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과 종교

고현영(목사. 제3세계신학연구소 상임연구원)

중고등학교 시절에 시험이 내일로 다가왔는데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아서 걱정을 하다가 세상이 끝나는 꿈을 꾸면서 단잠을 자버린 경험

들이 있을 것이다. 만사가 어긋나고 심사가 뒤틀려서 "에이 이놈의

세상, 확 망해버려라"고 투덜대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세상

이 이러다가는 곧 망하고 말지" 하는 위기의식은 아마 대부분의 사람

들이 느끼는 심정일 것이다.

종말에 대한 생각은 사실 특수한 것은 아니다. 굳이 종말론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정도와 내용의 차이는 있지

만 종말을 의식하면서 산다. 특별히 종교라면 어느 것이나 종말론적

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고 기독교의 경우는 종말론이 그 본질적

인 요소를 이루고 있다. 역사적으로 종말을 강조하는 운동이 종종 큰

관심을 모으고 반향을 일으켰던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종말론이 아무 때나 등장하여 사람들을 끌어모았던 것은 아니다. 종말

론이 쟁점으로 등장할 때는 사회적으로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

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종말론이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는 것은 대부

분 사회가 전반적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이다. 즉 큰 전쟁을 전후한

시기라든지 정치나 경제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한 때 혹은 큰 전염병으

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든지 할 때, 다시 말해 사회가 파

국으로 치닫고 개인적으로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대에 종말론은 기

승을 부리게 되는 법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종말론이 커다란 문제거리가 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다 알다시피 사회가 전반적으로 가치나 질서를 말할 아

무런 기준이나 근거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상이나 꿈을 가지는 것

은 어리석은 일이 되고 허황된 망상이라고 생각되는 일들은 현실로 이

루어지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늘상 보면서,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정상적으로 사는 일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좌절감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마음을 의지하고 기댈만한 '흔들리지 않는'

중심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살인과 강간은 일상적으로 일

어나 모든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핵전쟁을 포함한 전쟁

의 위협도 그렇고, 환경문제도 이제는 우리의 목줄기를 노리는 비수의

형상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종말론이 사람들의 관

심을 모으고 사회적인 쟁점이 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일 것

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종말론 자체를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니

다. 상황이 종말론이 나올 만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 그

렇기 때문에 종말론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종말론은 엄밀하게 따지자

면 종말론이라기 보다는 '휴거론'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들의

주장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올해 10월 28일에 휴거라는 사태가 벌어

진다는 것인데, 이것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앞으로 종말 전까지 있

을 '대환란'을 겪지 않고 살아있는 채로 하늘로 들려 올려져서(휴거)

하늘나라에 간다는 내용이다. 물론 휴거라는 사건 자체가 신학적으

로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날짜까지 못박

아서 시간표를 제시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단사설에 불과한 것이지

만, 신학적이고 종교적인 논란을 떠나서라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 팽배

하고 있는 종말론은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것은 대단히 이기적이고 배타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사

방을 다니면서 구원을 외치지만, 그 구원이라는 것은 반드시 자기들의

주장에 동의하고 자기들의 동아리에 소속되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고, 그 동아리라는 것도 개방적이라기 보다는 결사체적인 성격을 가진

대단히 폐쇄적인 집단이다. 따라서 그들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

을 얻기를 원한다기 보다는 자신들이 구원받았다는 데서 만족을 느끼

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들은 종말을 대비해서 세상을 등지고 자기들만의 공동체

속에 은둔하여 도피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재산과 가족 등 현실의 모

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종말에만 집중하여 현실에서의 삶의 적극적인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편집증이라고 하는 정신병의 한 형

태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들은 자기모순을 드러내는데, 지상에서의

삶의 포기를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자기들이 공동체에 바친 재산으로

백년 쯤은 버틸만한 회관을 건축하는 등 대단히 현세지향적인 행위

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그들의 종말론은 대단히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다. 기존의

모든 가치와 전통, 질서와 규범들을 전혀 무시한다. 가족관계를 파괴

할 뿐만 아니라 가족의 생활수단까지 공동체에 헌납하여 가족의 생계

까지도 위협받게 한다. 결국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

다는 식의 대단히 비윤리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는 것이

다. 이런 것은 그들의 전도행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비좁은 지하

철 안에서 확성기를 들고 다니면서 전도하는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세상에 자기밖에 없다는 식이다.

분명 그들의 행위는 어떤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그 역시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현상을 생산해 낸 정치와 경제, 사회에 동시에 책임을 물

어야 하고, 그 책임은 구체적으로는 우선적으로 정권, 자본, 교육을

담당하는 책임자들에게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종교 특히 기독교의

책임 또한 엄격하게 물어야 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은 '끝'이라는 의미보다는 '시작'이라는 의

미가 강하다. 종말은 전혀 새로운 시작이다. 이전의 낡고 그릇된 모

든 것들, 악하고 불의한 모든 것들에 대한 부정이고 그런 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종말은 그것을 기다리며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 이후의 새로운 시작, 즉 하나님 나라를 위해 지금 최선을 다해

준비할 것을 요구한다. 종말의 시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포기가

아닌 인내이며 도피가 아닌 투쟁과 승리이다. 현실의 억압과 고통과

불의를 견뎌내며 끝까지 버티며 싸워 이겨 새로운 시작을 이끌어 내라

고 한다. 최소한 새로운 시작에 걸맞는 모습으로 새 세계를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된 종말론은 현실을 포기하고 도피하라

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최선을 다해서 자기 자리를 지켜서 종말 이

후,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고 있으라고 촉구한다.

종교는 초월을 포함한다. 초월이란 현실을 떠나 멀리 가는 것이 아

니라 현실 속에서, 현실의 변혁을 통해 현실을 뛰어 넘는 것이다. 그

것은 현실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으로 미래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의 삶을 미리 살고, 그 힘으로 현실을 미래로

이끌어 내는 것이다.

교회가 이런 내용을 잃어버린 채 그저 현실 속에서의 안락과 풍요를

추구해 왔기 때문에 교회는 종말론에 대해 공동의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이제부터라도 교회가 자기의 본질을 회

복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일

것이다.