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론

신앙으로 말미암는 중생 :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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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보통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한다. 그런데 칼빈에 있어서는 복음의은혜를 깨닫고 구원의 확신과 결단과 신뢰에 이르는 신앙이 회개에 선행한다. 하나님의 심판 혹은 율법 혹은 하나님의 과격한 명령과 요구 앞에 좌절과 절망을 경험한 후 복음의 은혜를 신앙하고 신뢰하여 구원에 이르는 과정에서 회개와 죄의 용서가 일어나며, 또한 이 신앙과 신뢰의 기독교인의 신앙생활 전체를 통하여 계속해서 회개와 사죄, 사죄와 회개가 일어난다. 칼빈은 신앙을 떠나서는 참된 회개가 홀로 일어날 수 없다. 이 둘은 구별은 될 수 있으나 서로 분리될 수는 없다고 한다. 히브리말로 회개라는 말은 회심, 돌아선다에서 왔으며 희랍어의 회개는 정신 혹은 의도의 변화에서 왔다고 한다. 우리들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요, 우리의 옛 정신을 벗어버리고 새 정신을 입는 것이 회개이다. 진정 우리의 생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서 일어나는 진정한 하나님에로의 전향이 회개이다. 이어서 칼빈은 회개의 정의를 3가지 점에서 부연한다. 衁. 정신 뿐만 아니라 행위에 있어서 까지 갱신되어야 할 것 遁.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 회개가 계속 일어나냐 한다는 것 鑁. 옛 자아의 죽음이 일어나면서 새 마음과 새로운 삶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회개를 가르켜 중생이라고 하며 이 중생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다. 우리는 회개의 열매들이 다음과 같다고 본다. 즉 하나님에 대한 경건의 의무 및 이웃사랑의 의무 그리고 전생애를 통하여 거룩하고 순결해야 하는 것이 회개의 열매들이다. 간鑧이 말하면 우리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법에 준하여 측정하는데 열심을 내면 낼수록 우리들에게서 나타나는 회개의 징표들은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다. 본인이 보기에 회개는 하나님의 독큭한 선물이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에 경탄한다. 즉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회개를 허락하사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중세기의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이 회개에 대해서 지껄여대는 모든 말들은 얼마나 복음의 순수성에 서 거리가 먼가: 고백과 만족에 관하여. 회개는 결코 사죄의 원인이 아니다. 저들 스콜라주의자들이 주장하느 바 죄책의 쓰라린 경험을 의무적으로 하는 것은 틀렸다. 우리가 이미 언급했거닌와 죄인인 우리는 우리의 양심의 가책이나 우리의 눈물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의 자비에만 우리의 눈길을 고정시켜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셨다고 하는 것은 그 자신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시고 갇힌 자들에게 놓임을 선포하고 슬픈 자들을 위로하시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는 생각한다. 칼빈은 열쇠의 본성과 권세에 대하여 논한다. 우리는 열쇠의 권한에 대하여는 복음 설교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게 베풀어주신 바 매기도 하고 풀기도 하는 권한은 말씀 자체의 권한이다. 이것은 열쇠의 사역에 있어서 특별히 진리이다. 이 3권은 성령을 통큁아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고 또한 아버지 하나님과 연합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이 연합은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이 신앙-신앙은 성령의 열매인데-에 의하여 우리 믿는자의 하나님과의 거룩한 사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신비적 연합에 근거하여 두 가지를 말한다. 하나는 본성상 의를 사랑할 수 없는 우리의 마음 속에 의에 대한 사랑이 주입되고 확립되는 것이요, 두번째는 성경에 나타난 삶의 규범인데 이 규범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열심에 있어서 방황치 않게 된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우리 자신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칼빈은 이 헌신적인 삶의 요약을 롬 12:1-2땈서 발견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기독교인의 삶은 이성과 의지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령혹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응시키는 것이요, 불신자의 삶은 이성가 의지의 원리에 순응 할 뿐이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라 우리로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으로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하여 동물적인 집착과 애착을 갖는다.

이들은 부, 권력, 명예에 의해 포로가 되어 있다. 전 영혼이 육체의 유혹에 말려들어 이 지상에서의 행복을 결사적으로 추구한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안일과 안정을 확보하려고 무척 애를 쓴다. 우리 믿는 자들은 이 세상에 집착하여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망각해서도 안되며 종말적인 관심에 과도히 사로잡힘으로 이 세상으로 부터 도피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의 자비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우리는 신앙으로 이 그리스도를 포착하고 소유한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에의 참여를 통하여 주로 두 가지 은혜를 받는다. 하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죄 없으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케 돔으로 하늘에 심판자 대신에 은혜로운 아버지를 소유하며 두번째로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성화됨으로 우리는 거룩한 삶을 함양할 수 있다. 무엇보다 당신이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 가를 파악해야 하며 당신에 관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하여야 한다. 그래야 여러분의 구원의 초석과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초석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의 칭의를 확실히 확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인식해야 한다. 이신칭의에서 두가지 유의할 사항이 있다. 하나는 주님의 영광이 감소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즉 주님의 영광의 손상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평화로운 안식과 평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행위의 공로를 자랑하고 자만할 경우 우리는 은혜로 베풀어 주신 으와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없다. 교항주의자들은 종교개혁신학이 말하는 이신칭의를 반박한다.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과정에 꼭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로마 카톨릭의 스콜라 주의 신학에 반하여 칼빈은 율법의 고발적인 기능을 말한다. 하나님은 그의 높으신 뜻을 표현하는 율법을 우리들이 지켜야 그가 약속하신 구원을 주실 것이었으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저 율법의 고발로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다. 칼빈은 기독교적 자유를 아므과 같이 3가지로 본다. 衁,율법으뢰부터의 자유 遁. 율법의 멍에를 벗은 자만이 율법의 요구에 순응하는 자유 鑁. 중요하지 않은 것들로 부터의 자유.

이 3요소를 중심적으로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衁. 이신칭의에 의해서 믿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양심의 자유를 누린다. 동시에 모든 율법의 고발로부터 해방되었고 모든 율법적 의로 부터 자유한다. 이들 믿는 자들은 모든 율법을 완성하시고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의에 힘입어 양심의 자유를 확보하였다. 遁. 자유의 두번째 의미는 이신칭의에 의하여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은 자유는 율법의 강요에 의해서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미의 뜻을 순종하고 수행한다. 鑁. 인간이 만든 종교적 전통이나 관습등 무관심거리에 해당되는 것들에 의하여 우리의 양심이 속박되어서는 안된다. 기독자의 양심은 교황주의 교회의 모든 법으로 부터도 자유하다.

기도: 그것은 신앙을 훈련시키며 우리는 기도에 의하여 매일 매일 하나님께로 부터 은혜를 받는다. 기독라고 하는 것은 구원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과제이다. 즉, 기도란 하나님의 계명중에 하나로서 구원론적 근거를 갖는다. 다시 말하면 은혜와 신앙과 무관한 불신자들이 기도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칼빈은 기도해야 할 이유를 6가지로 말한다. 첫째로 우리의 마음은 주님을 찾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섬기려는 열저으로 불붙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하며, 우리가 곤궁에 처할 때마다 주님께 달려 가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을 증거자로 여기기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며 우리의 모든 소원을 하나님 앞에 제시하며 우리의 모든 마음을 쏟아 놓을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수용할 준비가 잘 되어지기 위하여 우리는 기도해야 한며 이 기도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손으로 부터 모든 은혜가 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네째로 우리가 바라고 찾던비를 얻으며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확신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열정적으로 명상하도록 인도함을 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해야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기도에 의하여 얻었다고 인정하는 모든 것들을 더욱 큰기쁨으로 받기 위하여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한다. 여섯째로 연약한 우리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확실히 믿게 되려면 역시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시거나 공궁의 상황에서 자기를 부르도록 허락지 아니하시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는 그의 몸의 영광을 이미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여러 다양한 은사를 부여함으로 영화롭게 하기 시작하시고 그것을 계속 점차로 증강시키시사 하늘에서 완성시키실 것이다.

지옥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도 죄와 심판으로 찢겨진 양심은 전혀 평안을 누릴 수 없다. 이와 같은 양심은 무시무시한 소용돌이에 의하여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낯선 심판주에 의하여 조각조각 찢긴다.


제 4권 교회론 및 국가론

1-B, 9632086, 박 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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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사귐에로 초대하시고 이 사귐에 머물게 하시는 외적인 수단.

제 4권의 촛점은 교회론에 있다. 여기서 칼빈은 교회의 본질과 그 기능, 교직, 성찬론및 국가론을 전개한다. 그런데 칼빈은 이와 같은 주제들을 논할 때 잘못된 교리들을 곁들여서 논박한다. 제 4권은 사도신경의 4번째 부분에 해당하는 것인데 부활에 대하여는 제 3권 마지막 부분에서 취급도었고 제 4권 마지막 부분에서는 국가기관이 덧붙여지고 있다. 참 교회:우리는 모든 자들의 어머니인 이 참 교회와 하나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도들을 순간적으로 완전하게 하실 수도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교회의 교육하에 성숙해 가도록 정하셨으니 가장 중요한 것은 목사들의 복음 설교요 교사들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이다. 가시적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논하자.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는 플라톤적 이원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즉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 이데아의 세계에 해당하는 것이 불가시적 교회가 아니라 예정교리 혹은 선택 교리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눈에만 보이는 교회가 바로 인간의 눈에는 보일 수 없기 때문에 불가시적이라는 말이다. 반면에 인간의 눈에 보이는 교회 혹은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교회는 가시적 교회에 해당한다. 그러면 가시적 교회를 판단할 수 있는 표준은 무엇인가? 물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만이 그에게 속한 자들이 누구인지 아신다. 가시적 교회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설교되고 있고 순수하게 경청되고 있으며 성례전들이 그리스도의 의도대로 베풀어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곳마다 거기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교회가 현존한다. 참 교회를 분별하는 표준은 이미 언급한 교회의 표시이다. 즉, 말씀을 순수하게 설교하며 세례와 성만찬을 주님이 제정하신 의도대로 베풀며 이에 대한 반응으로써 순종, 성화, 혹은 삶의 모범이 있어야 참 교회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칼빈은 베드로으 수위권에 대하여 반론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베드로의 뒤를 이은 교황의 수위권과 이 교황에의 절대 복종을 주장하는데 이에 반하여 칼빈은 이것은 성경에 어긋나며 고대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칼빈은 교리결정과 교리 해석 및 교회법제정에 관한 카톨릭 교회의 영적 권한을 비판한다. 칼빈은 구약의 모세나 제사장이나 예언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했으며 권위를 말씀에 두었으며 이들은 다만 말씀을 섬겼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섬겼다고 한다. 칼빈은 교회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해야 한다고 할 때 '율법과 선지자들'및, 사도들의 글이라고 못박음으로 대체로 구약과 신약을 말한다. 칼빈은 말씀과 성령의 긴밀한 관계를 말한다. 칼빈이 성령을 말씀에 밀착시키는 이유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황이 교리에 관한 무오성과 성경해석상의 무오성을 주장함에 있어 성령의 지도와 영감에 의해서라고 하면서도 말씀을 떠난 성령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들로 부터 말씀하시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을때 우리는 복음을 떠난 성령의 가르침들을 믿어서는 안된다. 칼빈은 어느 종교회의의 교리결정이든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며 그 회의가 언제 어디에서 모였고 우슨 문제로 모였으며 누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무슨 말을 했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한다. 칼빈은 신앙의 내용중 중요한 것을 성경에 근거하여 결정한 니케아 회의(325), 콘스탄티노플 회의, 에배소 회의 (431)및 칼케돈 회의(451)같은 종교회의의 교리 결정은 성경의 순수하고 진정한 해석이다. 교황은 그를 지지하는 감독들과 더불어 법을 제정하는 권한을 가졌는데 이로 말미암아 뭇 영혼들이 야비한 폭정과 유린하에 억눌리고 신음하고 있다. 오직 인생을 규제하시고 그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하여 법을 제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만일 인간이 법제정자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특권과 영광을 박탈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법에는 모든 의와 거룩함에 관한 완전한 규정인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으며 하나님만이 거룩한 삶을 위한 규범을 완전히 알고 계신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모든 규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척도로 하여 가늠도어야 한다. 교회의 영적인 법적 권한과 교황주의에 나타난 이 영적 권한의 남용.

교회의 전영적인 법적권한이란 도덕에 관한 치리를 포함ꁁ하는데 이것은 국가의 법적 권한이나 법적용 권한과는 달리 영적 통치를 위한 질서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교회 안에 재판하는 기관이 설치되어 부도덕을 교정하며 범행을 조사하고 열쇠의 직책을 수행할 책임을 교회가 갖는다. 칼빈은 교회의 권한은 전적으로 영적인 것으로 특징지우면서 국가가 지닌 칼의 권한과 구별한다. 그리고 교회의 치리는 한 사람의 결정을 따라 이루어지지 않고 합법적인 회중의 결정을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의 치리권: 주로 책망과 출교에 관한 교회의 권한


치리는 왜 필요하며 그 목적은 무엇인가? 칼빈은 한 가정이나 사회가 살아가는데도 치리가 반드시 필요한데 교회가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더욱 이 치리가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치리의 목적은 무엇인가?세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더럽혀지지 않기 위함인데 합당치 않은 사람에게 떡과 즙을 주는 것은 주님 몸을 개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과 같아서 이들에게 수찬정지를 해야 한다. 둘째로 고전 5:6-11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들 중 악한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온 그리스도의 몸이 더렵혀지므로 이 치리가 필요하다. 셋째로, 결국 최종의 목표는 악한 자들을 회개시키는데 있다. 그래서 칼빈은 살후 3:14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와 고전 5:5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얻게 하려 함이라.에 근거하여 회개를 목적으로 감정적 처벌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치리의 의도와 목적은 일반법이해나 사회윤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성경과 칼빈의 신학사상에 기초한 것이다. 다음 금식과 기도에 대하여 논한다. 금식은 세가지 목적을 가진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어거하기 위하여 금식해야 하는데 이는 공적인 금식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왠냐한면 신체적인 조건이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둘째로 개인이든 교회공동체 전체이든 이 금식은 기도를 위한 준비작업으로 필요항다. 셋째로는 하님이 존전에서 자기를 낮추어 참회하기 위하여 금식이 필요한데 이는 기독교인 개인으로서나 교회와 국가의 차원에서까지 타당하다. 왜냐하면 개인이나 교회나 국가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때에 모두 금식하며 통회 자복해야 하기 때문이다.서원 누구든지 무모하게 서원하면 비참한 자승자박에 말려든다. 서원에 있어서 오류를 피하려면 3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칼빈은 말한다. 衁. 우리는 누구에게 서원을 해야 한나? 遁. 이 서원을 하고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 鑁.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우리는 서원을 하는가? 희랍어로 신비 라는 말이 라틴어로는 성례이다. 성경귀절에 엡 1:9'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취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 3:2-3'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들 터이라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기록함과 같으니 골1:26-27'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螱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하려 하심이라.

성례란 언약들의 표증이어서 하나님의 복음 말씀의 신빙성을 더 분명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칼빈은 어거스틴을 따라서 성례란 보이는 말씀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성례전은 풍요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연상케하는 거울이라고 한다. 떡과 즙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螱이 자기를 낮추어 우리의 능력에 알맞는 매체를 통하여 은혜를 베푿시는 하나님의 사라이다. 성례전이 정말 자체의 직책을 수행하려면 내적인 선생인 성령이 와서 마음에 파고들어와 마음을 감동시켜야 하며 이 성례전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세례와 결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씻어서 깨끗이 하는 의식은 인간 본성의 타락과 부패를 씻는 것에 관한 것으로 그 내실인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셨다. 끝으로 희생제사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희생제사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는 행위와 인간의 죄를 해결하는 방안이다. 복음 말씀을 성령의 조명과 감동으로 들을때에 일어나는 것은 전적인 죄의 용서와 회개이다. 끝으로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접붙여 지는 것을 확증하고 표시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모든 축복을 나누어 가짐을 확증하고 표시한다. 유아세례는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고 표시와 일치한다. 그리스도는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칼빈은 선택교리를 유아세례에 관계시킨다. 즉 구원받을 아이들은 하나님께서 미리 중생시킨다. 칼빈은 세례요한을 하나님께서 이미 태중에 있을때 택정하사 거룩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만찬: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란 무엇인가

교황주의 교회의 미사: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만찬을 속되게 할 뿐만 아니라 형편 없는 것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