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한 하나님을 예배했던 유대인과 고대 그리스도인이 예배했던 하나님이 같았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이해하는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다. 유대교와 기독교에는 분명히 연속성이 존재하면서 불연속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연속성으로는 구약의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 약속과 심판과 구원의 하나님이라 할 수 있으나 초기 기독교의 하나님의 이해는 창조의 하나님이시면서 친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 역사 속에서 체험되는 영으로의 하나님인 것이다. 이런 이해는 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는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받아들여 질 수 없는 불연속적인 하나님 이해가 존재하고 있었다.
가톨릭과 개신교에 있어서 하나님에 관한 이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무엇인가?
하나님 이해가 고대와 중세를 거쳐 체계화된 과정을 간략하게 고찰하고 중세 신학과 종교 개혁신학 , 그 중에서도 아퀴나스의 신 이해와 종교개혁자들 사이의 신 이해를 고찰함으로 두 교회간 신 이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단초를 살피고자 한다. 또 현대에 이르러 가톨릭의 제2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한 변화는 무엇이며 개신교에서 신론의 논의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신론의 역사적 개관
고대 교회 : 교부시대전까지 기독교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변증 이였다. 오랜 변증을 통해 하나님 이해에 관한 주제가 된 것은 그리스도론 이였다. 니케아-콘스탄틴회의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으로 오신 아들로서의 하나님과 교회와 역사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고백하기에 이른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체계화 시초를 고대 신학자들이 놓았고 이를 우리 시대까지 물려주게 된 것이다.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출생하지 않으시고,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영원하고 이해 불가능하며, 불변적인 존재로 언급했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로고스 안에서 드러내시면, 따라서 구원을 위해서도 알려지실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 하나님께서 이해될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알려질 수 있으며, 그에 관한 지식이 구원에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벌코프, 조직신학I, 신론217P).
중세 교회 : 고대가 희랍과 로마 등의 세계에 변증함으로 희랍철학의 개념과 사고로 하나님을 변증한 특징을 갖지만 중세에서는 기독교가 서구 세계화되면서 신학의 주제는 신앙과 이성이라는 틀 안에서 발전한다. 그 방향이 신 인식에 관한 이해로 나아갔고 신 존재에 관한 관심으로 돌려졌다. 안셀름에서 아퀴나스를 이어 후기 유명론 논쟁으로 이어져갔다.
스콜라신학이 중세의 중심 이였다. 스콜라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본성과 속성을 구별하였고, 또한 본질적인 신적인 속성들 안에서 자신이 계시하실 때 그의 본성과 본질에 대하여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스콜라는 신앙적인 인간의 시대에 신과 인간의 관계를 철학적인 면에서 체계를 세웠다. 그 정수리가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라 평가 할 수 있으며 반종교개혁으로 트렌트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는 아퀴나스를 대박사로 칭송하며 그의 신학을 공식적인 교회의 신학으로 삼았다.
종교 개혁 교회 : 오직 성서로만 이라는 개혁교회의 특징은 신 이해의 규준을 성서로 삼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직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이해가 중심이 된다. 삼위일체의 하나님도 성서의 계시된 말씀으로만 조명되어 이해하는 것이 강조됨으로써 가톨릭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자연계시로서의 하나님 인식은 거부되거나 극히 작은 자리를 차지한다.
2. 삼위일체 하나님 : 연속성
고대교회의 에큐메니칼 회의를 통해 결정된 신조들을 통해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가 모두 공유하는 것이다. 고대 교회는 여러번의 에큐메니칼 회의를 통해 여러 가지 대립되는 교리적 문제들을 해결해 왔는데, 특히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오늘날에도 타당성을 갖는 사도적 신앙 내용을 대표한다.
아리우스의 기독론적 종속론에 반대하여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이 하나님의 아들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동일본질을 정통 교리로 내세운 A. D. 325년의 니케아 신조는 정통 삼위일체 신조이다. 이 신조는 성령론의 부분이 "그리고 성령을 믿사오며" 로 끝나고, 성령의 신성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성을 논하지 않는다. 그래서 A. D.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조(the Constantinopolitan Creed)는 성령의 신성을 거부하는 자들에 반대하여, 그리고 세 카파도기아 교부들(Basil the Great, Gregory of Nyssa, Gregory of Nazianzus)의 삼위에 대한 구별과 관계들에 대한 기여를 받아들려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왔고"(아들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낳으셨으나=Begotten), "성령께서는 우리의 주님(the Lord)이시고, 생명의 시여자(the life-giver)시오, 성부와 성장 더불어 예배를 받으시며, 구약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다."를 첨가하였다. 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합한 내용으로 통상 니케아 신조라고도 한다. 그런데 서방교회(로마 가톨릭 교회)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에 "filioque"(그리고 아들에게서도)를 첨가하여 사용해 왔다. 서방교회는 A. D.589년 스페인의 톨레도 공의회에서 성령은 성부께로부터 만이 아니라 성자로부터도 나오셨다는 "filioque" 구절을 첨가하여 A. D. 800년 샬르만뉴(Charles the Great=Karl 대제) 이래로 널리 사용해 오고 있다. 그리고 이때부터 서방교회는 동방교회(=the Byzantine Christianity= the Eastern Orthodox)와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교황의 법적 수위권에 대한 주장과 함께 이 '' filioque" 교리를 내세웠다. 그리하여 급기야 A. C. 1054년에 서방교회와 동방교가 분열되고 말았다. 오늘날 연속성이 차원에서 서방교회(로마 카톨릭, 성공회, 기타 개신교 에큐메니칼 교회들)가 이 "filioque"가 없는 오리지날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A. D. 381)를 함께 인정하고 고백한다(하나의 신앙고백의 서문: 6-8P, 이 형기 엮음, 한국장로교출판사).
3. 아퀴나스의 신관과 종교개혁신학자들의 신관 : 불연속성의 단초
1) 아퀴나스의 신관
아퀴나스는 그의 신학대전에서 자연신학의 부분에서 신의 존재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크게 다섯 가지 측면에서 신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1. 신은 순수 현실적 존재 : 먼저 토마스는 신의 존재를 우주에 충만한 운동으로 설명한다. 즉 모든 운동체는 타에 의해서 운동을 한다. 우주의 가득한 운동의 근원을 찾으면 결국 스스로는 부동적이면서 모든 사물에게 운동을 주는 부동적인 제일 운동의 근원이 존재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신이다. 그런데 도든 동체는 그 자체의 불완전성을 내포하고 있는 반면에 부동적인 존재는 그 현실태에서 절대 완성을 보유한다. 그러므로 신이라는 부동체라는 점에서 그 자체가 절대 완전한 존재임을 말한다. 변화가 있는 개념에게는 시간이란 개념이 떠날 수 없지만 변화가 없는 사물에는 시간이란 측정의 개념이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그 존재에게는 시간이란 개념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신은 절대 완전한 존재로 변화가 용납될 수 없는 존재라고 했을 때 시간의 개념이 용납될 수 없는 존재 즉 과거와 내재하는 시간의 제한을 초월하는 존재 그래서 신은 언제나 현실에 존재하는 "순수 현실"적인 존재인 것이다.
2. 신은 제일원인 : 우주는 모두가 원인과 결과의 상관 율로 전재하며 유동하고 있다. 하나의 결과는 그것의 원인을 전재하며 그 원인은 또 그 위에 다른 원인을 전재하고 있다. 이렇게 모든 사물은 뭇 기성원인들의 연쇄적인 계열 속에서 존재한다. 수많은 계열 속에 존재하는 기성원인들은 그것이 무한히 제한원인이 연속될 수 없고 어떤 한계에 가서는 원인이 되지 않고 스스로 결과된 존재 즉 모든 기성원인들의 제일 원인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이다. 여기서 창조주 조물주라는 신의 이름이 연결된다.
3. 신은 필연유 :이 우주에 충만된 존재는 모두가 우여적인 존재(esse accidentale)이다. 이 우여적인 존재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으므로 시간과 공간이란 제한 속에서만 존재가 가능하다. 그런데 모든 존재가 우연적인 존재뿐이라면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즉 우연적인 존재는 존재 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번 존재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히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현존하는 존재라도 언젠가 그 존재가 없어질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우연적인 존재가 산재한다는 것은 존재자체인 즉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인 존재를 전제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우연적인 존재의 바탕이요 근원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많은 우연유의 존재는 필연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이 필연유가 바로 신이다.
4. 신은 진, 선, 미의 절대 최고 원천이다.
5. 신은 우주의 통치자이다.
토마스가 신의 존재를 규명하면서 결론적으로 신은 존재자체로 정의한다.
순수 현실적인 존재, 제일원인, 필연유, 진. 선. 미의 절대 최고 원천 , 우주의 통치자 등의 신의 개념은 한마디로 절대적인 존재이며 동시에 절대로 완전한 존재의 모습을 설명한다. 그런데 형이상학적으로 적대적인 존재의 개념은 결국 "존재자체"라는 단어로 표현된 것이다.
2) 종교 개혁자들의 신관
칼뱅의 기독교 강요 제 1장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를 통해 그의 신 이해를 들여다 볼 수 있다. 1권 1장부터 2장까지 자연 속에서 나타난 신지식에 관련하여 말하고 있고 3장부터 4장까지에 서는 인간의 내면에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신지식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러나 5장 이후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서를 통하여 계시되는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다.
칼뱅은 인간의 정신 속에는 "하나님에 관한 직관"이 있는데 이것을 종교의 씨앗이라 부르고 이것이 인간이 지닌 종교적 심성으로 실천이성에 해당하나 이것은 구원의 신지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인간의 정신 속에는 진정한 경건이 없으므로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고 인간이 종교의 씨앗을 지녔지만 하나님에 대한 무지몽매로 교만과 고집, 악으로 이 지식은 소멸된다고 한다.
인간과 우주 속에 계시 된 하나님을 성서의 구절 속에서 인용하면서 자연계시로 파악할 수 있는 하나님에 관하여 말한다. 이로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칼뱅은 이러한 우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무지 몽매로 비롯된 것이라고 언급하고 오직 성경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에 관하여 인식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인의 종교성과 윤리적 성취 가능성은 구원에 전혀 공헌 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성서를 통한 하나님 인식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루터는 인간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의 이성에 의하여 일반계시로부터 참된 하나님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스콜라주의자들에게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동일한 어떤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동일한 일반적 관념들을 표현하였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에서 그의 본성에 관한 어떤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조명하시는 하나님의 영향하에서 오직 특별계시로부터만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께서 알려지실 수는 있지만, 인간이 어떠한 방법으로 철저하고 완전한 하나님 지식을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을 적절한 의미의 말로 정의할 수 없으며, 오직 부분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오직 신적인 자기 계시를 통하여,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하나님에 관한 인식의 가능성은 여러 근거에서 부정되어 왔다. 인간은 오직 유비에 이해서만 안다.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으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 사이에는 중요한 유비가 있다. 인간은 실제로 자기가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것만을 알며, 이간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에 관한 모든 술어들은 부정적이기 때문에 아무런 실제적인 지식을 제공해 주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지식의 대상들을 아는 것은 객관적으로가 아니라, 그 대상들이 우리의 감각과 능력에 관계될 때에만 알 수 있는 것으로 언급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 인식을 그는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루터도 자연적 인식을 인정하였다고 알트하우스(P. Althaus)는 말한다(루터의 신학, 파울 알트하우스지음, 이 형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31-32P).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성서는 어느 구절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 인식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충분하다거나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적극적 의미에서의 준비가 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서는 구원에 있어서 자연적 하나님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독교 신앙은 참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길은 자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증언되어 있는 그리스도에게 있다(고후4:4, 골1:15). 또한 다른 종교들과 문화들이 인식하고 있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이 전혀 다른 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신의 절대성, 영원성, 완전성, 이와 같은 신적 본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에도 해당한다. 이것은 기독교가 확보해야할 고유한 특성이다.
4. 제 2 바티칸 공의회와 가톨릭 신관
가톨릭 교회는 철저한 배타주의로 입장을 갖게되는데 1215년 라테란(Lateran) 공의회는 키프리안의 신조를 강화하여 '교회밖에는 전혀 구원이 없다"고 선언했다. 1320년 교황 보니파스(Boniface) 8세는 교회밖에는 구원도 죄의 용서도 없다는 것과 교회에 복종하는 것이 구원에 전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천명했다. 또한 프로렌스(Florence)공의회는 이를 다시 확인하여 "자선을 베풀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피흘렸다고 하더라도, 가톨릭 교회 울타리 안, 통일성 안에 머물러 있지 않는 사람은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다(폴F. 니터,'오직 예수이름으로',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5, p203.).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 교회는 배타주의 적인 입장과 함께 포괄적 요소도 지녔지만 중세 교회로 넘어오면서 교회 중심적 배타주의가 가톨릭 교회의 전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 공의회(1945-1963)에서 다른 종교에 대한 종래의 극단적인 배타적인 입장이 문제가 있음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과 교회의 필연성이 균형을 유지하는 신조를 채택했다. 가톨릭 교회가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주의를 포기하는 분기점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다. 이 공의회의 몇몇 선언은 다른 종교에 대해 보다 긍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카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분수령으로 하여 가지는 입장은 다음과 같다(현대신학논쟁, 목창균, 430p). 첫째 가톨릭 교회의 종교 신학 흐름은 교회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을 거쳐 신 중심주의로, 또는 배타주의로부터 포괄주의를 거쳐 다윈주의로 변천하고 있다. 고대에는 동방 교회를 중심한 포괄주의와 서방 교회중심의 배타주의가 혼재하는 등 비교적 다양한 입장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중세에 들어서면서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극단적인 배타주의와 교회 중심주의가 교회를 지배했다. 그러나 제2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는 배타주의가 포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최근의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신 중심주의적 다원주의를 전개하고 있다. 둘째, 가톨릭 교회의 공식 입장은 기독교 절대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 양극 사이에 위치한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많지만 규범은 하나라는 포괄주의다(니터, p199). 다른 종교에는 구원의 가능성이 있지만 그 역시 그리스도를 통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 교회가 수용하지 않았던 저스틴과 클레멘트 등의 포괄주의로 복귀한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삼위일체적인 선상에서 하나님의 이해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식되며, 이를 통해 구원의 유일성을 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