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 나타나는 하나님 생각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문학박사 박기완
1. 존재와 소유
영어로 된 'I have a book.'이라는 말을 우리말로 옮겨보라면, 대부분의 학생
들은 '나는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로 옮긴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 우리
말이라기보다는 영어를 한국어로 표현한 정도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우리말이라면
당연히 '내게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은 영어교육의 영향으로 이러한 잘못을 아주 자주 범하
고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많은 이들이 '나는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가 무엇이 잘못된 거냐고 되물을 것이다.
여기에는 엄청난 사고의 차이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존재와 소유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존재'와 '소유'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이다. 존재
란 무엇이 있다는 말이고, 소유란 존재하는 그 무엇을 내가 취하여 내 것으로 만든
다는 말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은, 이렇게 따져보면 엄연히 다른 것이고, 또한 우리
가 분명히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사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
다.
아주 먼 옛날 이 땅에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던 시절을 상상해 보자. 그때에는
사실 존재와 소유가 그렇게 분명하게 구분되어 인식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든
다. 왜냐하면 사람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내 눈에 보이는 것을 모두 내가 차지해도
누가 뭐라고 말할 사람이 별로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좋은 시절이었을
것 같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내 것!
그러나 사람의 수가 차츰 많아지면서 사람들 사이에 소유의 한계가 중요한 문
제로 떠오르게 된다. 이제는 내 눈에 보이는 게 모두 내 것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
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존재를 존재로 인정하고 소유의 범위를 차츰
차츰 줄여나가는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전에는 그 둘을 구분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나의 소유의 한계가 거의 무한정하였으나 이제는 존재에 비해 소유가 얼마나 제한
적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다.
각 나랏말에 이러한 인식의 흔적은 조금씩 남아 있게 마련이다. 독일말을 보기
로 들자면, 독일말의 Mann은 남자라는 말도 되고 남편이라는 말도 된다. 그리고
Weib라는 말도 마찬가지인데, 이 말에는 여자라는 뜻도 있고 아내라는 뜻도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좀 과장된 해석인지는 몰라도, 이것은 '내 눈에 보이는
남자는 모두 내 남편, 그리고 내 눈에 보이는 여자는 모두 내 아내'라는 식의 사고
방식에서 나온 말은 아닐까? 이러한 현상은 비단 독일말에만 있는 게 아니라, 프랑
스말에도 있고, 대부분의 인도유럽말에 다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말에도 그런
현상은 있다. 옛말에서는 '남진'이라는 말이 남자의 뜻으로도 쓰였고 남편의 뜻으
로도 쓰였던 것이다.
중국어에 있어서도 한자 '유'자는 존재도 나타내고 소유도 나타낸다. 오늘날에
는 문법적으로 그것이 존재를 나타낸다고 말하나, 실제 중국 사람들은 아직도 그
글자가 소유를 나타낸다고 생각하며 또한 그렇게 현실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유서'라는 말을 영어로 옮길 때 모두 'I have a book.'으로 옮
기지 'There is a book at me.'라고 옮기지는 않는 듯하다. 그리고 영어에서 중국
어로 옮길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 본래 존재와 소유에 대한 인간
의 인식이 아주 불분명했음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겠다.
이 밖에도 무엇이 존재한다는 말을 할 때, 그 표현 방법에 이러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영어를 보기로 들자면, 'I see a book on the desk.'(내가 책상 위에 놓인
책 한권을 보고 있다.) 따위를 들 수 있겠다. 이것은 책의 존재를 존재 그대로 인
정하고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나와의 관련에서 그 존재를 인식하며 인정한다는 말
이다. 즉, 내가 그 책을 본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결국 그 책의 존재는 문제가 될 게 없고, 다만 내가 그 책을 '가지고 있느냐'(have
a book) 아니면 '보고 있느냐'(see a book)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까지도 자꾸만 소유로 인식하려는 의식의 잔재라 할 수 있겠다. 물
론 영어에서는 위와 같은 표현 뿐만 아니라, 'There is a book on the desk.'(저기
책상 위에 책 한 권이 있다.)라는 표현도 있어, 존재를 존재로 그대로 인식하고 말
을 하는 표현법도 있다. 그러나 우리말에는 없는 'I see a book on the desk.'와
같은 표현 방법이 있는 것을 보면, 그네들은 우리와는 상당히 다른 사고방식을 가
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떤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바로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때에 그것을 나의 소유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그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 글의 처음에 내세웠던 영어 문장을 다시 생
각해 보자. 'I have a book.' 내가 책을 한 권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별로 문제
될 게 없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말로 옮길 때에 '나는 책을 한 권 가지고 있다'라
고 옮기면 아무래도 어색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내게 책이 한 권 있다'라
고 옮겨보라.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그리고 그 말하고자 하는 대상이 책과 같은 사
물이 아니라 사람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영어 문장 'I have a brother.'를
우리말로 옮길 때, '나는 한 명의 동생을 가지고 있다'라고 옮길 수 있겠는가? 말
이 되질 않는다. 이것은 당연히 '내게는 동생이 한 명 있다'라고 옮겨야 한다. 그
래야만 우리 한국말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정서에 맞게 되는 것이다.
자,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존재와 소유에 대한 인식의
차이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이 세상 모든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그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고 인식하는 반면, 영어와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
존재를 자기의 소유로 인식하거나 또는 적어도 자기와의 관련선상에서 인식하는 것
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현실적으로 분명히 내 것이라, 나의 소유라 할 수 있는 것
에 대해서조차도 '내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라고 표현하기보다는 '나에게 그것이
존재하고 있다'라고 표현한다.
만일 내게 책이 한 권 있다고 하자, 그때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당연히 'I
have a book.'이라고 표현하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그 책에 대한 자기의 소유권
을 분명히 한다. 그들은 그 책을 다만 자기의 소유물로 인식할 뿐이다. 그러나 우
리는 그렇지 않다. 이때 우리는 '나에게 책이 한 권 있다.'라고 표현하여서, 그 책
의 존재가 지금 나와 함께 한다는, 즉 '나에게 책이 한 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을 말할 뿐이다. 그 책을 나의 소유물로 인식하기보다는 그 존재 자체를 그대로 인
정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고의 차이는 참으로 큰 인식론의 차이이며 세계관의 차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영어와 같은 인도유럽말을 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을 볼
때, 먼저 소유를 생각한다고 하면, 너무 큰 오해일까? 그리고 우리 한국사람들은
그와는 반대로 이 세상을 볼 때, 먼저 자연 그대로의 존재를 생각한다고 하면 착각
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말과 정신 사이의 불가분의 관계를 이해하는 사
람이라면 누구나 동감할 수 있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무수히 많다. 인
간의 머리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이러한 인식론과 세계관에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
문이다. 여기서는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해 한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물질을 생각해 볼 때, 그
가운데 진정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
은 과히 그렇게 어렵지 않다. 우리말에도 있지 않은가, '공수래 공수거'(공수래 공
수거)라는 말이 말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 정말 내 것이라고는 없다. 모든 것이 창
조주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다만 그것을 나름대로 활용하다가(또는 빌어 쓰다
가) 후손에게 그대로 물려주고 돌아갈 뿐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 가운데 하나
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사람들은 이러한 진리를 아주 오래 전에 잘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말에 그 깨달음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도유럽말을
쓰는 사람들(또는 그와 같은 표현법을 쓰는 사람들 모두)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이 세상이 마치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인양 착각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우리더러 소유하라고 주신 게 아니다. 잘 다스리라고 주셨다. 즉, 잘 활
용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소유하기에만 급급하지 않았는가?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욕심'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성경에 보면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자라서 사망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진리다. 그리고 불교에서도 만
가지 고뇌의 근원이 욕심이라고 한다. 아마 거의 모든 종교에서 다 같이 말하고 있
을 것이다. 우리는 이 욕심에서 벗어나 창조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
로 알아야만 인간으로서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우리 한국인들은 스스로 깨닫든지 깨닫지 못하든지 간에 아무튼 그 말에서 세
상 사물의 존재의 원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래서도 아니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이 세상
은 계속 하나님의 것으로 그냥 그대로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1994. 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