어서 Likeness(모양) 에 도달하지 못함.
#터툴리안(tertullianus) - 몬타누스파에 동조, Adversus paraxeas) -프락세아스에 반하여, praxeas는 군주신론자. 삼위일체 하나님에서 임금이 하나이듯이 일체를 강조. 터툴리안은 이 군주신론에 반대 동시에 셋이기도 하다. 터툴리안은 헬(Oikonomia)에 의해 셋이다.
오리게누스(origenus) - 'DE Principils'- 제 1원리에 대하여(조직신학에서 최초로 성령을 다룸)
- 플라톤의 영향, 하나님 안에 있는것 본질적이고 인간안에 있는것 비본질적인것, 성부, 성자, 성령은 그 자체가 선하다. 오리겐은 이들 자체도 계층이 있다. 성자는 성부에 참여하여야만 선하다. 성부는 모든것을 포괄하고 모든것과 관계한다. 성자는 열등해서 이성적인 것과만 관계를 한다. 성령은 더 열등해서 거룩한 것과만 관계한다.
니케아공의회(325)에서 '성령을 믿사오며'-성령론 언급.
#TROPICI(고대 이집트의 무리)-성부, 성자의 신성인정, 성령은 피조물이다.
Ad serapionen)-세라피온에게(편지) - tropici는 성령이 피조물이다. 암4:13(바람)에서 퓨뉴마(영)을 지으셨다에서 이 바람을 성령으로 해석해서 성령을 피조물로 해석.
여기에 아타나시우스는 성령은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다.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시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케 하시는 분, 성자가 하나님의 아들,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다. 성령을 피조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의 삼중성을 해체시키는 것이기에 있을수 없다.
#카파도기아 교부들(나지안져스 그레고리, 니사의 그레고리, 바질의 그레고리)
-->이들이 동방교회 전통에서 동방교회의 권위를 세움. 아타나시우스와 비슷, 아리우스 반대.
교회의 예배 전통, 성령에 대한 예배 중요시, 성령의 신성주장.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성자를 통하여 성령안에서 예배를 드린다.
바질-성부, 성자, 성령. 성자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성자를 포함하듯이, 성령안에서 드리는 예배로 성령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럼 성령의 구원은 어디냐? 성자는 성부에서 나왔다. 그러면 성령은? 요 15:26 -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부(unbegotton) -->성부는 나게 하신분, 성자는 태어나신분, 성령은 processio
이다. 바질은 성령이 성부로 오는 것은 generation이 아니고
사람의 입에서 나온 숨 같은 것이다.(procession)
generation procession 나지안져스의 그레고리는 성령은 begotton도 아니고
unbegottone 아니고 나오신 분이다. 이들은 하나님 안에 삼
위 일체가 있음을 분명히 함.
자 영
(begotton)
희랍 ousia(모든 사람의 본질) / hypostasis(개별성의 본질)
카파도기아들
perichoresis(상호침투, 상호내재) - 주님이시며 생명의 수요자이시며 성부로 부터 나오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숭앙과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성령. 성령도 예배를 받으시는 분, 이것을 니케아 신조라 한다. 역사적으로 니케아 콘스탄틴 노플신조.
4c 성령에 관심, 구원론에서 성령의 역할 강조.
Augustinus)-최초의 삼위일체론 저술 남김. (15권으로 구성). 동일한 본체의 일치성 갖고 있다. 셋은 동일한 영원성, 불변성, 능력 이 모두는 모두 한 하나님이다. 완전한 신성을 인정. 여기서 '관계성' - 상위안에 있는 하나님의 관계 - 이라는 것을 말한다. '하나' 그 자체 안에 관계가 있다. 여기서 서방 삼위일체(rational Trinity)가 나온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삼위는 서로간의 관계에 의해서만 정의가 가능하다.
성부, 성자가 관계를 맺을때 성령은 사랑이다. 이때 이후 서방은 성령은 '사랑', '사랑의 띠'라 한다. Double procession(성령은 성부, 성자 모두에게서 나온다)
(중세)
Anselmus-영국 11c
서방신학 전통, 성령의 Double procession주장. 그는 이것을 논리적으로도 증거.
opposed relations of origin -- 근원에 있어서 반대의 관계. --->부에서 자가 나오고 반대는 있을 수 없다. 성자와 성령의 관계도 성령은 성자에게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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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 증거
ISSUE)중세 - Filioque논쟁 :서방에서는 찬성, 동방에서는 반대.
서방교황 베네딕트 8세 (1014년)가 공식적으로 이것을 신조에 넣으라. 1054년 동, 서 분열.
동방의 카라 도기아는 성부, 성자, 성령이 있다. 어떻게 한분인가? 서방은 한분인데 어떻게 3일 수 있느냐? 동방은 이것을 perichoresis로 푼다.
(인격)
성령은 한 인격이냐? 인격이 무슨 말이냐? 유비적 표현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아버지라 할때 인간세상의 아버지와 같은 뜻 아니다. 성령이 100% 인격이라고 한다면 사람이 되어버리기에 그런면도 있다. 동시에 이것을 넘어선 무엇인가가 있다. 구약에서는 인격(성령을 표현할때)이라고한 부분이 없다. 신약에는 혼재하고 있다. 성령을 선물, 성령 충만,
person - 터툴리안은 삼위간의 개별 실체성을 구분하기 위해 person(가면)을 빌려옴. 동방은 hypostasis)-개별실체, 어떤 피조물에게도 적용되는 말. 오늘날 인격 설명하기 불충분.
--> 6c Boethius(어거스틴 전통, 서방사람)-->명시적으로 persona의 정의 내림. 이것은 이성적 본성을 가진 개별 실체이다.(individual substance of the reson).
계몽주의 이후 인간주제(이성적)관심. 그러면서 성찰, 내면화 경향. 이시기 이후 이성적, 자유적 존재의 중심이 다음 두가지이다. self consciousness, self determination이 중요. 19c말 20c초 계몽주의 말에 주, 객 구도에 대한 반대가 나오는데 이것이 personalism(인격주의)철학이라고 한다. 주객도식에 머물러 있으면 모든것은 나-그것의 도식이 된다. '인격'개념이 고정된 개념이 아니고 발전의 과정에 나온 결과이다. 이런 점에서 인격을 성령에게 붙일 수있나?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analogia가 있다.
(결론)
실체에 대한 탐구는 불가능하다. 사물 존재를 본질로 파악하려고 한다. 이것을 성령에도 적용, 그래서 깊이 파고듦. 이런 형이상학적 사고가 있을 수 있는데 지나치면 곤란, 언어놀이에 빠질 수 있다. 이런 형이상학적 사고를 무시할 수 없다. 인간은 의식적 무의식적이든 조직적이든 비조직적이든 우리는 어떠한 형태의 형이상학적 전제를 깔고 있다. 문제는 이 의식이 바람직하냐 그 렇지 않느냐이다.
삼위일체론에서 이단은 삼신론과 일신론이 있다.
+- 삼신론
+- 일신론+-- 종속론 :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에게 종속. 아리우스파가 주장. 그러나 하나님과
| 예수님은 신성의 권위에서는동일, 관계에서는 아버지, 아들의 관계이다.
+-- 양태론(가면이론) : 집-아버지, 직장 - 목사, 아내 - 남편
+-- 양자론 :예수님을 인간으로 생각. 이분의 삶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이 양자삼음.
una substantia(실체) - tres personal(인격) --> 터툴리안이 주장. 서방교회의 구조. 하나님의 실체가 하나인데 인격이 셋이다. 여기서 personal의 개념 중요. 당시는 인격아닌 역할(mask)의 의미가 있다. 이것은 다분히 양태론적인데 계몽주의 이후 persona가 인격성이 가미된 것으로 이해. 터툴리안의 정의를 옮겨보면 1 person 3 seinsweise(존재양태)-->이것을 서방교회가 주장. 양태론적.
그러나 동방교회 메아 우시아(본질) - 트레이스 휘포스타세이스(인격);개체를 의미. 동방교회는 하나님은 세분이신데 하나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터툴리안이 라틴어로 옮기면서 문제. 터툴리안은 하나님을 한분으로 규정. 그러나 동방교회는 세분 하나님이 한 본질안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다.
1483-45년(florence) 교황 유진 4세에 의해 소집. 동방의 입장수용. 성령은 성부로 나오지만 성령은 성부로 부터 성자를 통하여 나오신다. 이것을 수용. filioque문제 수용.
몰트만은 삼위일체 신관에 따라 정치적형태가 달라진다. 서방삼위일체는 군주신론이다. 서방은 교항을 중심으로 계층질서. 동방은 동등한 perichoresis 이기에 민주적이다. 동방교회도 교회의 공의회가 최종결정처이다.
衁. 하나님은 세분이다.(아버지, 아들, 성령) -- 예수님은 하나님과 다르다. (겟세마네 기도, 다른 보혜사,십자가에서 j.x의 죽음) 이것을 동방교회는 알고 있음. 몰트만은 서방교회가 삼위일체 이해하기 위해 하나님은 세분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함. 그러면 삼신론인가? 아니다. 일체 개념도 계시에 입각해서 이해해야 한다.
일체 - 요10: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하나(en)-->요 14:7. (빌립과의 대화)--)니가 나를 보지 못하였느냐?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잇고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
안에(삼위일체 개념의 핵심) -->예수, 하나님, 성령이 하나의 본질을 가지고 상호침투(perichoresis)되어 있다.
그림.
-->몰트만의 핵심구조이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하나님도 같이 있다. 성령도 같이 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고난받고 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버리시는 이 - 성부, 버림 받으신 이- 성자, 버리고 버림받음에도 불구하고 두분이 일치하는 분 - 성령.
바르트는 존재양태를 설명. 어거스틴이후 +-mens(마음), notitia(지식), amor(사랑)
+-memoria(기억), intellectus(지성), wlumtas(의지)
psychological Trinity(바르트 이전) - 영혼을 분석했기에 이렇게 부름.
social Trinity - 몰트만.
몰트만은 바르트이전까지의 삼위 일체를 비판을 하면서 삼위일체는 사회(society)의 모습이다. 이 일체는 사랑의 코이노니아에서 볼 수 있다.
바르트는 서방전통, 사랑을 성부, 성자의 연합의 띠에 머물러 있다. 바르트도 군주신론에 빠지고 만다. 일신론적 경향. -존재양태,
몰트만은 3. 코이노니아(일체성을 코이노니아로 설명함)
몰트만은 삼위일체와 하나님 나라에서 사회적 삼위일체 주장. 여기서 filioque문제에서 동서방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함. 그래서 몰트만은 논쟁을 야기한 서방이 filioque를 철회할 것이 좋겠다고 생각. 그래서 몰트만이 절충안 내놓음. 성령의 존재의 본질은 성부로 부터 나온다. 성령의 얼굴은 성자로 부터 나온다. "성령은 존재론적으로 성부로 부터 나와서 성자의 얼굴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다."
생명의 영에서는 filioque가 필요없다고 한다. 왜냐 성령이 아버지로 부터 나왔는데 성자가 아버지지로 부터 나온다면 굳이 filioque를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이러면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임을 강조. 그리스도는 영의 그리스도이다. 중요.
filioque -동방 :보내심, 나오심 - 구분해야 .
서방 :보내심, 나오심 - 그게그거.
몰트만 바르트 모두 경륜, 내재적 삼위일체는 일치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셨다. 이것은 경륜에 속함. 그렇다면 이 경륜은 내재와 같다면 내재속에 그런것이 있어야 한다. 바르트는 mission, procession은 같다. 동방은 그렇지 않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 - 바르트가 맞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그리스도이다.
(성례론적 이해)
중세 스콜라 은혜론(성령의 사역을 은혜로 대치)
토마스 아퀴나스 - 은혜론 -
+- uncreated grace :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
+- created grace : 하나님에 의해 우리 안에 야기된 어떤 thing(피조물)
sanctifying grace(성화의 은혜) / charismatic grace(은사적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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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tia gratum faciens(기쁘게 만드는 은혜) / gratis gratis data(선물로 주어진 은혜)
성화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선을 하게 하는 은혜 - 의롭게 되는 은혜
은사적 은혜는 타인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은혜
habitual grace (품성적 은혜) - 피조물이요 성화의 은혜이다.
actual grace(행동적 은혜) - 피조되지 않는 은혜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의지를 움직여 선을 만들게 하는 은혜.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만드는 선행은혜. 이것이 있어서 예수를 믿으면 세례를 받으면 품성적 은혜가 주입된다. 이것은(품성적 은혜) 선행을 행함에 있어 영혼의 자질이다. 이것은 영혼의 형상인으로 formal cause으로 작용한다.
--> 아리스토텔레스(4원인) - 형상인(설계도), 질료인(자제), 동작인(기술자), 목적인(목적)
habitual 은혜는 형상인과 같다. 우리가 하고자 하면 이런것을 하게 하는것, 아직 동작인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이 형상인에다가 의지가 첨가되어야 선행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공로가 인정되는데 이것이 영광에 이르게 된다.
토마스에 있어서 justification이 무엇? Injustice가 Justice로 바뀌는 것이 의화이다. 이 경우 이것을 칭의가 아닌 의화이다. 이것은 아리스토의 개념을 빌어 토마스가 신학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내적경향이다. '의'가 어디에 있다 할때 어디에 있느냐? 사회에 없다. 아리스토는 '의'가 각 사람안에 있다. 이것은 미덕(virtue)이다. '의'는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의로운 행실을 하게 하는 내적 경향성이다. 토마스는 이것을 사람이 처음 창조되었을때 미덕이 있었다. 인간의 내면의 질서가 바로잡힌 상태가 미덕이다.
이성 --+
의지 |--> 이 사람은 최고의 이성적 존재인 하나님에게 순종을 할 것이다. 이것이 justice의
욕구 | 상태이다. 그러酈 이 질서가 잡힌 상태에서 타락함으로 혼동되어버림. 그래서
육체 --+ 하나님을 순종치 않음(미덕이 아니고 악덕이 된다.)
그러면 justification은 injustice을 갖고 있는 사람을 jUSTICE상태로 바꾸는 것이다.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은 ACTUAL이고 세례를 받을때 HABITUAL, Sanctifying인 어떤 무엇이 이 사람안에 주입된다. 이것은 단순히 칭의가 아니고 의화이다. 이때 4가지 요소가 필요하다.(동시적, 순간적) 衁. 은혜가 주입되어야 한다.(피조된 은혜) 遁. 자유의지가 하나님을 향한다. 鑁. 의지가 죄를 떠난다. 鱁. 죄가 용서된다.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을때에 주입사건이 일어난다. 죄 사함은 세례받기 이전까지(원죄포함) 죄를 도말해준다. 그러나 또한 공로가 있어야 한다. 은혜 + 알파가 있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혜다. 문제는 세례받은 다음 죄 않짓느냐는 것이다. 세례받은 다음 죄는 그래서 고해성사가 나온다. 죄에도 종류가 있다.
+- peccata venialia(용서받을 수 있는 죄)- 주기도문 암송, 가슴을 침, 성찬 참여
+- peccata mortalia(죽을 죄) -->고해성사해야(penance), 성례가 필요.
참회+- atlritio - 고해성사하려는 마음이 없음.
+- contritio - 마음이 생김
+- confessio - 고백
+- absolutio - 사죄선언
------> 고행부과(경중에 따라)
벌(poena)+- poena damationis(영원한 저주의 벌) - 주님의 십자가로 해결
+- poena temporalis (일시적 벌) : 고행을 통해 해결해야
고행을 완수하면 다시 성화의 은혜를 회복. 완수 못하면 연옥으로(단련장소). 성자들은 공로가 많아서 잉여공로가 있다. 이것을 교황에게 맡겨 주었다. 교황은 이것을 선행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면죄부), 모든것을 성례전 중심, 이때마다 주입된 은혜가 있다는 것.
(주지주의)
성령의 본성, 우리와의 관계를 지성, 이성의 관계에서 이해. 인간 이성이 가장고상. 하나님을 최고의 이성적 존재로 봄.
기독교 신학에서 고대시대 영을 이성으로 말했고 이성적 영혼을 말했는데 이때 퓨뉴마가 아니고 누우수로 부름. 퓨뉴마는 70인역 루아흐의 번역에서 기인. 고대 헬라인에게 숨, 바람이었다. 그러나 신약에서 퓨뉴마 널리 쓰임.
대상을 안다했을때 이성의 기능, 자연신학, 계시신학의 가능성이 있다.
(고대)
1. 인격개념이 오늘 같지 않다. 서방 삼위일체 -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삼위일체 흔적을 영혼에서 찾아보려함. 성자 - 지성, 성령 - 의지에 연관. 성령을 지성에 연관시키는 경향 약해짐. 그러나 성령 자신을 지성적 활동으로 연결하려는 의도가 있었던것 아니다. 이레네우스는영을 지혜의영으로 보았다. 영과 지혜 관련. 이때 지혜는 지식, 정보와는 다르다.
(중세)
스콜라 신학은 주지주의적 경향, 자연 신학적. 토마스에 있어서 하나님은 최고의 이성적 존재이다. 토마스는 주지주의지만 성령을 삼위일체와 연관짓지 않는다. 성령을 의지, 사랑과 연관짓는다. 성령과 지성 크게 관계(x)
종, 개은 성령의 역사의 주권적 자유 살리려함. 말씀과 성령의 관계를 강조. 고대 에큐메니칼 공의회는 성령의 출처는 filioque전통, 성령의 사역에서는 역동적. 종개자들은 implicit faith(묵종적 신앙)-일반 롬카 신자들은 나는 교회가 믿는것 믿는다. 다른것은 모른다.)에 대해 종개자들은 이것을 벗어나려함. 말씀강조. 성경번역. 그래서 이들은 explicit faith였다. 그래서 지식이 중요. 개인적 확신이 중요. 나의 개인적 깨달음이 시작.
깔뱅은 신앙을 지식이라고 정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선하심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다. 이런 신지식은 말씀을 통해 말씀에 대한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오는 것이다. 깔뱅은 단순히 주지주의는 아니다. 성령이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하게 하는 역사를 강조한다. 지식은 성령의 선물이다.
##루터 -- 스스로 의롭게 되지 못함. Justification은 인간이 스스로 하지 못함. 우리 외부로 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alien rigeous):'낯선 의'- 주님으로 부터 오는 의가 우리에게 주어져서 '의의 전가', 롬,카에서는 은혜의 주입인데 루터는 그리스도의 낯선의가 전가(imputation)되었다고 함. 의를 이루신 분은 그리스도이지만 주신분은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법적 선언이다. 이것은 율법과 복음,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일어난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가 중요. 은혜의 수단의 역할을 말씀이 한다. (롬, 카은 성례전), 1520초 루터 동조계중 성경말씀없이 계시 받는다. 루터는 성령의 역사는 주어진 말씀에 의해 이루어 진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를 울리게 하고 우리를 향한 말씀이 온다. 은혜, 용서가 온다. zwickan의 예언자들은 성경도 필요없다. 성령이 직접와야 한다. t.뮌쩌:내적 말씀의 우위를 주장.
karlstadt- 성령을 받아서 삼켰다. 루터는 성령은 자유로운 영이기에 말씀과 성례전이란 외적 표시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이다.
##깔뱅 - 2세대 개혁가, 루터보다 조직적
그리스도의 구속의 단회성과 은혜부각. 이것이 우리에게 왔다. 그리스도의 의가 내것이 되기 위해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되어야 한다. "우리와 떨어지는 한 그리스도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 안에 거하셔야 한다. 그리스도가 헛되이 오지 않는 것은 연합때문이다."결혼은 연합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성령으로 연합되었다. 루터는 믿음 강조.
루터, 깔뱅 모두 말씀, 성령 중요. explicit faith강조. 말씀을 중시하면 영감과 성령의 내적증거(조명)을 강조한다. 성령의 권위는 내적 증거에 있다. 내적 증거는 선행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영감이 있어야 한다. 내적 증거와 영감 이 두가지는 모두깔뱅, 루터에게 중요.
둘의 차이는 둘다 영감되었고 내적 증거 있지만
루터는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에서 복음중요, 복음 중에도 믿음으로 의롭게. 이중에서도 j.x중요. 루터에게 성경보다 더 중요한 부분이 있어서 이것으로 덜중요한것 판단.(정경안에 정경이 있다.)-canon within canon.
깔뱅은 성경중 일부를 의심보다는 일단 주어진 성경으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전체를 받아 들일려는입장. 율법과 복음에 있어서 율법 그리고 복음인데 깔뱅은 율법과 복음을 대립하게 생각지 않는다. 율법안에 복음이 있는데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서도 율법이 필요한데 이것은 율법의 제 3사용이다.
##말씀이외의 성령의 역사
衁. 창조질서에 대한 지식 - 과학적 예술적 지식. 깔뱅은 모든 진리가 진리면 그것은 성령의 진리이다. 그래서 과학 예술도 성령의 진리이다. 성령의 은사는 과학, 예술을 가능하게 함. 인간생활에 가장 훌륭한 지식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전달된다.
遁. 유아세례 -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데 보이지 않는것을 보이는 것으로 표시하는 것. 믿음은 성장해서 스스로 받아야 하는데 다른방법도 있다. 어린아이는 미래의 신앙을 향하여 세례받았다. 이것은 성령의 비밀한 역사를 통해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鑁. 기도 - 무엇이 올바른 기도인지 성령을 주신다. 롬 8:26.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신다. 깔뱅은 성령이 우리안에 오셔서 탄식을 일으킨다고 해석. 무엇이 올바른 기도인가는 말씀을 통해 가능하다.
鱁. 성례전 - 성례전은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강화, 인쳐 주는것. 말씀없는 성례전은 벙어리 극이다. 말씀중요.
ꁁ. 교직 - 교회의 직책(목사, 장로, 집사)주장. - 일상직. 특별한 의도가 있을때 비상시에는 다른 직책을 주장. 교직을 수행하는 능력에는 말씀이 반드시 있어야 되는것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은 말씀 사역에 보조.
##계시- 객체적, 주체적이다. 오늘날 주어진 신비체험은 계시라기 보다는 특별한 것이다. 새로운 계시는 아니다.
cf)transsubstantion(화체설)-->보이지 않는 substance가 변했다.(모양이 아닌 실체)
substaaance와 accident-아리스토도 구분하지 않았다.
루터는 consubstantiation(공재설):함께 있다.(빵과 그리스도)
쯔빙글리 -상징.기념
깔뱅 - 기독론에서 칼케돈이후 신, 인성이 한 인격안에 연합되어있다. 어떻게? 속성의 교류(신성과 인성의 속성이 주고 받는 관계),
루터는 신성과 인성이 직접교류한다.(신성 인성) 신성이 인성에게 속성을 주는데 genus maiestaticum(위엄의 종류). 승천후에도 그리스도의 몸도아니계신곳도 없다.
깔뱅은 신성과 인성이 간접교류한다. 한 인격이 신성, 인성에 속해 있다. p 신성
인성
루터가 깔뱅입장을 보니까 반신반인(네스토리우스)의 입장 아닌가? 개신교가 루터교의 입장을 보니까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니 유두고(유티쿠스)이단이 아닌가? 루터교가 개혁교를 보니까 신성은 인성밖(extra)에 있고 인성은 신성밖에 있다. extra calvinisticum이다. 우리와 떨어져 있는몸과 우리를 연결시키는것 성령이다.
17c정통주의
영감설 강조. 깔뱅은 성경에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영감 인정. 19c이후 신학자들 영감론 비판. 이들은 모두 성서주의자이다. 영감론자들을 기계적 영감설로만 주장하는것 무리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영국에서 작성. 47년 채택, 48년 영국에서 채택.
1장이 성서론 - 여기서 영감론 간단하게 말함. 성서영감, 무오류는 1장에 나오지 않고 34장에 나옴. 이것이 35장(선교)과 더불어 1648년 판에는 없다. 이것은 1903년 미국 장로교가 첨가한것. 여기에 무오류 영감설 있다. 기계적 영감설, 축자영감. :이들이 기계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음. organic(유기적 영감설), 하나님이 성서 저자의 사상, 문체를 무시하는것 아니라 이용해서 사용하셨다. 영감의 성격에 있어서 유기적이다.
완전영감.- 성경은 영감되어 있다. 비평의 가능성도 있지만 영감되어 있다.
#자유주의이후 종교개혁 계승한 바르트
바르트는 영감론을 체계적으로 말하지 않음. 그러나 역사비평 또한 하지 않음. 그러면?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 서문에 '사람들이 입장을 묻는데 나는 양자택일을 하라고 한다면 차라리 나는 영감론을 택하겠다.' 바르트는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의 역사, 영감보다는 내적 증거를 더 중요시 했다. 성경은 자체가 말씀이기 보다는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그래서 비판 받음.
결론) 성경에서 말씀과 성령의 지성적 관계 강조. 바울서신, 요한문서. 요한에 있어서 진리 개념은 지성적 요소를 내포하지만 그 이상이다. 진리는 말씀, 생명, 삶, 인격이다. 인격화된 진리이다.
요한에서 빛은 (요1;4-5) 생명이다. 빛은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 삶의 문제이다. 진리는 지적 요소를 포함하면서도 행함, 삶을 내포하고 있다. 깔뱅도 신앙을 신지식으로 정의. 성령이 단순히 지적 활동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띠인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영과 인간영 사이에 인식론적 요소가 있다. 성령의 이해를 주지주의적으로 하는것도 편향하면 인식론으로 기우는데 이것은 衁. 한 개인을 추상적으로 상정하는 것이고 개인주의화 되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遁. 주지주의적 편향은 메마른 공상과 사변에 빠질 우려도 있다. 역동적 모습이 있지 않고 논쟁적 요소만이 있을 수 있다.
주의주의
1. 성령과 하나님의 의지
아우구스티누스의 심리학적 삼위일체에서 성령과 하나님의 자신의 의지가 나타남.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흔적을 vestigim trinitatis
memoria, intellectus, voluntas
이런 분위기에서 분위기는 성화론으로 간다. 중세로 들어가면서 주지주의로 간다. 의지보다 이성으로 본다.(아퀴나스)
13c DUNS SCOTUS->의지가 중요하다. 하나님 안에 두가지 생산 방식이 있다.
衁. BY nature(본성에 의하여) - 필연적, 결정론적으로 성자가 나오고
遁. by will(의지에 의하여) -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성령이 나온다.
衁은 지성적 요소를 가지고 있고 성자가 나온것은 본성적인것. 遁은 하나님의 의지로 자유롭게 나온다. 성령이 나온것은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안셀름 이후 filioque를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는 성자와 성령을 구분하는 것이었다. 원천에 있어서 반대관계가 있지 않으면 양자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duns는 다르다. 생산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Edwards 성부는 하나님이 단순한 존재이다. 성자는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가지는 관념 이해이다. 성자는 하나님의 자기지식이다. 성령은 하나님이 자신에 대한 이해를 사랑하는 사랑이다. 성자가 하나님의 지성이면 성령은 하나님의 의지이다.
##3 예정론
펠라기우스 - 성령의 역사와 자유개념의 논쟁. 인간이 구원을 얻는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라 선행을 해야 한다. 자유는 선택의 능력이다. 인간이 악을 행하든지 선을 행하든지 선택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 이것은 무조건적 선택이 아니다. 인간의 의지가 외적인 강제없이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이다. 아무도 하나님의 능력에의해 강요하지 않는다. 그런데 타락이후 인간은 그 본성 자체가 부패했기에 아무도 강제하지 않지만 죄지을 수 밖에 없는데 자기를 표현하는데 악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은총으로 새롭게 되면 선을 행하게 된다.
펠라기우스가 볼때 아우구스티누스는 결정론자이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가 어떻게 절대 선택을 할 수 있느냐? 그것은 fiction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